팔·다리 잃었지만 한국 자유 지켜 .. 후회 없다

채병건 2014. 10. 24.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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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백선엽 한·미동맹상 웨버 대령워싱턴 19인 용사상 실제 모델한국전 참전 원주전투서 큰 부상종전 후 전쟁 기념비 설립 앞장서

미국 워싱턴의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공원에는 우의를 입은 미군들이 비를 맞으며 전진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19인 용사상이 있다. 이중 한 동상은 한국전 당시 대위였던 윌리엄 웨버(89) 전 미 육군 대령을 모델로 했다. 웨버 전 대령이 제2회 '백선엽 한·미동맹상'의 수상자로 선정됐다. 한·미동맹에 기여한 미국 인사에게 수여되는 백선엽 한·미동맹상은 본지가 후원하고 국방부가 주관하는 상이다.

 국방부는 웨버 전 대령이 한국전쟁에서 187공수부대 장교로 참전해 오른 팔·다리를 잃은 데다 1980년 전역 후 한국전쟁을 미국 사회에 알리는데 기여한 공로를 평가했다고 밝혔다. 웨버 전 대령은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비 건립위원회'에 참여해 기념비 설립에 나섰으며, '한국전쟁 기념비 기금 재단' 의장으로 한국전 DVD를 제작해 모금 활동을 주도했다. 그를 23일(현지시간) 워싱턴의 한·미연례안보협의회(SCM) 기자회견장에서 진행된 수상식에 앞서 만났다.

 - 한국전쟁에서 큰 부상을 당했다.

 "1951년 2월 원주전투에서였다. 도로가 내려다보이는 300∼400m 고지를 놓고 사흘 밤낮으로 싸웠다. 중공군을 몰아내고 산지를 점령했지만 중공군은 계속 몰려왔다. 적군이 던진 수류탄이 옆에서 터지며 팔과 다리를 잃었다. 피가 흐르다 굳을 정도로 추웠다. 중공군을 막아냈지만 부대원 중 21명이 죽고 34명이 다쳤다. 나도 결국 쇼크가 와 후송됐다."

 - 상이군인이 됐다.

 "부상 이후 인생이 바뀌었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참전은 군인의 의무다. 무엇보다 내가 한국인들이 자유를 누리는데 작은 도움이라도 줬다면 그것만으로도 자긍심을 느낀다. 한국전쟁은 정치적으론 승리가 아닐지 모르지만 내겐 자유를 원하는 한국 국민을 공산주의로부터 지켜낸 승리한 전쟁이다. 한국전쟁 이후 소련과 중공은 자유국가를 군사력을 동원해 직접 공격하지 못했다."

 -'19인 용사상'의 모델이다.

 "내가 아니라 카투사(KATUSA) 병사 얼굴이 19인 용사상에 들어간 게 더 중요하다. 19인 용사상을 만들 때 백인·흑인·히스패닉·아메리카인디언 등 모든 인종의 참전 미군을 담으려 했다. 그런데 동양인이 없어 한국전쟁 때 미군으로 참여한 한국인(카투사)들을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해 성사시켰다. "

 -미국에선 한국전쟁이 '잊혀진 전쟁'이다.

 "교과서에 많아야 다섯 문단으로 적혀 있으니 '모르는 전쟁'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우리는 자유를 원하는 이들을 도왔다. 이런 교훈과 철학이 교과서에 담겨 있지 않은 게 문제다. 전역 후 광야에서 혼자 외치는 것처럼 한국전쟁은 자유를 지켜낸 전쟁이라고 외롭게 외쳤다. 처음엔 반향이 없었지만 이젠 나만 외치는 게 아니다."

 -한국 국민들에게 수상 소감을 전한다면.

 "이 얘기를 하고 싶다. 지금 여러분들이 누리는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누군가의 희생이 뒤따랐다. 자유를 위해 가장 큰 희생을 한 건 누구였는가. 바로 한국 국민들이었다."

워싱턴=채병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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