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년간 에로영화만 300여편 찍어.. 바로 내 얘기"

고경석 입력 2014. 10. 23. 21:48 수정 2014. 10. 23.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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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레드카펫' 박범수 감독

경험 바탕으로 시나리오 직접 써 부산영상위 지원 첫 상업영화 만들어

"성인영화 감독 꼬리표 족쇄였지만 꿈 이뤄져 행복… 그 곳에 감사한다"

박범수 감독은 "영화 현장으로 갈 수 있는 길도 몰랐고 아는 사람도 없어서 먼 길을 돌아온 것 같다"며 "좋은 교육을 받은 영화인들이 부러웠다"고 말했다. 한주형 인턴기자(한양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3)

영화 '레드카펫'에선 윤계상(아래 사진 오른쪽)이 에로영화 감독 박정우 역으로 출연했다. 한주형 인턴기자(한양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3)

박범수 감독(36)은 '베테랑 신인'이다. 극장용 영화는 23일 개봉한 '레드카펫'이 처음이지만 지난 10여년간 300편 이상의 에로영화를 연출했다. 극장용 영화 한 편을 찍기 위해 10년째 에로영화만 찍어온 영화 속 정우(윤계상)의 실제 모델이 박 감독 자신이다. 개봉 첫날 그를 만났다. 영화관에 자신의 영화를 처음 내걸게 된 소감을 묻자 그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레드카펫'은 에로영화 감독 정우가 아역배우 출신의 은수(고준희)를 만나 사랑도 이루고 꿈도 이룬다는 내용의 영화다. 박 감독의 실제 경험을 생생한 대사로 녹여낸 이 영화는 통통 튀는 로맨틱 코미디인 동시에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청춘들을 그린 따뜻한 성장 드라마다.

영화엔 성인물 전문 배우도 출연하고 19금 촬영 장면이 나오지만 적나라한 노출은 없다. 그래서 등급도 15세 이상 관람 가다. 박 감독은 "배우의 나체도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싶었지만 거부감이 들 수 있다는 지적이 있어서 뺐다"고 했다. 애초부터 성인영화 이야기를 아예 빼는 게 낫지 않느냐는 충고도 많이 들었지만 정면 돌파하자는 생각에 자신의 이야기로 시나리오를 썼다. "나를 소개하는 한편 나의 자양분이 됐던 그 곳에 감사를 표시하면서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어린 시절 부모와 함께 TV '주말의 명화' '명화극장'을 보며 막연하게 영화감독을 꿈꾸던 그는 작가를 준비하다 우연찮게 에로영화에 입문했다. 대학 졸업 후 입사한 모바일 콘텐츠 제작사가 매출 비중이 높은 성인물 제작에 집중하면서 에로영화의 대본을 쓰게 됐고 결국 연출까지 하게 된 것이다. "많이 찍을수록 수익도 더 많이 남는" 성인영화 시스템에 맞춰 기계처럼 찍어냈다. 200만원짜리 영화를 열심히 찍다 보면 언젠간 2억원짜리 영화도 찍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그 자리는 늘 해외 유학파나 영화 전공자들의 차지였다.

외부의 차별보다 더 힘든 건 내부 차별이었다. 영화를 정식으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에 시나리오 관련 책을 있는 대로 구해서 읽었고 각종 사설 영화 관련 학원을 다녔다. 시나리오를 써서 여기저기 돌렸지만 성인영화 감독이라는 이력이 늘 장애물이 됐다. 2012년 '레드카펫' 시나리오가 부산영상위원회의 영화기획ㆍ개발지원 사업에 선정되고 나서야 그 높은 장벽을 깰 수 있었다. 가족에게도 뒤늦게 비밀을 밝혔다. 독립영화가 아닌 에로영화 감독이었다는 사실을 부모도 장인, 장모도 '레드카펫'을 찍은 뒤에야 알았다고 한다.

박범수 감독은 "에로영화 배우들은 다를 것 같지만 실제로 만나 보면 평범한 사람들"이라며 "성인영화와 상업영화 현장은 엄청 다를 줄 알았는데 막상 해보니 본질은 비슷했다"고 했다.

'인생은 아름다워' '노팅힐'처럼 따뜻한 코미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박 감독은 벌써 차기작을 준비 중이다. 한 편은 코믹 첩보물이고 또 하나는 휴먼 코미디다.

"전 커다란 꿈은 꾸지 않습니다. 그런 꿈은 이뤄지지 않을 수도 있고 저를 힘들게 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작은 꿈을 여기저기 배치해놓죠. 오늘 영화가 개봉한 것만으로도 제 꿈 하나가 이뤄졌으니 행복합니다." 고경석기자 kav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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