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락함에 굴하느니 '철없는 한량'이고파

2014. 9. 20.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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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서촌갤러리 대표 장영승

▶ 이진순 언론학 박사. 희망제작소 부소장. 살림하고 애 키우는 오십대 아줌마이자 공부하고 글 쓰는 열혈시민이다. 미국 올드도미니언대학 조교수로 인터넷 기반의 시민운동을 강의하다가 사직하고 귀국해 시민운동 현장에 합류했다. 경험과 논리에 갇히지 않고 즐겁게 소통하고 진화하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하며 ‘열린 사람들과의 어울림’(열림)을 격주로 전한다.

 “지금은 우리가 만나서 서로에게 고통뿐일지라도/ 벗이여 어서 오게나 고통만이 아름다운 밤에…”(윤민석 곡, ‘지금은 우리가 만나서’ 중에서)

 까만 하늘엔 보름달 대신 세월호 모양의 하얀 배 풍선이 둥실 떠 있었다. 추석 연휴로 서울 도심이 한가하던 지난 9월9일 밤, 광화문광장에 중년의 사내 셋이 기타를 둘러메고 무대에 섰다. 자식을 잃고 첫 추석을 맞이하는 유가족들을 위해 ‘세월호가족지원네트워크’가 마련한 공연의 넷째 날, 무대에 오른 이들은 서울대 노래패 ‘메아리’의 30년 전 회원들이었다.

 “우리, 총칼에도 굴하지 않고 어떤 안락에도 굴하지 않고/ 오직 서로의 상처에 입 맞추느니…/ 그것이 이 어둠 건너 우리를 부활케 하리라.”

 500여 청중들이 촛불을 들고 나직이 따라 불렀다. 반백이 되어 광화문광장에서 30년 전 운동권 노래를 다시 부르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긴 세월이 지났건만 어둠은 여전히 길고 깊었다. 분위기가 너무 숙연해지는 게 맘에 걸렸는지 노래를 부르던 이 중 하나가 너스레를 떨었다.

 “보통 이 정도 되면 앙코르를 주문하는데 말입니다….”

 덥수룩한 수염, 짧게 자른 반백의 머리, 장영승(51)이었다. 디자이너를 꿈꾸던 단원고 박예슬양의 유작 스케치를 실물로 만들어 전시한 서촌갤러리의 대표. 추석 공연을 기획하고 배 풍선을 띄운 자발적 시민모임 ‘세월호가족지원네트워크’의 산파역. 그는 열흘째 동조단식 중이라고 했다. 이틀 후 서촌갤러리로 그를 만나러 갔다. 2층 갤러리로 오르는 좁은 계단참부터 천장과 유리창까지 방문객들이 붙이고 간 형형색색의 포스트잇으로 빼곡했다. 아직 개장시간이 되지 않아 장영승 대표 혼자 갤러리를 지키고 있었다. 단식 12일째, 얼굴이 까칠했다.

“예슬이 앞세워서 앵벌이 할 일 있냐?”

 -7월4일 전시회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몇 명이나 다녀갔나?

 “한 5만명쯤 되는 것 같다.”

 -일전에 왔을 때도 줄서다시피 하고 봤다. 멀리서도 많이 오시는 것 같더라.

 “전시회 시작하고 처음 두 주는 매일 나 혼자 자리를 지켰다. 갤러리 문 열고 종일 앉아 있다가 갤러리 문 닫고, 그게 예슬이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있으면서 많은 사람을 보았는데, 포천에서 오신 팔십 넘은 할머니도 계셨다. 그냥 티브이로 전시회 소식 듣고는 전철과 버스를 네 번인가 갈아타고 혼자서 찾아오셨다는데 여기 와서 세 시간을 앉아 계셨다. 울다가, 다른 분하고 얘기하다가, 또 울다가…. 며칠 있다가 연락이 왔는데, 다시 오고 싶지만 기력이 안 되니까 전시장에 틀어놓은 예슬이 동영상 좀 보내줄 수 없냐고 하셔서 보내드렸다.”

