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평화일본' 꿈꾸다 떠난 리얼리스트

입력 2014. 10. 7. 19:30 수정 2014. 10. 7.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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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일 국제정치학자 사카모토 별세

'실현가능한 평화주의' 정착 헌신

군비억제·위안부 문제 사죄 주장

'집단적 자위권 반대'가 마지막 활동

일본 국제정치학의 개척자이자 '실현 가능한 평화주의' 정착에 평생을 바친 사카모토 요시카즈(사진) 도쿄대 명예교수가 지난 2일 도쿄의 한 병원에서 심부전으로 숨졌다고 일본 언론들이 7일 일제히 보도했다. 향년 87.

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일본의 평화주의 정착에 공헌한 사카모토는 1927년 9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학자인 아버지 사카모토 요시타카의 셋째로 태어나 유년시절을 중국 상하이에서 보냈다. 48년 도쿄대 법학과에 입학해 정치학의 거두인 마루야마 마사오의 제자가 됐다. 55년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의 '대부'인 한스 모건소에게 배웠다.

그는 59년 '일본 진보진영의 성채'인 이와나미서점이 발행하는 월간지 <세카이>에 '중립일본의 방위구상'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면서 일본 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 논문에서 사카모토는 일본의 안보를 확보하기 위한 방법으로 "중립국의 군대로 구성된 유엔 경찰군이 일본에 주둔하고 자위대도 이 경찰군으로 이행시키는 것"을 제창했다. 도쿄대 교수 시절인 66년 중국과의 국교 정상화를 주장한 '일본 외교에 대한 제언'으로 '제1회 요시노 사쿠조 상'을 받았다. <아사히신문>은 그에 대해 "학문적 성과를 세상에 제언하는 방식으로 전후 일본의 평화사상 정착에 공헌했다"고 평가했다.

그의 사상의 원형질이 된 것은 어린 시절 경험한 태평양전쟁 패전의 쓰라린 경험이었다. 국가에 의해 버려진 국민이란 뜻의 '기민'(棄民)의 존재를 깨닫게 된 것이다. 아사히신문은 "이것이 사카모토가 평화주의와 민주주의를 희구하는 원점이 됐다"고 평가했다. <도쿄신문>은 "(고인은) 전쟁 말기 일본 본토에서 버려진 뒤 지금까지 미군기지 주둔의 부담을 지고 고통받고 있는 오키나와에 대한 시선을 평생 잊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사카모토는 평화를 추구했지만 '이상주의자'로 불리는 것은 반기지 않았다. 국제정치는 힘의 세계라는 것을 인식하면서 평화 연구의 길을 걸어왔다고 자부했다. 그런 의미에서 사카모토는 '이상'인 일본의 평화헌법과 '현실'인 미-일 안보조약 사이의 모순을 메우기 위해 추진할 수 있는 구체적인 군축이나 긴장 완화의 방법을 고민했다. 이런 사고의 연장선에서 일본의 방위비를 국민총생산(GNP)의 1% 이내로 억제할 것을 주장했으며 일본이 평화헌법 9조의 틀을 넘어 유엔의 평화유지활동(PKO)에 적극 기여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고인은 일본의 전후 보상 문제와 북-일 국교 정상화 등의 문제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발언했다. 특히 2002년 9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납치 문제를 인정한 뒤 북한에 끌려간 요코타 메구미의 부모가 외무성에 '납치 문제가 해결되기 전엔 북한에 식량 지원을 하면 안 된다'고 건의하자, 사카모토는 "자기 자식이 걱정된다면 식량이 부족한 북한 어린이들의 어려움도 생각해 원조를 보내는 게 당연하다. 그게 인도적이다"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 때문에 일본 우익들로부터 적잖은 괴롭힘도 당했다. 96년 하시모토 류타로 당시 총리에게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정식 사죄·보상을 요구했고, 2001년엔 일본 우익이 결집해 만든 '새 역사를 만드는 모임'의 교과서를 검정에서 불합격시킬 것을 정부에 요구하는 성명 발표를 주도했다.

만년의 그를 고통스럽게 한 것은 다시 한번 '기민'이었다. 첫번째 기민이 일본은 절대로 지지 않는다는 '신국불멸 신화'로 인해 전쟁에 휘말려 희생된 이들이었다면, 두번째 기민은 2011년 3월11일 '원전 안전 신화'가 무너지며 버림받은 후쿠시마 사람들이었다. 그는 2011년 12월 미-일 개전 70돌을 맞아 자택을 방문한 도쿄신문 기자에게 "전쟁과 원전 사고의 기억을 전하는 것도 좋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것이 가능한 사회를 당신들은 어떻게 구상하고 그것을 어떻게 현실적인 것으로 만들 것인가"라고 물었다.

사카모토의 마지막 활동은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하려는 아베 정권의 '해석 개헌'에 반대하는 학자들의 단체인 '입헌 데모크라시의 모임'에 발기인으로 참가한 것이었다. 오카모토 아쓰시 이와나미서점 사장은 <마이니치신문>과 한 인터뷰에서 "(고인은) 냉철한 국제정치의 세계를 바라보는 리얼리스트이면서, 동시에 인간성과 시민 감각을 중시하는 인권파였다. 냉전시대 소련이나 북한에도 '서구 국가들에서처럼 가족을 사랑하는 시민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고 했다.

고인은 2009년 9월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가 이끄는 민주당 정권의 등장에 맞춰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그는 당시 위안부 문제에 대해 "할머니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뭔가 우리가 더 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도쿄/길윤형 특파원 charisma@hani.co.kr,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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