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가 빼앗아 간 '낭만'의 빈 자리, '족구왕'이 있다

2014. 10. 11. 10:37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 이학후 기자]

영화 <족구왕>의 포스터

ⓒ 광화문시네마, KT&G 상상마당

1997년 IMF 경제 위기는 대한민국을 송두리째 변화시켰다. '안정적인 고용'은 과거형으로 바뀌었고, 성공을 최고의 가치로 숭배하며 물신주의를 판치게 하였다. 사회의 변화상은 대학생 등 20대 청춘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대학교는 더는 학문을 탐구하는 상아탑이 아니라 취업을 위한 대형 독서실로 전락했다. 캠퍼스의 낭만이 사라진 자리는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정글의 법칙이 대신했다.

IMF 경제 위기를 관통하거나, 영향을 받은 청춘 영화는 무엇이 있을까? 1996년 청춘의 불안정한 좌표를 포착한 '이전' 영화 <세 친구>는 존재하나, IMF 이후를 다룬 '다음' 영화는 선뜻 떠오르질 않는다. 그 시기 샐러리맨을 다룬 <반칙왕>이 있었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 대한민국 사회에 큰 트라우마를 안겨주었던 사건을 온몸으로 맞이했던 그 시절 10대~20대가 나오는 영화는 찾아보기 어렵다.

세기말부터 2000년대에 만들어진 한국 영화에서 청춘이 새겨진 작품을 되짚어 보자. 먼저 <여고괴담>에서 이어진 공포 영화가 있다. <친구>와 <두사부일체>에게 영향을 받은 <폭력서클>과 <뚝방전설> 같은 학원 폭력 영화도 쏟아졌다. 과거를 그리워하는 향수가 느껴지는 <해적, 디스코 왕 되다>와 <품행제로>도 존재했다. 그러나 이들에게서 IMF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 IMF의 상처가 생생한 <1999, 면회>가 도착한다. 아버지의 회사가 부도나는 바람에 군대에 자원입대한 친구를 면회하러 가는 두 친구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1999, 면회>는 한국 영화가 잃어버린, 어쩌면 외면하는 시간대를 복원하는 의미 있는 시도였다.

만화의 상상력 빌린 '족구왕', 평범하지 않은 스포츠 영화가 되다

영화 <족구왕>의 한 장면

ⓒ 광화문시네마, KT&G 상상마당

<족구왕>은 <1999, 면회>를 연출했던 김태곤 감독이 각본과 제작을 맡고, 미술을 담당했던 우문기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영화는 군대에서 후임들과 즐겁게 족구를 즐기던 홍만섭(안재홍 분)이 제대하는 모습을 포착하며 시작한다. <족구왕>은 마치 <1999, 면회>의 다음 시간대를 다루는 느낌이 든다.

복학생 만섭이 창호(강봉성 분)와 미래(황미영 분) 등과 대학 체육대회 족구 시합에 나가는 과정을 다룬 <족구왕>은 보통의 스포츠 영화와 크게 다를 바 없다. 주류에게 외면받던 아웃사이더 또는 실패자로 낙인 찍힌 루저가 어떤 스포츠를 통해 자신들의 가치를 인정받는다는 전개는 <돌려차기>나 <으랏차차 스모부> 등을 통해 익숙하다.

<족구왕>은 스포츠 영화의 설정에 <피구왕 통키>나 <축구왕 슛돌이> 같은 만화에서 만날 수 있던 과장된 상상력을 과감하게 빌린다. 불꽃 슛을 연상케 하는 만섭의 킥이 대표적인 장면이다.

인터넷상에서 좌절을 가리키는 표현인 OTL(O는 머리, T는 팔과 몸, L은 다리를 형상화한 것으로, 머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은 사람의 모습을 나타낸다-기자 주)을 인물로 보여주는 장면도 웃음을 자아낸다. 시합 중 다친 만섭이 "나 여기서 포기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라고 말하는 대목에선 <슬램덩크>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족구왕>은 '복학생'이란 만섭의 신분과 그가 좋아하는 '족구'라는 스포츠로 보통의 스포츠 영화와 다른, 한국 사람들이 가장 공감할 수 있는 특별한 이야기로 탈바꿈했다.

