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푸르나 참사' 증언 "눈 덮인 주검들 넘어 하산.. 공포 잊지 못해"

구정은 기자 입력 2014. 10. 20. 22:55 수정 2014. 10. 20. 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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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여성 마야(21)는 지난 14일 네팔 북부 트레킹을 시작했다. 가벼운 등산복 차림으로 나선 마야와 친구들은 안나푸르나의 절경을 배경 삼아 사진을 찍었다. 모두 마야처럼 큰 두려움 없이 산행길에 오른 20대 젊은이들이었다. 그러나 일순 눈보라가 몰아쳤고, 마야의 카메라에 남아 있는 친구들 중 몇몇은 눈 속에 쓰러졌다.

마야는 5시간을 걸어서 대피용 오두막을 찾아냈다. 거기서 스무 시간을 버티다 15일 아침 다시 길을 나섰다. 어깨 높이로 쌓인 눈 사이를 헤집으며 내려오다가 구조돼 목숨을 건졌다. 카트만두의 병원으로 이송된 마야는 19일 영국 가디언에 당시의 두려움을 털어놨다. "눈 덮인 주검들, 흩어진 배낭들 위를 넘어 발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의 공포를 잊지 못할 것 같다."

▲ 친구들과 트레킹 나선 여성"눈보라가 순식간에 몰아쳐 몇몇 친구들을 집어삼켰다"

▲ 등산객 500여명 구조했지만 최소 38명 사망… 최악 재난현지 짐꾼, 20명 구하고 숨져

높이 8091m, 세계에서 10번째로 높은 산 안나푸르나는 트레킹 코스로 유명하다. '안나푸르나 서킷'이라 불리는 이 산길은 곳곳의 산장에서 파는 애플파이 때문에 '애플파이 루트'라는 별명도 갖고 있다. 이 길은 전문 산악인이 아닌 일반인들도 도전할 수 있는 '가장 쉬운 트레킹 코스'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4~16일 사흘 동안 이 지역 곳곳을 강타한 눈보라는 애플파이 루트를 순식간에 죽음의 산길로 만들었다.

이번 눈보라로 이스라엘, 캐나다, 인도, 일본, 폴란드, 슬로바키아 등지에서 온 등산객과 현지 가이드 등 최소 38명이 숨졌다고 AP통신이 보도했다. 1977년 이 길이 관광객들에게 개방된 이래 최악의 재난이다. 당국은 생존자를 더 찾기 힘들다고 보고 20일 대규모 구조작업을 중단했다. 그러나 아직 연락이 끊긴 등산객들이 남아 있어, 사망자 수는 더 늘어날 수도 있다. 네팔 산악협회는 "20일까지 502명이 구출됐다"고 밝혔다.

원래 야크 목동들이 다니던 이 길은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포카라에서 시작해 안나푸르나를 가운데 두고 남쪽으로 한 바퀴를 돌아 다시 북쪽의 베시 사하르로 이어진다. 241㎞의 코스 중 최고점인 쏘롱라 패스는 해발고도 5416m에 이른다. 날씨가 청명한 10월은 등산객들이 몰리는 성수기다. 하지만 이번에는 사이클론 '후드후드'가 인도 북부를 지나가면서 눈보라가 들이닥쳤다. 쏘롱라 부근까지 갔던 이들은 꼼짝없이 고립돼 숨졌다.

이번 눈보라에는 현지인들도 속수무책이었다. 야크를 치던 목동 3명도 숨졌다. 구조된 영국 관광객 톰 셰리던은 산길을 헤매다 10대 네팔 소년을 만났다. "아이의 뺨에 얼음조각들이 달라붙기 시작했다. 소년은 두려움에 눈물을 흘렸고, 나도 함께 울었다. 그 소년이 살았을지 죽었을지는 알 수 없다." 네팔리타임스는 등산객들을 구하고 숨진 파상 타망(46)이라는 안내원의 이야기를 전했다. 짐꾼으로 일하던 타망은 눈보라 속에서 길 잃은 등산객 20여명을 구해줬지만 그 자신은 가파른 산길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숨진 타망의 주머니에는 안내 보수로 받은 2만2500루피(약 24만원)와 100달러 지폐 한 장이 들어 있었다.

현지 기상분석가 응가민드라 다할은 네팔리타임스에 "사이클론이 지나갈 무렵에는 눈보라가 종종 발생한다. 문제는 관광객들에게 왜 경고를 해주지 않았느냐 하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수실 코이랄라 네팔 총리는 17일 "기상 경보를 강화하겠다"고 발표했다. 당국은 산길을 임시 폐쇄했으나 현지 상점과 여행사들은 관광산업이 위축된다며 반발하고 있다.

<구정은 기자 ttalgi21@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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