靑 상징 '봉황' 새겨진 물건 보여주며 피해자 안심시켜

정현수 기자 2014. 10. 21. 02:34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청와대 사칭 간 큰 사기꾼들의 '작전' 패턴.. 2007년 이후 '사기' 판결문 분석

'대통령 비자금 관리인'이라는 사기꾼의 '떡밥'이 아직도 통하는 시대다. 시대가 흘렀지만 사기 방식은 변하지 않는다. 대통령의 비자금을 세탁하려는데 돈을 투자하면 막대한 이자를 얹어주겠다는 상투적인 수법이다. 범죄 전문가들은 비자금 관리인 사기범죄가 권력을 통하면 벼락부자가 될 수 있다고 믿는 피해자들과 그런 심리를 파고드는 사기꾼들이 만들어낸 합작품이라고 분석했다.

◇'봉황' 들어간 물건, 위조수표 보여주기=국민일보가 2007년 이후 비자금 관리인 사칭 사기 판결문 9건을 분석한 결과 사기꾼들은 천편일률적인 방법으로 피해자들을 현혹시킨 것으로 20일 나타났다. 우선 사기꾼들은 위조수표나 조작된 문서 등을 보여주며 피해자들의 믿음을 샀다.

박모(61)씨는 2007∼2011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구권화폐, 달러, 금괴 등 비밀자금을 관리하고 있다"며 사기행각을 벌였다. 박씨는 피해자들에게 위조된 구권화폐를 보여줬고, 박씨에게 속아 넘어간 피해자들은 모두 8억여원을 박씨에게 건넸다. 수사기관의 압수수색 결과 박씨 은신처에서는 100만 달러짜리 위조지폐 1996장이 발견됐다. 2조원이 넘는 액수였다. 박씨는 지난해 항소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청와대와 관련 있는 물건들을 보여주며 피해자들을 안심시키는 경우도 흔한 기법이다. 2010년 사기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A씨(64)는 평소 청와대 문양이 들어간 넥타이핀과 커프스 버튼 세트 등을 보여주며 청와대와의 친분을 피해자들에게 자랑했다. 결국 '일제시대 위정자들과 역대 대통령들의 비자금 창고를 열어야 한다'는 A씨 말에 속은 피해자는 8억3000여만원을 투자했다가 낭패를 봤다. 건국대 경찰학과 이웅혁 교수는 "권력실세 사칭 사기꾼들은 '봉황' 문양이 들어간 물건 하나쯤은 기본적으로 들고 다닌다"고 말했다. 최근 박근혜 대통령 상임특보를 사칭했다가 기소된 김모(74·여)씨는 사무실에 자신의 생일에 맞춰 박 대통령이 보낸 것처럼 제작된 화분을 갖다 놓기도 했다. 청와대 직함이 들어간 명함과 '청와대 사람'인 척 연기하는 '바람잡이'도 관련 사건에서 빠지지 않는 요소다.

◇한번 낚이면 밑 빠진 독에 돈 붓기=사기꾼의 덫에 한번 걸리면 헤어 나오기 쉽지 않다. 사기꾼들은 약속된 이자 지급일을 차일피일 미루며 피해자들의 돈을 뜯어낸다. A씨는 "구권화폐를 운반하는 데 일본인 인부가 필요하다" "금괴를 운반하는 데 비파요원이 필요하다" "컨테이너 구입·운반 비용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비용을 요구했다. 일본인 동원비용을 'JPN 비용', 비파(비밀 파견) 요원의 금괴 운반을 'G-B3', 컨테이너 구입·운반은 'CT 작업'으로 칭하는 등 그럴듯한 암호를 지어내 피해자들을 속였다. 2011년 기소된 유모(46)씨는 "창고를 열어야 하는데 이상득 의원이 방해를 하고 있다"며 다른 창고를 열기 위한 비용을 피해자에게 요구했다.

이밖에도 차량 렌트 비용, 호텔숙박 비용, 식대 등을 요구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김모(60)씨의 경우 2000년부터 2006년까지 피해자로부터 차량 렌트 비용 등을 포함해 작게는 2만원에서 많게는 수백만원을 하루 이틀 단위로 뜯어냈다. 그런 방식으로 김씨가 500여 차례 걸쳐 챙긴 돈은 총 9400만원에 달했다. 서울 지역의 한 부장검사는 "일단 피해자가 한번 돈을 넣기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다. 피해자 입장에서는 이미 투자해둔 돈 생각도 나고, 조금만 더 투자하면 큰 돈이 들어온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확인된 적 없는 비자금 유언비어=사기 '떡밥'으로 통용되는 역대 대통령들의 비자금의 실체는 지금까지 한 번도 실체가 확인된 바 없다. 수사기관이나 법원에서도 사기꾼들이 언급한 비자금이 실제 존재하는지를 판단하지는 않는다. 법원은 '피고인들은 대통령의 비자금과 아무런 관련이 없고, 돈을 받더라도 돌려줄 의사나 능력이 없다'고 간략하게 정리하고 있을 뿐이다. 법조계 관계자는 "이미 사기꾼들의 말 자체가 거짓말인데, 비자금이 실제 존재하는지를 판단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통령 비자금에 대한 유언비어는 지속적으로 생산되고 있다. 최근에는 '문재인 금괴설'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상에서 나돌았다. 문 의원과 노무현 전 대통령이 금괴 1000t을 빼돌렸다는 황당한 내용이다. 빼돌렸다는 금의 양은 일본이 공식적으로 보유한 금 765t보다 많은 양이다. 문 의원은 이 같은 허위사실을 유포한 네티즌 7명을 서울남부지검에 고소했다. 이 교수는 비자금 관련 유언비어가 끊이지 않는 이유에 대해 "권력층의 비리가 종종 드러날 때마다 일반 국민들은 권력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음성적인 돈거래' 등에 대해 상상한다"고 말했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사건과 '박연차 게이트' 등 각종 비리사건이 대표적인 소재다.

◇일확천금 노리는 피해자들의 한탕주의가 범죄 자양분=범죄 전문가들은 흔히 사기범죄를 '가해자와 피해자의 합작품'이라고 얘기한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청와대가 우리나라 권력의 최중심이다 보니 피해자들 입장에서는 청와대를 통하면 뭔가를 얻어낼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나 착각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결국 사기꾼들은 피해자들의 '기대심리'를 노리고 범행을 저지르게 된다는 것이다.

사회 구조적 문제를 지적하는 분석도 나왔다. 이 교수는 "매일같이 언론을 장식하는 온갖 권력층의 비리들을 보면 국민들이 권력에 대한 허황된 상상을 가질 수밖에 없다"며 "매번 똑같은 방식으로 권력 사칭 사기범죄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이유"라고 지적했다. 실제 대통령 사칭 사기를 저지른 이들 대부분이 재범이다. 사기꾼들의 입장에서는 잠재적 피해자가 여전히 많고, 속이기 쉽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재범 유혹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범죄 전문가들은 피해자들이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주문했다. 곽 교수는 "우선 사기꾼들이 청와대나 대통령을 언급하며 다가올 경우 서류를 직접 보여 달라고 하거나 일하고 있는 곳을 직접 찾아가는 등 해당 인물의 신분을 직접 확인해 봐야 한다"고 말했다.

정현수 기자 jukebox@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뉴스 미란다 원칙] 취재원과 독자에게는 국민일보에 자유로이 접근할 권리와 반론·정정·추후 보도를 청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고충처리인(gochung@kmib.co.kr)/전화:02-781-9711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