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히스토리] 임신기간 근로단축 시행한다는데.. 또 '그림의 떡' 될라

선정수 기자 입력 2014. 9. 19. 03:13 수정 2014. 9. 19. 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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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25일부터 임신 초기와 만삭의 여성 근로자들은 임금 삭감 없이 하루 2시간씩 근로를 줄여달라고 청구할 권리를 갖게 된다. 사업주가 근로자의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최대 500만원의 과태료를 내야 한다. 유산 위험이 큰 임신 초기와 거동이 불편한 만삭의 임신부를 보호하겠다는 취지다. 가임기 여성과 출산을 계획하고 있는 남성들은 이런 제도 도입이 반갑다. 그러나 제도가 설계대로 잘 실행될지에 대한 의문도 동시에 제기하고 있다.

◇임신기 근로시간 단축제도=A대기업에 근무하는 결혼 5년차 B씨(32·여)는 내년 첫 출산을 목표로 임신을 준비 중이다. B씨는 임신기 근로시간단축 제도가 매우 반갑다. 습관성 유산으로 고통받는 직장 동료와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고는 임신 초기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기 때문이다. 격무와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두세 차례 유산을 한 뒤 아이를 잃지 않으려고 회사를 그만두고 임신 초기 내내 누워만 있었다는 끔찍한 이야기도 들린다.

임신기 근로시간단축 제도는 이런 임신 초기 직장여성의 유산 고민을 줄이기 위해 도입됐다. 임신 사실이 확인된 직후부터 12주까지 근로시간을 단축하고 이후엔 통상 근무시간을 일하고 36주 이후부터 출산 직전까지 근로시간을 줄일 수 있다. 의학 교과서에 따르면 자연 유산의 85% 이상이 임신 8주 이내에 집중되고 12주 이후에는 발생 빈도가 극히 낮아진다. 직장여성의 유산율은 23.3%로 전업주부(17.0%)보다 높다.

임신기 근로시간단축 제도는 유산의 위험이 가장 높은 시기에 업무시간을 줄여 위기를 극복하라는 정책적 배려다. 임신한 여성 근로자는 근로시간 단축 개시 예정일, 근로시간 단축 종료 예정일, 근무개시 시각 및 근무종료 시각, 임신기간, 신청 연월일, 신청인 등에 대한 사항을 적은 문서(전자문서 포함)를 사용자에게 제출하면 된다. 근로시간을 줄였다고 임금이 깎이지는 않는다. 사용자는 의무적으로 근로자의 청구를 받아들여야 한다. 근로시간 단축을 허용하지 않으면 과태료를 물게 된다.

B씨는 아이가 생기면 곧바로 근로시간 단축을 청구할 계획이다. A기업은 임신부에게 핑크색 사원증 목걸이를 지급해 정시에 퇴근시키는 등 모성보호 정책이 잘 돼 있기로 유명한 곳이다.

◇제도가 없어서 못 쉬나=C중견기업에 다니는 D씨(31·여)는 걱정이 태산이다. 지난달 임신 사실을 알게 된 2개월차지만 회사에 섣불리 이야기를 꺼내기가 두렵다. 업무는 많은데 회사에 일할 사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육아휴직을 사용하기 어려운 분위기 탓에 여러 여성 동료들이 임신 또는 출산과 함께 직장을 그만뒀다. D씨도 임신기 근로시간단축 제도가 시행된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과연 신청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법으로 보장된 권리라지만 상사들이 온갖 이유를 들어 회유와 압박을 할 게 뻔하다. 끝내 근로시간 단축 청구권을 사용하겠다고 굽히지 않을 경우엔 이기적이라는 비난과 함께 엄청난 분란이 일어날 것도 틀림없다. 회사와 싸워봤자 이득 될 게 없고 뱃속의 아기에게도 좋지 않아 큰 소리를 내고 싶지 않다. 하지만 임신 초기에라도 근로시간을 줄여 스트레스를 덜 받고 싶은 마음이 크다. 유산에 대한 두려움이 크기 때문이다.

정부는 2011년 10월부터 육아기 근로시간단축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육아휴직을 신청할 수 있는 만 8세 이하 또는 초등학교 2학년 이하 자녀를 둔 부모가 주당 15∼30시간으로 근로시간을 낮출 수 있는 제도다. 근로시간이 줄어든 만큼 삭감된 임금의 일부를 정부가 지원해준다. 다음달부터 줄어드는 근무시간에 비례해 지급하는 급여액이 통상임금의 40%에서 60%로 상향되고 급여지급 상한액도 62만5000원에서 93만7500원으로 오른다.

그러나 지난해 이 제도를 이용한 사람은 736명에 그쳤다. 올해는 지난해보다 약간 늘어나는 추세지만 상반기 이용자는 516명에 그쳤다. 정부는 미미한 활용도의 원인을 홍보 부족에서 찾고 있다.

◇그림의 떡 되지 않으려면=중소기업에 다니던 E씨(32·여)는 지난해 사무실에서 하혈을 하고 쓰러졌다. 세 번째 유산이다. 행복한 가정을 꾸미는 게 꿈이었던 E씨는 올해 네 번째 아이를 갖고는 출산전후 휴가를 나눠 사용하기로 했다. 이전까지는 출산전후 휴가는 출산일을 전후해 연속해 90일을 사용해야 했다. 그러나 2012년 8월 법 개정 이후 출산 전에 44일의 휴가를 분할해 쓸 수 있게 됐다. E씨는 산전후 휴가 분할 제도를 활용한 것이다. 덕분에 E씨는 임신 초기를 무사히 넘기고 출산 예정일을 바라보고 있다.

'법전 위에 누워 잠자는 권리는 보장하지 않는다'는 법조계의 금언이 있다. 정부는 다양한 모성보호 제도를 갖추고 있다. 대부분 근로자가 청구를 해야 사용할 수 있는 제도들이다. 고용노동부 홈페이지-정책마당-여성-임신·출산여성 보호 항목을 참조하면 된다.

하지만 현재 정부는 모성보호의 대상이 되는 여성 근로자 실태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정부가 먼저 권리를 보호해주기를 기대하는 것보다는 근로자가 알아서 권리를 찾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내가 처한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에 해당되는 법과 제도에서 방법을 찾아야 한다. 더불어 사업주가 모성보호에 관심을 기울이고 여성 근로자들이 마음 편하게 각종 제도를 이용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도 절실하다.

정부가 모성보호 정책의 집행력을 더 높여야 한다는 지적도 많다. 육아기 근로시간단축 제도는 근로자의 청구를 허용하지 않는 사업주에게 500만원의 과태료를 물리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과태료 부과 실적은 한 건도 없다. 워낙 이 제도를 사용하는 사람이 적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만큼 강제력이 없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임신기 근로시간단축 제도도 과태료 수준은 동일한 500만원이다. 하지만 위반 횟수가 아무리 많아도 과태료는 할증되지 않는다. 게다가 위반 행위의 정도와 동기 등을 감안해 절반까지 감경이 가능하도록 했다. 깎아주기는 하지만 악질적인 위반에 가중처벌은 없는 셈이다.

선정수 기자

jsu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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