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하청, 공정 구분없이 불법파견 판결.. 도급 관행 제동

박철응 기자 입력 2014. 9. 19. 00:11 수정 2014. 9. 19.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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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차 사내하청 불법" 1심 판결 의미·파장
"진짜 사용자는 현대차" 노동계 주장 법원서 인정
2·3차 하청도 불법 판단.. 차 산업 전반 '기준' 될 듯

18일 서울중앙지법의 판결은 현대차 비정규직노조가 10년 넘게 "진짜 사용자는 현대차"라고 해온 주장을 법적으로 인정하는 자리가 됐다. 그간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였던 최병승씨와 한국지엠·쌍용차 등의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유사한 판결을 받았지만 소송 인원이 소수여서 회사 측은 "개인에 대한 판결일 뿐"이라는 입장을 고수해 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1000명 가까운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공정 구분도 없이 전원 불법파견 판결을 받았다는 점에서 자동차 생산공정 전반에 적용할 만한 기준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된다. 압축하면, 현대차 공장에서 생산 과정에 참여하는 노동자라면 도급(하청) 계약이 성립될 수 없어 모두 정규직으로 채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1990년대 말 외환위기 이후 제조업체들이 '도급'이라는 이름으로 비정규직을 남용해 온 관행에도 제동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18일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법원 판결을 들은 뒤 법원 청사를 나오고 있다. 비정규직 노조원들은 지난 2월과 8월 예정된 선고가 두 차례나 연기되자 단식농성을 벌이면서 예정일에 선고를 내려달라고 요구해왔다. | 강윤중 기자

현대차 등 완성차 업체들은 그간 불법파견 논란이 커지자 공장 내에서 정규직·비정규직 업무를 구분하는 이른바 '공정 재배치' 작업을 벌여왔다. 하지만 이번 판결에서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혼재 작업 여부를 기준으로 삼지 않고 모두 불법파견으로 판단했다. 사내하청 노동자들만 모아서 다른 업무를 시키더라도 불법파견이라는 규정을 피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1차 하청업체 소속 노동자뿐 아니라 2·3차 하청업체까지 모두 불법으로 판단한 점도 의미가 크다.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일부 공정만 불법파견이라고 하면 라인을 나눠서 비정규직을 채우는 부작용이 있을 수 있는데 공정 구분 없이 불법파견이라는 판결이 나온 것"이라며 "완성차 공장은 한 라인을 타고 작업이 진행돼 불법파견으로 볼 수밖에 없고, 특히 현대차는 왼쪽엔 정규직, 오른쪽엔 비정규직이 작업할 정도였기 때문에 당연한 판결"이라고 말했다.

현대차는 "판결문을 면밀히 검토한 후 항소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항소할 가능성이 커 보이지만 사회적 비판 여론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박태주 한국기술교육대 고용노동연수원 교수는 "항소를 하더라도 사회적 약자인 사내하청 노동자들에 대해 우선적 구제를 하는 것이 옳다"면서 "그동안 노동부와 법원에서 수차례 판결이 나왔고 이번에는 1000명가량이나 불법파견 판결을 받았는데도 정규직 전환을 하지 않은 채 법정 공방을 계속한다면 사회정의 차원에 비춰 비겁하다"고 말했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의 기소 문제도 다시 도마에 오를 것으로 보인다. 금속노조는 2010년 7월 최병승씨에 대한 대법원의 불법파견 판결이 나오자 현대차 주요 임원을 검찰에 고발하고, 2012년에는 정 회장 등을 추가 고발했지만 검찰은 4년째 결론을 내리지 않고 있다. 현대차의 불법파견을 분명히 한 이번 판결에 따라 검찰이 나서고 정 회장이 코너에 몰릴 경우 일괄적인 정규직 전환 결단을 내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현대차뿐 아니라 완성차 업계에서 일하는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정규직 채용 요구는 거세지게 됐다. 금속노조 한국지엠 비정규직지회 관계자는 "완성차 회사의 생산라인은 크게 다를 게 없다"면서 "법원이 공정을 따지지 않고 2·3차 하청까지 모두 불법파견으로 판단했기 때문에 다른 사내하청 노동자들도 소송하면 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7월 발표된 고용노동부의 고용형태 공시를 보면 국내 완성차 5개 업체의 '소속 외 근로자(사내하청)'는 2만2000여명에 이르고, 이 중 청소·경비 등 용역 업무를 빼고 직접 생산과정에 참여하는 사람만 1만8000명에 달할 것으로 노동계는 보고 있다. 완성차 공장처럼 컨베이어벨트 시스템을 쓰는 자동차부품·전기전자·기계·철강 등 제조업 사내하청 노동자들도 불법파견 여부를 다퉈볼 개연성이 커졌다. 국내 300명 이상 사업장의 '소속 외 근로자'는 87만8000명에 달한다.

정부의 역할이 더 중요해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유선 연구위원은 "박근혜 대통령의 선거 공약이 상시지속적 일자리는 정규직으로 채용해야 한다는 것 아니었느냐"며 "불법파견 논란을 정리하기 위해선 정부 의지가 강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박철응 기자 her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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