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이렇게 아들의 '스펙 조작'에 가담했다

입력 2014. 10. 23. 16:10 수정 2014. 10. 24.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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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신방과 가기 위해 다큐멘터리 집중 시청

보름 본 것을 15년간 본 걸로 '자소서' 꾸며

결과는 '꽝'…

링 안으로 뛰어들고 싶은 부모들

개입 못 막으면 입학사정관제도 '꽝'

김의겸의 우충좌돌②

얼마 전 어느 '목동 엄마'가 현직 교사와 짜고 가짜 스펙을 만들어 아들을 유명 한의대에 합격시켰다 들통이 난 적이 있었다. 그 사건 직후다. 모처럼 식구들이 다 모여 저녁을 먹고 있는데 대학 1학년인 아들 녀석의 카톡이 계속 울려댔다. 아들이 열어보더니 "야! 스펙 조작해 한의대 들어간 학생이 우리 고등학교 선배네. 애들이 카톡방에서 난리야"라고 전해줬다. 그 말을 듣더니 고등학교 2학년인 딸이 "헐~. 학생 대신 시를 써줘 상을 받게 한 교사는 우리 학교 선생님인데"라고 놀란다. 그러고 보니 나도 그 시인 교사를 안다. 그가 등단할 때 낸 시집이 한동안 내 책상에 꽂혀있기도 했다. '참 희한한 인연이군' 하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아내까지 거든다. "난 그 엄마를 본 적이 있어."

지난해 봄 아들이 다니던 고등학교 강당에서 진학설명회가 열렸는데 문제의 그 엄마가 '난 이렇게 한의대를 뚫었다!'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는 것이다. 외모부터 남달랐다고 한다. "거기 온 아줌마들이 다 펑퍼짐한데, 그 아줌마는 날씬한 데다 하이힐까지 신으니 다들 기가 죽었지. 게다가 파워포인트까지 써가며 강연을 하더라구." 내용인즉슨 자기 아들이 중학교 때 취미로 곤충을 길렀는데, 그 경험을 생명과 의학에 대한 관심과 열정으로 연결시켜 스펙을 만들었고, 그걸로 한의대의 높은 문턱을 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엄마는 '아이가 겪은 경험을 하나도 놓치지 말고 입시와 연결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자료를 모으라'고 충고했다고 한다. 대부분의 학부모들이 "아이고, 그런 걸 언제 다하고 앉아 있나"라고 한숨을 쉬는데, 결정적인 한방을 날리더란다. "전 우리 애 대학 보내려고 다니던 직장도 1~2년 휴직을 했어요. 아이의 운명이 걸린 문제인데 직장이 뭐 그리 중요하겠어요?"