 전시장 동영상 속에서 예슬이는 하얀 맨발을 개울물에 적시며 물소리가 좋다고 까르르 웃는다. 물소리보다 청량하게 웃던 예슬이의 마지막 동영상은 사고 당일 기울어진 선체 안에서 찍혔다. 울먹이는 친구들을 달래면서 “살 건데 무슨 소리야, 살아서 보자”고 해맑게 웃던 아이. 버스기사로 일하는 예슬이의 아버지는 딸이 크면 전시회를 열어주겠다고 아이의 그림을 한장 한장 소중하게 보관했다. 예슬이가 남자친구와 입고 싶었던 커플룩과 언젠가 살고 싶었던 거실 넓은 집의 설계도까지.

 -많은 이들이 사고 직후 분향소를 찾고 눈물을 흘리면서 “미안하다, 죄스럽다”는 얘기를 많이 했다. 그런데 자책감은 다른 어떤 감정보다 빨리 씻겨 나가는 것 같다. 자책감은 슬며시 사라지고 앙상한 분노만 남아 있다.

 “맞다. 그런데 내 경우엔 미안함과 분노가 서로 떨어져 있는 게 아닌 것 같다. 4~5월엔 분노 조절이 안돼서 엉뚱한 사고도 많이 쳤다. 사소한 일에 화를 내고 사람 자체가 꼴 보기 싫어서 혼자 박혀 있기도 하고. 팽목항에도 두 번을 갔는데 도무지 마음이 풀리질 않았다. 나 나름대로 이걸 이겨내려는 노력이 전시나 지원네트워크 일로 이어졌다. 어찌 보면 내 마음의 짐을 덜어보겠다는 이기적인 생각에서 하는 일이다.”

 -작품 판매를 목적으로 하는 전시도 아니고 입장료를 받는 것도 아닌데 “무기한 전시”라고 못을 박으셨다. 꼬박꼬박 월세 내고 유지비 대야 하니 재정적 부담이 크겠다.

 “뭐 돈이야 깨지지만….”

 -입장료는 아니더라도 자발적으로 전시 기금을 내라든가 하면 흔쾌히 낼 사람이 많을 텐데.

 “그런 얘길 자주 듣는데 그럴 때마다 내가 짜증 섞인 대답을 해버린다. ‘예슬이 앞세워서 앵벌이 할 일 있냐?’고. 상대가 다시는 그런 말 못 꺼내게. 그러다 보니까 부작용이 좀 있긴 하다. ‘저 자식이 배가 불러서 그렇구나’ 생각을 하는지 진짜 도와줄 만한 사람들도 안 도와준다. 나 사실 돈 없는데.(웃음)”

 박예슬 전시회에 돈을 대는 후원자는 없지만, 세월호 일이라면 언제 어디서든 한걸음에 달려와 마음을 보태는 이들이 그의 주변엔 늘 있다. 2만장의 전시회 포스터를 배송하고 갤러리에 당번을 서는 것도, 국회부터 광화문까지 삼보일배를 진행한 것도, 유가족과 농성 참가자들에게 추석날 집밥을 먹이겠다고 식당을 빌려 밤새 전을 부치고 400인분의 도시락을 준비한 것도, 장영승과 페이스북으로 연결된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그들과 함께, 추석 연휴 부지런히 행사를 준비하고 진행하느라 장영승은 명절에도 변변히 쉬지 못했다. 안동 장씨 9대 종손인 그는 추석 전날 당일치기로 안동엘 다녀왔을 뿐, 단식 중이라 음식도 입에 대지 못했다.

 -추석 공연 때 메아리 노래를 들으며 사실 착잡했다. 이제는 기성세대가 된 중년층들이 정말 “이 어둠 건너 부활”할 수 있을까? “어떤 안락에도 굴하지 않고” 그렇게 살아온 걸까?

