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40명 줄줄이 구타, 그날 한숨도 못 잤다

2014. 9. 16.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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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박동국 기자]

'윤 일병'과 '임 병장' 사건으로 군폭력의 실상이 언론에 폭로됐다. 베일에 가려져 있던 군대 내 가혹행위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국민은 경악했다. 군 입대가 얼마 남지 않은 아들을 가진 부모들의 마음속에는 공포가 자리 잡았다. 군대는 신뢰를 잃었다.

이 소식을 접한 대부분의 군필자들은 "터질 게 터졌다" 싶었을 것이다. 엄격한 내무 생활을 겪어오면서 다들 한 번쯤은 폭력의 피해자였거나 목격자 혹은 가해자였을 것이다. 나 또한 "이제야 터지나" 싶었다. 내 군생활에서 구타행위나 기수열외는 쉽게 자행되는 일이었다. 나 또한 군생활 중 선임병들의 이유 없는 구타에 '하극상'까지 생각했던 적이 있다.

해병대라 그랬는지 구타가 유독 심했다. 유사시 최전방에 투입되어야 하는 보병 부대이기에, 구타는 군 기강과 위계질서를 잡는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여겨지며 묵인됐다.

최근 국방부가 밝힌 대응책을 보면 급한 불을 끄기 위해 내놓은 궁여지책에 불과한 것 같다. 군대에서 폭력을 근절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과거 군 생활 때도 '구타 근절을 위한 캠페인'이 자주 열렸지만 간부들의 눈을 피한 폭력은 암암리에 이루어졌다.

지난 군생활에서 겪은 일을 꾸밈없이 그대로 풀어보려 한다. 이번 기사는 새벽 1시의 구타, 해병대는 지옥이었다에 이은 두 번째 글이다. - 기자말

해병 악습 '새벽 보고'

해병대 이야기를 다룬 영화 <해안선>의 한 장면.

ⓒ 엘제이 필름

해병 보병부대에 배치받은 후 약 석 달 동안은 하루 3시간 이상 취침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군 입대 6개월 후에 진급하는 일병 계급이 되기 전까지 이병으로서 할 일들이 새벽까지 쌓여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잠을 못 자게 만드는 '새벽 보고'라는 악습이 있었다.

인간의 욕구에서 수면욕을 빼놓을 수 없다. 가뜩이나 이른 아침에 일어나야 하는 군대에서는 넉넉한 수면은 먼 이야기였다. 그 탓에 더욱 수면욕을 참을 수 없는 곳이었다.

이를 이용한 악습이 있다. 바로 '새벽 보고'다. 해병대 용어로 '찐빠'라 불리는 '실수'를 하게 되면 구타는 벌어진다. 몇 대 때리는 폭력으로도 그 속이 안 풀리면 '새벽 보고'를 으레 시키곤 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7박8일 중대 훈련을 앞둔 전날 밤이었다. 당시 일병 계급을 달기 한 달 전쯤으로 어느 정도 중대 돌아가는 상황을 터득한 상황이었다. 흔히 해병 병장은 '킹'이라고 불리는데, 이 계급쯤 되면 말 그대로 '왕'처럼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

예를 들자면 훈련 전날까지 아무런 준비나 지시를 하지 않아도 아래 후임들이 군용 가방인 완전 무장 속에 들어가는 전투 물자는 물론이고 라면, 물티슈, 참치 등을 알아서 준비해 챙겨준다. 병장은 훈련 당일 일어나서 이미 마련돼 있는 무장만 들고 가면 끝이다.

훈련 당시 병장들이 메는 완전 무장은 이른바 '뽕 무장'으로 준비하는 것이 의례였다. 겉보기엔 두툼해 보이지만 속에는 박스 각대와 신문을 구겨 넣어 실제로는 가볍게 만드는 것이다. 앞에 넣는 군용 도시락인 반합도 뺀 채로 말이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순검 시간이 찾아왔다. 순검은 육군의 점호와 비슷한 인원 및 훈련 점검을 뜻한다.

순검은 '하사', '중사'가 도는 것이 관례였으나 그날만은 특별히 중대장이 순검을 주관했다. 연대장이 관심을 두는 중대 훈련 전날이었기 때문에 훈련 물자 파악을 위해 중대장이 자처했다. 중대장은 각 소대를 돌고 마지막으로 우리 소대로 들어왔다.

"무장 앞으로 다 꺼내!"

중대장이 장교들과 하사 무리를 이끌고 들어와 소리쳤다. 병사들은 채스터(관물대) 위에 올려져 있던 완전 무장을 잽싸게 각자 앞에 내려놓았다. 병장은 속이 텅텅 빈 '뽕무장'을 내려놓았다. 중대장은 의심의 눈초리로 병장의 완전 무장을 쏘아보았다. 반합을 넣는 앞주머니가 비어있었기 때문이다.

"야, 김 병장, 무장 갖고 와!"

김 병장은 특유의 거드름을 피우는 듯이 천천히 무장을 들어 중대장 앞에 갖다 놓았다. 해병대에서는 간부들과의 관계가 대부분 좋지 않다. 부사관과는 그나마 친분이 있지만, 장교와의 관계는 심히 좋지 않았다.