그 엄마는 경찰 조사에서 "강남에서는 다들 이렇게 하는데, 왜 나만 문제 삼느냐"고 억울해했다고 한다. 그 몰염치 때문에 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자식 둔 부모라면 누군들 반칙을 저지르고 싶은 유혹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싶다. 나부터 찔리는 구석이 있다. 지난 여름이다. 아들이 종이 몇 장을 불쑥 내밀면서 "아빠, 자기소개서인데 좀 봐줘"라고 하는 것이다. 몇 줄 읽지도 않아 눈앞이 캄캄해졌다. 방송국 피디가 되고 싶어 신문방송학과에 지원한다는 녀석이 기껏 내놓는 스펙이 영화 <해리포터> 시리즈를 여러번 봤다는 것밖에 없었다. 원서 마감은 보름 앞이었다. 방법이 없었다. 우리 부자는 여름밤 무더위 속에서 모기에 뜯겨가며 매일 다큐멘터리 한 편씩을 봐야 했다. 그것도 사회성 짙은 문제작 위주였다. 아들이 어려서부터 다큐멘터리를 즐겨봤고 그를 통해 세상을 보는 안목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있는 것처럼 자기소개서를 꾸미기 위해서였다. 15일 만에 본 다큐멘터리를 15년에 걸쳐 본 것처럼 위장해 자기소개서를 한줄 한줄 채워나갔다. 2008년 미국의 금융위기를 다룬 영화 <인사이드잡>을 볼 때는 아이가 내용 자체를 아예 이해하지 못했지만 할 수 없었다. 아들은 이미 몇 년 전에 이 다큐멘터리를 보고 월가의 탐욕에 분노하고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기로 결심한 '열혈 소년'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물론 '꽝'이었다. 애초 우리 같은 '얼치기 부자 사기단'에 넘어갈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속지 않을 걸 알면서도 끝까지 속여보려고 하고, 다들 속이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 넘어가주는 제도가 입학사정관이구나 하는 씁쓸함은 남았다. '스펙 꾸미기'에 동원할 수 있는 돈과 권력, 정보가 있다면 더 그럴 듯하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애초 아이들에게 투자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부모와 그렇지 못한 부모 사이에 넘지 못할 벽을 세우고 있다. 입학사정에 참여해 본 어느 역사학과 교수의 경험담이다. 다들 비슷비슷한 내용의 자기소개서를 따분하게 읽고 있는데, 한 아이의 체험 사례가 눈에 확 띄더란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를 따라 해외 여행을 많이 다녔는데 특히 역사 유적지를 자주 찾았다. 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 벽화를 비롯해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 런던의 대영박물관 등등…." 부모의 경제력 덕에 얻은 경험이지만 이 학생을 안 뽑아 줄 수가 없더란다.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부모가 개입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우리나라 최고의 부자 삼성 이건희 회장의 아들 이재용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이재용은 서울대 동양사학과 87학번이다. 당시는 학력고사를 치른 뒤 나온 점수를 가지고 원하는 대학과 학과에 원서를 넣는 방식이었다. 어디에 접수하느냐에 따라 당락이 결정된다. 그 정보를 얻어내기 위해 당시 삼성의 계열사였던 중앙일보는 사회부장의 지휘 아래 서울대 출입기자(먼 훗날 청와대의 홍보수석이 된다)와 몇명의 기자를 현장에 투입했다. 이들이 대학 당국자를 붙잡고 밀착 취재한 결과 6시 마감 직전 동양사학과가 가장 유리하다는 걸 알아낸다. 급하게 연락이 오고갔고, 이재용은 접수 창구가 문을 닫기 직전 원서를 내는 데 성공한다. 당시 서울대를 출입했던 다른 언론사의 고참 기자로부터 들은 얘기니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기자들의 정보가 이재용 당락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길이 없다. 정보는 부차적인 것이고, 제일 중요한 건 학력고사 점수였다. 최소한 이재용의 학력고사 점수가 서울대 인문대에 지원할 정도는 됐던 것이다. 이재용도 다른 학생과 똑같은 조건에서 학력고사를 치렀으니 게임의 룰은 공정했다고 할 수 있다. 천하의 이건희라도 그 학력고사 점수까진 어쩌지 못했던 것이다. 링 안의 선수와 링 밖의 코치 사이에는 엄격한 선이 그어져 있었다.

입학사정관 자체를 부정하는 건 아니다. 우리 교육이 과거식으로 1등부터 꼴등까지 일렬로 세우는 방식이라면 미래에 대처할 능력이 상실된다는 데 전적으로 공감한다. 문제는 학교 울타리 안에서 학생들끼리 공정하게 경쟁하도록 하는 게 아니라 자꾸 부모들이 끼어들 여지를 만들어 편법과 반칙이 판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는 것이다. 어릴 때 즐겨보던 프로레슬링 태그매치에서는 링 밖의 선수가 가끔씩 교대도 하지 않은 채 링 안으로 들어와 우리의 박치기왕 김일을 가격하는 반칙을 하고는 했다. 그때 우리는 하도 분하고 억울해서 눈물까지 글썽이고는 했는데 우리 입시가 그래서는 희망이 없는 것이다. 다행히 내년부터는 학생의 외부 스펙을 반영하지 못하도록 입학사정관제도가 바뀐다고 한다. 그래도 부모들이 힘과 돈을 가지고 끼어들 여지는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다. 이를 막아내지 못하면 "왜 나만 문제 삼느냐"는 목동 엄마의 항변은 계속될 것이다.

우리 집 큰아이는 수시에서 떨어졌지만 다행히 수학능력시험을 평소 실력보다 잘 봤다. 그 점수로 정시에 원하던 대학에 들어갔다. 그래서 내년이면 고3이 되는 딸에게 말한다. "너도 그냥 수능 성적만으로 대학에 들어가라." 하지만 정시로 뽑는 인원은 20~30%밖에 안 된다. 수시 철이 되면 또다시 자기소개서를 쓰게 될 것이다. 난 또 무슨 말을 지어내 그 넓디 넓은 자기소개서를 채워야 할지 은근히 걱정이 앞선다.

김의겸 기자 kyum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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