제대 후 복학한 만섭이 캠퍼스에서 마주하는 것은 차가운 현실의 공기다. 기숙사에서 만섭과 같은 방을 쓰는 선배는 어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라고 충고한다. 학자금을 대출받은 만섭은 수시로 독촉전화를 하는 은행에 시달리고, 돈을 갚기 위해 여러 아르바이트를 한다. 오로지 취업과 고시 합격에 목매고, 학자금 대출 상환에 전전긍긍하는 대학가의 모습은 IMF 경제 위기가 낳은 산물이다.

등록금과 취업률에 신경 쓰는 분위기를 역행하며 족구장을 만들어달라고 학장에게 건의하는 만섭은 주위 사람들로부터 별종 취급을 당한다. 만섭은 따가운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족구가 얼마나 재미있는지 아느냐고 물으면서, 남들이 싫어한다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숨기고 사는 것은 바보 같다고 반문한다. 만섭은 청춘이 상실한 낭만을 나타내며, 족구는 잃어버린 낭만을 회복하려는 유쾌한 반기를 뜻한다.

'토익왕' '고시왕' 대신, '족구왕'이 마음껏 날아 오르는 세상을 위하여

영화 <족구왕>의 한 장면

ⓒ 광화문시네마, KT&G 상상마당

근래 10대와 20대의 솔직한 얼굴을 보여주는 한국 영화가 다수 등장한 점은 반가운 현상이다. <경복>과 <반달곰>엔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는 청춘의 방황이 오롯이 담겨 있고, <잉투기>엔 분출할 곳을 찾지 못하는 청춘의 에너지가 팽배하다. 편의점이란 공간을 통하여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그린 <이것이 우리의 끝이다>에서도 청춘의 일상을 만날 수 있다.

<에바로드>와 <잉여들의 히치하이킹>엔 또 다른 청춘이 등장한다. <에바로드>는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좋아하는 청춘이 제작사가 지정한 4개국을 돌면서 특정일, 특정 장소에서 도장을 받는 이벤트에 도전하는 과정을 담았다. <잉여들의 히치하이킹>은 무일푼으로 1년 동안 유럽을 여행하는 청춘의 여정이다. <에바로드>와 <잉여들의 히치하이킹>에서 '왜 이걸 하느냐'고 질문하는 많은 이들에게 주인공들은 한결같이 "그냥 좋아서"라고 답한다.

<족구왕>에서 만섭도 "너에게 족구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는다. 족구를 해서 얻을 이익이 무엇인지 묻는 사람들은 족구를 명예나 돈과 같은 시선에 놓는다. 그러나 만섭은 "재밌잖아요"라고 답한다. 이겨도 얻을 건 없다. 져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자신의 행동에 굳이 의미를 부여하려 하지 않는다. 청춘은 그런 것이다.

청춘에 위로를 건네는 멘토가 난무하는 세상이다. 그들은 "꿈꾸는 방법을 모르면 꿈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독설을 쏟아내고, "아프니까 청춘이다" 같은 힐링을 내뱉으며 모든 책임을 청춘에 전가한다.

진정한 멘토라면 청춘이 눈물을 흘리면 손수건을 팔 생각을 하지 말고, 그들이 울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고민과 해법 제시에 몰두해야 마땅하다. 족구왕을 만나기 위해선 족구장이 필요하고, 그런 무대를 만들어 주는 것은 온전히 기성세대의 몫이다. 토익왕이나 고시왕이 아닌, 족구왕이 마음껏 날아오르는 세상을 위하여!

*<족구왕>은 <1999, 면회>의 엔딩 크레딧이 끝난 후에 티져 예고편으로 예고된 바 있다. 이번에도 엔딩 크레딧이 전부 올라간 뒤 제작사인 광화문시네마의 세 번째 영화인 <범죄의 여왕>의 티져 예고편이 나온다. 수도 요금 120만 원의 비밀은 무엇일까? 그들이 세 번째 작품이 기다려진다.

스마트하게 오마이뉴스를 이용하는 방법!☞ 오마이뉴스 공식 SNS [ 페이스북] [ 트위터]☞ 오마이뉴스 모바일 앱 [ 아이폰] [ 안드로이드]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