 “냉정하게 얘기하면 내 경우엔 ‘안락에 굴했던’ 것 같다. 징역 살고 나오고 학교 졸업하고 소위 스포트라이트도 좀 받고 돈도 벌고 회사도 커지면서, 그 안락의 달콤함에…. 벤처기업 하면서 나름의 역할을 하려고 한 건 후회 안 하지만, 내가 좀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크다. 좀더 철저했더라면, 좀더 힘을 모아 나갔으면 이렇게까진 안 되었을 텐데. 세월호 아이들 죽음에 대해서도 그런 미안함, 원죄의식 같은 게 있다.”

4~5월에 분노 조절 안돼 방황
팽목항에서도 마음 풀리지 않아
디자이너 꿈꾸던 단원고 예슬양
유작 스케치 실물로 전시한 건
마음의 짐 덜자는 생각서 비롯

투사에서 벤처1세대 대표주자로
돈과 명예가 들어왔다 나가고
대박이 났다 쪽박을 차면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일 찾아 기웃
304송이 시네마 프로젝트 궁리중

신림동 개천가에 포니2 세우고 등교하다

 장영승은 전형적인 386세대다. 63년 서울 동숭동에서 태어나 82년 서울대 컴퓨터공학과에 입학, 85년엔 광주 5·18의 진실을 알리기 위한 미문화원 점거농성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88년 컴퓨터공학과에 복학해 졸업을 한 뒤, 90년 ‘나눔기술’을 창립해서 벤처1세대 대표주자로 이름을 날렸다.

 -사진, 오토바이, 피아노가 취미인 서울공대생…. 신입생 시절엔 “부티 나는 날라리”의 요건을 두루 갖추었다.(웃음)

 “대학 때는 그런 게 부끄러웠다. 사실 우리 할아버지가 나 서울대 입학했다고 포니2를 사주셨다. 80년대 ‘오렌지 원조’라고 할 만하다.(웃음) 근데 그 차를 몰고 학교까지 갈 수가 없었다. 신림동 개천가에 차를 세워놓고 후줄근한 옷으로 갈아입고 버스 타고 학교 다녔다.”

 누리는 게 많아 죄스럽고 부끄럽던 청년은 대학 2학년 때부터 야학 활동을 시작했다. “종일 띵가띵가하다가 저녁까지 일하고 오는 애들에게 뭘 얘기한다는 게 가증스럽다고 여겨져서” 그들과 똑같이 일하는 노동자가 되기로 맘먹고 월급 9만5천원짜리 청계시장 재단보조가 되었다. 대학 졸업장에 대한 미련은 별반 없었다. 85년엔 서울 미문화원 농성 사건으로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그 전력 때문에 미국 비자를 받지 못해 훗날 그가 미국에 회사를 내고도 캐나다에 가서 회의를 하다가 온 일화는 유명하다. 장영승이 대학을 졸업할 무렵, 피시통신이 붐을 이루기 시작했다. 그에겐 신기하고 가슴 설레는 신천지였다.

 -90년 ‘바른통신을 위한 모임’(바통모) 설립에 관여한 것으로 알고 있다. 바통모는 우리나라 온라인 시민행동의 선구자 격이다. 아이디 뒤에 ‘님’자를 붙이고 서로 존대를 하도록 해서 수평적 소통문화를 정착시킨 점이라든가, 사이버공간 사용자의 ‘통신주권’을 제기했다는 점에서 이후 인터넷문화 형성에 큰 이정표가 된 모임이었다.

 “그런 점이 난 너무 재미있었다. 모뎀을 통해 사람들이 만나 토론하고 싸우기도 하고 사랑도 하고…. 너무나 신기해서 급속히 빠져들었다. 식빵 한 줄, 콜라 한 병 사다 앞에 놓고 그거 뜯어 먹으면서 24시간 채팅만 한 적도 있다. 하루는 거울을 보니 얼굴이 완전히 반쪽, 폐인이 되어 있었다. 세수도 안 하고 이빨도 안 닦고.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어느 한 방(동호회 사이트)에 ‘우리 이러지 말고 언제 모여서 볼이나 한번 찹시다!’ 제안했다. ‘공 차자!’ 그 한마디로 시작된 거다.”