중대장은 자신의 지위와 입지를 위해서라도 병장들에게 존경을 받고 싶어 했으나, 병장들은 중대장을 무시하기 일쑤였다. 장병들의 눈에는 간부는 병들을 영창에 집어넣고, 병 상호 간 문화를 존중해주지 않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때마침 병장들과 중대장 간에 눈에 보이지 않는 알력이 계속되던 차에, 중대장이 딱 봐도 뽕무장처럼 보이는 완전 무장으로 트집을 잡은 것이다. 중대장이 병장의 무장을 한 손가락으로 들어 보이더니, 현저히 적게 나가는 무게에 놀란 듯 표정을 일순간 찡그렸다. "이 새끼…" 하더니 복도로 가서 중대장이 소리친다.

"전 중대원, 무장 가지고 당장 복도로 집합. 상황병 예외 없다. 당장 집합해!"

이른바 원산 폭격(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열중 쉬엇 자세를 하는 것). 이와 동시에 중대장의 긴 훈계가 이어졌다.

뽕무장 하나로 비롯된 이 날의 기합에서는 전 병장들의 원산 폭격(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열중 쉬엇 자세를 하는 것)과 동시에 중대장의 긴 훈계가 이어졌다.

상당히 길었던 기합이 끝나자, 중대장은 30분 만에 완전무장을 FM(정규 교본에 명시된 물자 준비 규칙)대로 할 것을 지시했다. "실시!"라는 구령과 함께 모두 소대로 황급히 돌아가 무장을 꾸렸다.

해병대에서 병장은 전역을 얼마 앞두지 않은 계급이기 때문에 공연히 말썽을 일으키길 싫어한다. 구타 또한 직접 가담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날은 달랐다. 화가 끝까지 난 병장은 소대에 들어가자마자 내 위 상병 선임들을 불러 놓고 목을 후려치고, 옆차기로 사정없이 때렸다. 이병들은 선임들이 맞는 장면을 응시하면 안 되기 때문에 뒤돌아 있었다.

구타를 끝낸 병장은 씩씩거리며 자신의 완전 무장을 직접 싸기 시작했고, 후임들이 도와주려 하자 '건들지 말라'며 엄포를 놓기도 했다.

지옥같은 '중대 보고'... 차라리 내가 맞았으면

"취침 15분 전, 취침 15분 전"

30분의 점검 이후 취침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간은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오늘은 피바다가 될 거다'라고 나는 이미 예측했다.

어김없이 적중했다. '내가 이 계급에 병장한테 맞아야겠냐'는 듯 불만스러운 내색을 비추는 '전투상병'이 내게 다가왔다. 전투상병은 중대 전체를 휘어잡는 힘을 가졌다고 해서부르는 해병대 용어다. 그 상병은 나와 내 후임들에게 '중대 보고'를 명령했다. 중대 이병 중에서 가장 고참이었던 내가 대표 희생자로 지목됐다.

"너랑 니 후임들은 새벽 1시부터 10분 간격으로, 니 위로 나 아래로 한 명씩 불러와."

중대 보고의 체계는 이렇다. 앞으로 한 시간 이후부터 10분 간격으로 내 바로 위 기수 선임부터, 나를 보고시킨 상병 선임 바로 아래 기수까지 모두 부르는 것이다. 내 위와 그 선임 아래 기수 사이에는 약 40명이 있었다. 보고를 무시할 경우 구타의 강도가 더 심해지고 기간도 늘어나기 때문에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지옥 같은 보고'를 해야 했다.

한 시간 뒤 바로 내 한 기수 선임을 데리고서 그 전투상병에게 '새벽 보고'를 하러 갔다.

"OOO해병님 OOO해병님… 1시입니다." 전투상병이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내가 부른 맞선임을 손짓으로 부르더니 목을 꺾으란 명령을 내리고 목 옆을 주먹으로 후려갈겼다. 모두가 조용히 잠든 소대에서 일어난 일이다.

목을 후려 맞은 한 기수 맞선임은 항상 그래 왔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병 OOO' 관등 성명을 대고 감사히 맞는 듯 보였다. 선임에게 구타를 당하면 즉시 관등 성명을 대야 하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었다.

"가 봐." 전투상병 명령에 조용히 "필승!" 거수경례를 한 맞선임은 다시 취침하러 갔다. 그 이후에도 10분 간격으로 내 위 기수의 선임들을 차례로 깨워다가 상병 선임에게 데려갔다.

모두 한 대씩 맞았지만, 나는 그 선임에게 단 한 대도 맞지 않았다. 당사자에게는 폭력을 가하지 않고 주변 사람만을 때림으로써 미움을 사게 만든다든가, 내림 구타를 유발한다든가 하는 방법이었다. 내 잘못으로 타인이 구타를 당한다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차라리 내가 맞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위 선임을 깨워 보고시킬 때마다 욕을 하며 일어나는 선임도 있었고, 따로 나를 불러 조인트(군홧발로 정강이를 때리는 것) 까는 선임처럼 그대로 내림 구타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반면에 나 대신 맞아준 선임이지만 '군 생활은 원래 이런 거다. 앞으로 잘해라' 조언해주는 전우도 있었다.

그렇게 날이 밝아왔다. 내 위의 수십 명 선임들은 한 대씩 맞았다.

나는 그 날 한숨도 자지 못한 채 7박 8일의 중대 훈련을 떠나야만 했다. 내 지옥같은 이병생활은 끝이 보이지 않은 산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스마트하게 오마이뉴스를 이용하는 방법!☞ 오마이뉴스 공식 SNS [ 페이스북] [ 트위터]☞ 오마이뉴스 모바일 앱 [ 아이폰] [ 안드로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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