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패밀리데이, 더 피곤하데이.. 수요일 정시퇴근, 오늘은 될까?
서울의 한 구청 직원 A씨(여)는 초등학생 자녀를 둔 '워킹맘'이다. 남편도 회사원이라 평일엔 가족끼리 외식 한번 하기 어렵다. 4년 전 이 구청이 여성가족부로부터 '가족친화인증'을 받으며 상황은 달라지는 듯했다. 2주마다 하루를 '패밀리데이(가족사랑의 날)'로 정해 '정시 퇴근'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아예 이 날은 구청 차원에서 시간외 근무 수당을 지급하지 않기로 했다.
가족과 함께 저녁을 보낼 기대에 부풀었던 A씨는 곧 실망했다. 처음 몇 번은 일찍 퇴근했는데 일도 많고 눈치도 보여 이내 예전 일상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여전히 패밀리데이에는 추가 근무 수당을 받지 못한다. A씨는 "밀린 업무가 많아 직원 대부분이 야근을 밥 먹듯 하는데 그만큼 수당도 받지 못해 불만이 쌓여가는 중"이라고 말했다.
◇"패밀리데이가 뭐죠?"=정부는 2008년부터 기업과 공공기관을 상대로 가족친화인증 제도를 시작했다. 저출산·고령화가 가속화되고 여성의 경제활동이 늘어나고 있어 근로자가 가정과 직장 생활을 원만히 병행할 수 있도록 돕자는 취지였다. 그 인증 기준 중 하나가 최소 2주에 1번(주로 수요일)은 정시(오후 6시) 퇴근해 '저녁이 있는 삶'을 보내게 하는 패밀리데이 시행이다.
현재 대기업 144곳, 중견·중소기업 183곳, 공공기관 195곳 등 522개 기업·기관이 가족친화인증을 받았고, 이 중 189곳이 패밀리데이를 시행하고 있다. 하지만 일단 인증을 받고 나면 제대로 시행되지 않는, 현실이 제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허점이 드러나고 있다.
수요일인 지난 17일 오후 8시쯤 서울 강북의 한 공공기관 사무실은 층마다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매주 수요일을 패밀리데이로 지키는 가족친화 기관이지만 방마다 야근 중인 직원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한 직원에게 "패밀리데이를 알고 있냐"고 묻자 "모른다"는 답이 돌아왔다. 다른 직원은 "패밀리데이를 운영하고 있는 건 아는데 말처럼 쉽지 않다"며 "지난해 말에는 인사팀에서 퇴근시간에 맞춰 사무실을 돌면서 빨리 집에 가라고 독려했지만 어느새 흐지부지됐다"고 말했다.
◇패밀리데이가 '서러운' 사람들=공무원 B씨는 세종시에서 혼자 산다. 서울에 있는 가족은 주말에만 볼 수 있다. 통근하다 너무 피곤해 아예 세종시에 방을 구했다. 그가 속한 부처도 수요일마다 패밀리데이를 시행 중인데 B씨는 "수요일이 제일 싫다"고 했다. 일찍 퇴근해 아무도 없는 방에 혼자 있기 싫어서다. 일부러 수요일에 술 약속을 잡곤 한다. 세종시의 한 음식점 주인 김모(40)씨는 "수요일이면 유독 회식하러 많이 오는 것 같다. 특이한 현상"이라고 말했다.
여가부는 한국능률협회인증원에 위탁해 가족친화인증 기업·기관을 선정한다. 대기업·중소기업·공공기관별로 15∼18가지 기준이 있다. 패밀리데이 시행 여부는 인증원에서 파견된 전문가 2명이 회사가 정시 퇴근 방침을 알렸는지 정도만 확인하고 일부 직원 인터뷰를 통해 평가하는 식이다.
이렇게 가족친화인증을 받은 기업·기관은 법무부 국방부 등 28개 정부기관에서 92가지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법무부의 경우 가족친화인증 기업·기관의 구성원 중 1명에게 출입국심사 때 간편한 전용심사대를 이용토록 편의를 제공한다. 국방부 산업통상자원부 미래창조과학부 등도 물품 구매 등 각종 심사에서 가산점을 적용하고 있다.
◇"그래도 패밀리데이 있는 회사에…"=패밀리데이에 부정적인 의견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날을 기다리는 사람도 많다. 결국 기업 문화와 분위기가 문제다. 이런 제도의 필요성을 이해하는 곳에선 자연스럽게 정착해 가고 있다.
농림수산식품기술기획평가원에 다니는 E씨(여)는 다섯 살 아들을 키우고 있다. 하루 종일 어린이집에 있는 아들을 데리러 갈 시간이 없어 늘 친정어머니에게 부탁했는데, 패밀리데이가 정착되면서 수요일마다 직접 챙길 수 있게 됐다. 특히 매월 6일은 '육아데이'로 지정돼 오후 4시면 퇴근한다. E씨는 "육아데이에는 남편도 회식을 빠지고 집에 온다"며 "평일이 꼭 주말 같아 정말 좋다"고 말했다.
비록 유명무실해도 패밀리데이를 시행하면 좋겠다는 이들도 있다. 유통분야 대기업 직원 김모(53)씨는 "형식적이라도 패밀리데이를 만들어 놓으면 언젠가는 정착되지 않겠냐"며 "그런 배려가 있는 회사라면 아무래도 근무 환경이 더 좋지 않겠냐"고 말했다.
박세환 기자 foryou@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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