 열흘 뒤 한양대 운동장에 얼굴도 모른 채 모여든 이들만 800여명. 당시 피시통신 인구를 고려하면 엄청난 수였다. 그 모임이 90년 바통모 결성으로 이어졌다.

 -80년대식 전통적 운동방식에서 새로운 문화와 조직 패러다임으로 빠르게 진입한 경우다. 원래 새 트렌드에 민감하고 적극적인가?

 “한량이다 보니 체질상 그게 딱 맞는 것 같다. 고여 있는 것에 대해서는 짜증이 난다. 새로운 걸 좋아한다.”

 -90년은 참 바쁜 해였겠다. 같은 해 ‘나눔기술’도 창업했다.

 “대학 졸업 직전 펜타시스템이라는 외국인 회사에 취직을 했다. 전과자라고 나를 받아주는 회사가 없었으니까. 연봉 2500만원을 받았는데 당시로선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하루는 삼성에 다니는 친구랑 술을 먹다가 ‘야, 내가 그냥 이렇게 살 것 같다’고 했다. 돈 많이 받으니까 오디오 좋은 거 사서 듣고 안락한 ‘직딩’으로…. 그 말을 듣더니 내 친구가 자기도 그렇다는 거다. 그래서 ‘우리 이렇게 살면 안 되지 않냐?’ 하니까 자기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그러곤 바로 다음날 그 친구도 나도 사표를 던졌다.”

 바통모 출신들이 회사의 주력이 되어 본격적인 소프트웨어 개발사업을 시작했다. 90년대 초 아이비엠(IBM)과 삼성, 엘지 같은 쟁쟁한 경쟁사를 제치고 방송통신위원회 전산시스템을 수주하면서 ‘골리앗 잡는 다윗’으로 소문이 나며 회사는 급상승세를 탔다. 유능한 인재들이 대기업 대신 나눔기술을 택했고, 창업 10년 만에 매출은 100억원대에 육박했다. 승승장구 잘나가던 그의 사업은 그러나 2000년도 도레미레코드를 400억원에 인수하면서부터 기울기 시작했다. 불법 음악서비스가 횡행하던 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로 돈이 새나갔고 결국 2003년 장영승은 나눔기술을 매각해 빚잔치를 하고 다시 빈털터리가 되었다.

롤러코스터 같은 인생, 한국판 포레스트 검프

 -당시 벤처 열풍이 일면서 원칙을 저버린 기업가들이 많았다. 성과 부풀리기를 해서 주가를 뻥튀기하고, 기업은 망해도 혼자만 돈 챙겨서 날아가 버리고…. 나눔기술을 하며 그런 유혹은 없었나?

 “왜 없었겠나. 유혹이 아주 많았지. 지금 정부에 벤처 쪽 관련된 사람 중에도 그때 구속된 사람들이 숱한데. 사기꾼들 많았다. 회사 어려울 때 탁 챙겨서 튀면 말끔하니까.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 곧 잊어버리고…. 근데 그런 유혹을 이겨낼 수 있었던 건 ‘그래도 쪽팔리진 말자’는 거였다. 좀 힘들어도… 쪽팔리면 진짜 버틸 힘이 없어지니까. 친구들이 나더러, 장영승이 저놈 저거 ‘가오’ 하나로 버틴다고 하는데, 솔직히 난 그 말이 좋다. 그나마 그것 없었으면 버티지 못했을 거다.”

