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금메달을 따야 국위 선양인가?

양성모 2014. 9. 30. 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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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는 과학적인 방법에 따라 진행돼야 합니다. 예를 들면 조사 대상이 무작위로 추출돼야 하고, 질문도 객관적이고 공정해야 하겠죠. 이런 기준을 따졌을 때, 취재진이 진행한 설문조사는 우스꽝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취재진은 논산 훈련소를 찾아 입대를 앞둔 남자들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금메달 따면 군 면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스포츠 선수들에 대한 병역 혜택을 반대하는 답변이 압도적일 거라 예상했습니다. 병역 의무의 공정성에 대해 이 때 만큼 적극적으로 생각할 사람들도 없겠거니 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예상과 조금 달랐습니다. 찬반은 팽팽히 맞섰습니다.

■ 입대 앞둔 남자들도 찬반 '팽팽'

논쟁적인 사안일 뿐 아니라 정답도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찬반 논리만 설명하겠습니다. 류태호 고려대학교 체육교육과 교수는 조건부 찬성 입장을 밝혔습니다. 현행 엘리트 체육인 양성의 구조 속에선 병역 혜택이 유지돼야 한다는 겁니다.

이유는 이렇습니다. 국가가 국위선양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운동선수를 뽑아 선수촌에 모아놓고 출입을 통제하고 훈련시키는 것은 일반 남성들이 병역 의무를 이행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겁니다.

☞ 바로가기 [취재파일K] 금메달과 군대

여기에 두 가지 질문이 따릅니다. 우선 일반 남성들의 병역 의무와 선수들의 훈련-경기 출전을 동일 선상에 놓고 얘기하는 것이 가능하냐는 겁니다. 본질적으로 입대와 선수촌 입촌은 다릅니다. 하지만 국가가 특정 목적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박탈하고 집단생활을 시킨다는 점에서 다를 것이 없다는 게 류 교수의 설명입니다. 실제로 4주간의 기초 군사훈련만 받고 법원이나 학교에서 근무하는 공익근무요원이 있습니다. 꼭 입대가 아니더라도 국가의 요구 또는 필요에 따라 다양한 분야에서 일 함으로써 병역의 의무를 이행하는 걸 이미 사회가 인정하고 있다는 겁니다.

두 번째 질문은 과연 국가대표로 발탁돼 선수촌에 들어가는 게 병역 의무에 맞먹는 희생이냐는 겁니다. 류 교수는 우리나라처럼 올림픽 등 국제 대회를 앞두고 1년 가까이 합숙훈련을 시키는 경우를 찾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선수 개인의 사정이나 형편을 들여다보면 분명 국가에 대한 희생이며, 자유를 박탈당한다는 면에서 병영 생활과 다르지 않다는 거죠.

결국 국가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국민을 동원하는 점에 있어서 입대와 선수촌 입촌은 같기 때문에, 게다가 동원의 목적인 국위선양을 이뤄냈다면 당연히 병역 혜택을 줘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선수 개인의 노력에 대한 보상이나 '국위선양'에 대한 포상이라는 생각은 폭넓게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선수들에게 강력한 동기부여가 된다는 점이야 반론의 여지가 없겠죠.

■ '국가대표의 합숙훈련은 사실상 병영 생활'

반대 의견은 이렇습니다. 우선 '국위선양'이라는 불분명한 성과를 가지고 온 국민이 져야하는 의무를 면제해주는 게 온당하냐는 지적입니다. 가장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스포츠 선수들이나 예술인들에게 병역 특례를 주기 시작한 건 1973년입니다. 70년대엔 국민 모두가 세계 정상에 오른 우리 선수들을 보면서 용기를 얻었습니다. '세계 1위'라는 타이틀이 그토록 간절했던 시절이죠. 그 시절 스포츠는 우리나라의 명예가 걸린 중대사였습니다. 이런 시대에 시작된 병역 특례제도가 지금도 유효하냐는 겁니다.

