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청 앞에 농성장 차린 하청노동자들 "진짜 사장 나와라"

2014. 10. 2.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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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심층 리포트] 브레이크 없는 나쁜 일자리, 간접고용

③ 진짜 사장 나와라

노숙 80일째를 맞은 노동자들은 늦여름의 뜨거운 태양에 힘겨워 했다. 지난달 19일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흥국생명 건물 정문 앞. 강렬한 햇빛이 농성장을 덮치자 노동자들은 그늘이 드리운 설치예술품 '해머링맨' 옆으로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그들은 '일하는 사람'을 상징한다는 22m 높이 해머링맨 발에 등을 기댔다. 노동자들의 몸엔 "노동인권 개선하자"라고 적힌 조그만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이날 희망연대노조 케이블방송 비정규직 티브로드지부 조합원 대부분은 박근혜 대통령한테 "간접고용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요구하려 청와대가 보이는 인왕산으로 떠났다. 나머지가 농성장을 지켰다. 김진태(46)씨도 그 중 한 명이다.

김씨는 티브로드 케이블 방송 설치·수리·판매 기사지만 티브로드를 운영하는 태광그룹 계열사 티브로드홀딩스 직원은 아니다. 티브로드홀딩스와 도급계약을 맺은 협력업체 비에스(BS)정보통신 소속 간접고용 노동자다. 그는 티브로드지부와 티브로드 협력사협의회의 임금·단체 협약 교섭이 결렬되고 뒤이어 협력업체의 폐업과 직장폐쇄가 이어지자 7월1일부터 원청 앞에 자리를 깔았다. 김씨가 자신이 소속된 회사가 아닌 티브로드홀딩스가 있는 흥국생명 건물 앞에서 농성을 벌이는 이유는 '진짜 사장'인 원청이 나서야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해서다.

티브로드 협력업체 노조원들원청이 단체협상 거부하자 농성협력사는 "원청 없인 교섭 불가"원청은 "우리 직원 아니다" 거부그사이 대체인력 투입…파업 무력화지난해엔 국회 중재로 교섭 타결임금 인상·시간외 노동 줄이기도노조 "원청이 교육·포상 해왔는데…"민변 "임금교섭 원청이 책임져야"

"지난해 노조 만들고 원청에 교섭을 요청했을 때도 '우리 직원이 아니다'라며 거부했어요. 교섭에 나온 협력사는 '원청이 움직이지 않으면 힘들다'는 말만 반복했고요. 국회까지 팔 걷고 나서자 원청은 그제서야 교섭에 참여했죠. 노조와 원청, 협력사가 3일간 집중 교섭을 벌여 월 평균 임금을 45만원 올리고 시간외 노동은 월 35시간을 줄였죠. 하지만 올해 원청은 끝내 교섭에 나오지 않았어요." 지난해 임·단협 교섭위원이었던 김씨는 올해 파업과 농성이 장기화되는 이유를 원청의 불참에서 찾았다. 티브로드홀딩스 관계자는 "지난해 교섭은 협력사 대표와 노조가 한 것이고 우리는 참관만 했다"며 "노사 협의는 기본적으로 협력사와 노조의 일"이라고 선을 그었다.

원청이 협력업체와 도급 계약을 맺고 그 협력업체에 고용된 노동자가 원청의 일을 하는 간접고용 구조에서 원청은 사용자로서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다. 법률상 원청과 하청업체 노동자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탓이다. 그러나 현실에선 하청업체가 아닌 원청이 간접고용 노동자의 업무와 근로 조건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 노동계는 실질적 권한이 있는 원청한테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상 사용자' 책임을 지도록 해 단체협상에 나서도록 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김씨는 "협력업체는 원청이 주는 도급비를 받아 운영되기 때문에 원청이 돈을 더 주지 않으면 임금을 인상하기 어려워요. 지난해 교섭 때도 원청 교섭위원이 '1인당 상생지원금 월 45만원을 책임지고 주겠다'고 결단해 임금이 인상된 거였어요. 원청의 태도가 결정적이죠"라고 말했다.

100일에 가까운 노숙농성에도 협력업체와 의견 차이가 줄어들지 않자, 티브로드지부는 '원청이 교섭에 응하라'는 판결을 법원에 구할 예정이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류하경 변호사는 "실질적으로 임금을 결정할 권한이 없는 협력업체는 원청의 임금 지급 대행업체에 불과하다"며 "임금 교섭은 최소한 원청이 책임져야 한다"고 짚었다.

티브로드홀딩스는 법적 의무가 없다며 임·단협 교섭 참여를 거부하더니 하청 노동자들이 파업에 나서자 대체인력을 투입했다. 파업은 노동자가 사용자에 맞설 마지막 수단이다. 대체인력이 파업 노동자의 일을 대신 하면 파업은 하나마나다. 노조법이 파업 중 사용자의 대체인력 투입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는 이유다. 하지만 노조법도 간접고용 체계에서는 원청이 하청업체 노동자의 파업을 이유로 다른 도급업체에 일을 맡겨도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본다.

숙련도가 떨어지는 대체인력이 투입되면 고객 불만이 쏟아진다. 8월19일 전북에선 대체인력으로 일하던 노동자가 전봇대에서 추락해 숨지는 비극이 발생하기도 했다. 김씨는 답답한 심경을 털어놨다. "우리는 월급도 받지 못한 채 힘들게 파업하고 있는데 제 일자리에 대체인력이 들어오면 속상하죠. 지난해에도 미숙련 대체인력이 일을 엉망으로 처리해 파업 끝나고 뒷수습하느라 엄청 고생했어요."

협력업체와 원청의 핑퐁게임을 2년간 지켜본 김씨는 원청의 정규직이 되는 게 근본적인 해결 방법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의 가장 큰 바람은 고용안정과 임금·근무시간 개선이다. 이는 협력업체를 상대로는 결코 얻어낼 수 없는 것들이다. 그가 일하던 지역 케이블 방송 업체가 티브로드로 합병된 이후 10년이 지났다. 그새 업체가 1~2년 간격으로 바뀌고 그의 지위는 개인사업자와 근로계약을 맺는 노동자 사이를 수차례 넘나들었지만 그의 업무와 원청만은 그대로였다. 그한테 협력업체는 유령과 다름없다. 반면 그에게 직접 업무 지시를 해서는 안 되는 원청은 수시로 연장 근로와 실적을 요구했다.

"원청 관리직원이 협력업체에 두 명씩 상주하며 직접 기사를 불러 실적을 관리하고, 실적이 나쁘면 퇴근하지 말고 더 일하라고 지시했어요. 영업 실적이 나쁘면 직접 시말서를 받았고 일 잘하면 직접 표창도 주고 국외여행도 보내줬고요. 1년에 몇 번씩 전국 기사들을 모아 원청 교육장에서 교육도 했죠. 그래서 저는 한참을 원청 티브로드 노동자인 줄 알았어요."

원청의 업무 지시는 지난해 3월 노조가 설립돼 원청의 사용자성을 주장하자 사라졌다. 이제 김씨와 동료 조합원들은 삼성전자서비스·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그랬듯이 원청을 상대로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을 준비 중이다. "진짜사장 태광그룹이 책임져라." 매일 오후 농성장에서 열리는 집회에 참여한 김씨 옆으로 노조가 단 펼침막이 바람에 흔들렸다.

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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