 포니 승용차를 대학가 개천가에 세워두고 가던 청년의 염치,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고 높은 연봉의 유혹을 내치던 자의식, ‘그래도 쪽팔리진 말자’는 사업가의 오기와 자존심, 그것은 돈과 권력의 유혹에서 장영승을 지켜온 ‘사회적 양심’이었다. 사업에 실패한 이후 설상가상으로 오토바이 사고로 2005년 그는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왔다. 왼팔을 제외하고, 오른팔과 양다리, 목까지 골절상을 입고 온몸에 깁스를 한 채 9개월을 입원해 있었다. 살아있는 것도, 멀쩡하게 걸어다니는 것도 자신의 운명에 주어진 덤이라고 그는 여긴다.

 2011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경영학과에 입학해 석사과정을 수료하는 한편, 삼성 백혈병 재해를 다룬 <또 하나의 가족>을 크라우드펀딩으로 성사시켰다. 장영승은 여전히 자의식 강한 “한량”이다.

 -정말 롤러코스터 같은 인생이다. 돈과 명예가 들어왔다 나가고, 대박이 났다 쪽박을 차고….(웃음) 그럼에도 본인은 끊임없이 새로운 일을 찾아 기웃거리고 한번 꽂히면 올인을 한다. 이렇게 사는 인생이 즐거운가?

 “즐겁지. 안 그랬으면 나 같은 사람 벌써 폐인 되었을 거다. 사고로 입원해 있을 때 간호사가 자꾸 내 방에 들어오는 거다. ‘어, 날 좋아하나?’ 했더니 그게 아니고 자살할 위험이 높은 의료시찰 환자로 분류가 돼서…. 아니 뭐 움직일 수나 있어야 죽지.(웃음) 사실 객관적으로 보면 자살할 만한 이유가 있는 상황이었다. 회사는 망하고 친한 친구한테 배신당하고. 근데 난 어떻게 덜 우울하게 지낼까만 연구했다. 병원에서도 한량 짓 하면서. 병실 형광등이 싫어서 카페처럼 분위기 있는 백열등으로 바꾸고 트랜지스터 앤티크 라디오 갖다 놓고….”

 -그렇게 버틸 수 있는 힘, 삶의 재미를 만드는 힘은 어디서 나오나?

 “사람들은 내가 강하다고 하는데, 강해서 버티는 게 아니라 버텨서 강한 거다. 버티는 힘은, 뭔가 새로운 해법을 찾는 것, 불가능해 보이는 걸 새롭게 시도해보는 데서 나오는 것 같다. 남들이 안 된다고 하면, ‘어? 왜 안 돼? 내가 해볼까?’ 하는 오기 같은 게 생긴다. 한마디로 철이 없는 거다.(웃음)”

 ‘철없는 한량’ 장영승은 요즘 또 새로운 일을 궁리하고 있다. 이름하여 ‘304송이 시네마’ 프로젝트. 세월호 희생자 304명에 대해서 각 10분 분량의 영상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단원고 245명 각각의 삶을 기록한 책 245권을 만들겠다는 야심찬 프로젝트다. 예슬이의 못다 이룬 꿈을 위해 낯 모르는 사람들이 서로 만났듯이, 궁극적으론 우리 모든 아이들과 어른들이 꿈을 매개로 만나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꿈이룸 네트워크’를 만들겠다는 소망도 있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가 한 개인의 인생을 통해서 전후 미국 사회 30년을 조망했듯이, 당신의 인생에는 지난 30년의 한국 사회가 집약되어 있는 것 같다. 80년대 운동권, 90년대 벤처사업가, 2000년대 문화예술기획자, 그리고 2014년 세월호까지. 당신을 가지고 한국판 포레스트 검프를 만든다면 결말이 어떻게 될 것 같은가?

 “끝이 중요할 텐데… 20년 후에 정권이 바뀌고 꿈이룸 네트워크도 만들어지고 하면 나도 자랑스럽게 버스정류장에서 손주를 기다리면서 톰 행크스처럼 앉아 있을 텐데.”

 -그렇게 안 되면?

 “안 되면 그런 영화는 만들 필요가 없겠지. 패배한 전사가 되면….”

 아직 영화는 만들어지는 중이고 장영승의 달리기도 끝나지 않았다.

 녹취 김연지(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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