논란이 단체 종목, 그리고 프로 선수들에 집중된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합니다. 최동호 스포츠평론가는 프로 선수들의 목표는 국위선양이 아닌 자신의 연봉 상승이나 해외진출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선수들에게 이중적인 혜택을 줄 필요가 있느냐는 거죠. 국가대표로 선발돼 금메달을 따낸 뒤 수억 원의 연봉을 받으며 영리활동을 이어가거나 해외로 진출하는 선수들에게 병역 혜택까지 준다면 국민들이나 다른 종목 선수들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단체 종목의 특성상 집단적 혜택을 받게 되고, 이에 따른 무임승차가 이뤄질 수도 있습니다. 종목별 특성을 감안하지 못한 지금의 제도에 문제점이 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 프로 선수들에게 혜택 집중...상대적 박탈감 크다

이보다 더 다양한 찬성, 또는 반대 논리가 있겠지만, 위에 제시한 찬반 논리는 상당부분 '국위선양'이란 개념에 기대어 있습니다. 병역법 2조를 보면 병역 혜택을 받는 '예술·체육요원'을 '문화창달과 국위선양을 위한 예술·체육 분야의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으로 정의합니다. 그런데 취재 중 만난 전문가들은 찬반을 떠나 하나같이 이 '국위선양'의 부작용을 지적했습니다.

스포츠는 만국 공통언어입니다. 누군가의 가슴을 뛰게 하고, 열광하게 하며, 즐거움을 느끼게 합니다. 승부의 짜릿함이 가져다주는 쾌감입니다. 쉽게 말해 스포츠는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선수들에게도 마찬가지겠죠.

하지만 스포츠의 목적이 국위선양이 된 사회는 어떨까요? 국가대표가 된 선수들은 '국위선양'이란 중대한 의무를 짊어지고 세계무대에 섭니다. 국민들의 기대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그러니까 금메달을 따지 못하면, 순식간에 '국위선양'에 실패한 선수가 됩니다. 은메달을 따고도 울먹이며 죄송하다는 말을 하는 이유가 여기 있죠.

국위선양이 국가 체육 정책의 목표가 되면 그 부작용은 더 커집니다. 국제 대회에서 금메달을 따내려면 소수 엘리트 선수를 선발해 집중적인 훈련을 시켜야 합니다.

정용철 서강대 체육교육과 교수는 우리나라의 어린 선수들이 이런 훈련을 받으며 '운동하는 기계'로 키워지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정상적인 학교생활에서는 멀어지고 또래들이 그맘때 경험하는 모든 일상으로부터도 격리된다는 겁니다. 이런 선수 양성 시스템의 문제는 이미 수차례 언론에 소개됐습니다. '공부하는 선수, 운동하는 학생'을 강조하는 류태형 교수의 말입니다.

"운동 이외의 다른 삶에 관련된 지식, 또는 공부, 이런 것에 대해서는 결국 배제되는 상황이 초래되거든요. 국위선양이라는 명목으로 순간의 국민적인 기쁨을 주는 것도 역시 중요하지만 그 기쁨만으로 그 선수들은 살 수 없어요."

■ '국위선양' 뒤에 가려진 것들

우리나라에 징병제가 유지되는 한 이 문제는 해결되기 어려워 보입니다. 프로 선수들이 모조리 군대에 가야 했다면 박지성 선수나 류현진 선수도 지금과 같은 성공에서는 멀어졌을 겁니다. 신성한 국방의 의무가 차별적으로 주어지는 상황은 끝없는 불만을 야기할 수도 있을 거고요.

하지만 취재를 하면서 논란의 이면에 국위선양이라는 명목 아래 엘리트 선수 양성에만 주력해온 국내 체육계의 병폐가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해법을 찾으려면 문제의 원인에서 출발해야 할 것입니다.

왜 하필 아시안게임이 한창 진행되는 지금 이런 기사를 썼냐는 시청자의 항의가 있었습니다. 모두가 즐기는 축제에 찬물을 끼얹었다면 죄송합니다.

☞ 바로가기 [취재파일K] 금메달과 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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