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나마스테] 김성곤 한국문학번역원장

2014. 9. 15.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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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대중문학은 '미녀와 야수' 같다.. 한국문단, 경계를 넘어라"

매년 10월 둘째주 목요일 저녁이면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된다. 스웨덴 시간으로는 오후 1시, 한국 시간으로 저녁 8시 정각이다. 이 시기에 촉각을 세울 나라는 아마도 아시아에서는 한국과 일본뿐일 것 같다. 중국은 연전에 '붉은 수수밭'의 소설가 모옌이 수상했고, 일본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오에 겐자부로 두 명이 일찌감치 수상했지만 무라카미 하루키의 인기에 고무돼 다시 그의 수상에 목을 길게 빼고 있는 형국이다. 한국은 두말할 것도 없다. 문학적 자존심으로 치면 일본은 물론 중국에 뒤질 게 없는데 이른바 '문학올림픽'에서 한 번도 금메달을 못 받은 것처럼 답답한 분위기다. 다시 그날이 불과 3주 앞으로 다가왔다. 다음주부터는 한국문학번역원 주최로 세계 젊은 작가들을 초청해 국내 문인들과 짝을 지어 페스티벌을 벌이는 '서울국제작가축제'도 열린다. 이 시점에 김성곤(65) 한국문학번역원장을 찾아간 이유다.

"노벨문학상은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지 원한다고 주는 건 아닙니다. 좋은 작품, 좋은 번역, 좋은 해외 출판사로 연계되고 있으니 한국 작가가 수상하는 건 시간문제라고 봅니다. 때는 됐습니다."

김성곤 원장은 한국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낙관적인 편이다. 그 시점을 아무도 예측할 수 없긴 하지만 대체로 그의 낙관론에 수긍하는 분위기다. 소수 언어를 사용하는 한국문학이 제대로 세계 언어로 번역되지 못한 게 가장 큰 요인이라는 사실에 모두 동의해왔다. 한국문학번역원이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공조직으로 2001년 태동해 13년째 유지되고 있는 배경이기도 하다. 김성곤 원장은 2012년 임명돼 이제 3년 임기를 다 채워가는 시점이다.

풀브라이트 장학금으로 미국 유학을 떠나 뉴욕대에서는 영문학 박사를, 다시 컬럼비아 대학에서는 비교문학 박사 공부를 하는 일방으로 미국의 유수한 작가들을 인터뷰해 한국에 소개했던 그이다. 1984년 서울대 영문과 교수 자리로 귀국하면서부터는 포스트모더니즘을 한국에 본격 소개하며 새로운 바람의 진원지 역할을 했다.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혹은 참여와 순수라는 명분으로 갈라진 한국문학 판에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제3의 길을 제시하며 영화를 비롯한 문학의 경계 너머 장르를 아울러온 이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그가 한국문학번역원장으로 취임한 이후 달라진 건 그동안 부진했던 한국문학의 영미권 진출이 분명히 가시화됐다는 점이다.

미국에서 해외문학을 번역 출판하는 가장 큰 달키(Dalkey Archive Press)에서 한국문학전집 25권이 출간된다. 이미 10권이 나왔고 올가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 5권이 추가되며 내년에 완간될 예정이다. 김 원장이 서울대 출판문화원장이던 시점에 달키로부터 제안을 받았지만 공적인 조직이 더 적합하다는 의견을 제시했고, 마침 그가 번역원장으로 부임하면서 순풍에 돛을 단 프로젝트였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영미권에서 어린 시절 공부를 한 한국 직원들을 채용해 막강한 영미팀을 만들었다. 이어 전자책 시대에 대비한 'E-Book팀'도 조직해 가시적인 성과를 냈다. 미국 최대 온라인 서점인 아마존의 전자책 온라인 잡지에 한국 작가 배수아의 단편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를 올렸고, 내년에는 그네의 장편 '철수'도 같은 라인에 오른다. 이 같은 유명세로 배수아는 올여름 뉴욕 펜대회 초청으로 미국을 다녀오기도 했다.

"프랑스나 독일만 해도 문화적 의미를 배려하지만 영미권에서는 이득이 나지 않는 출판을 꺼리는 명백한 경향이 있습니다. 우선 출판사가 출판 의지를 가지도록 만들어야 하고 당연히 독자들의 환호가 필요한 거지요. 이를 위해서 한국의 순문학 작가들이 경계를 뛰어넘어 장르문학의 기술을 과감하게 수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김 원장은 최근 '문학사상' 9월호 '세계문학 속 한국문학 전망과 과제'라는 특집에 기고한 글을 통해 "한국은 추리소설 전통이 약해서 세계로 내보낼 만한 적당한 작품을 찾기 어렵다"면서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의 순수문학 작가들이 추리소설 기법을 차용한 작품을 쓰는 것인데, 그것은 결코 현실과의 타협이 아니라 현명한 세계화 전략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김 원장의 이 같은 주장은 한국 문단에서 이제는 통용될 만도 한 시점이다. 그동안 미학적 순수문학에 길들여온 작가들 입장에서는 '몸을 파는' 것 같은 낯선 배반감에 시달릴지 모르지만 경계를 허물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포스트모던'의 본질 앞에서 자세를 가다듬을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사실 이즈음 한국 젊은 작가들 소설에서는 장르문학적 특성을 따로 구분해내는 일 자체가 부질없는 면도 있다.

김성곤 한국문학번역원 원장. 그는 "경계를 허물고 다양한 매체와 융화되는 문학의 자세가 필요한 시점"이라면서 "좋은 작품이 우선이지만 좋은 번역과 출판이 병행되지 않으면 해외에서 한국문학은 각광받기 힘들다"고 말한다.남정탁 기자

김 원장은 인문학 위기 국면에 대응하는 세 가지 어리석은 태도를 적시했다. 하나는 그냥 '이대로 살다 죽겠다'는 태도이고, 또 하나는 '위기라는 건 강조하지만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하는 상태', 나머지 하나는 '적개심을 가지고 십자군 정신으로 다른 장르와 싸우려는 태도'라는 것이다. 그는 한 원로 문인의 "영화 때문에 소설을 읽지 않으니 영화 안 보기 운동이라도 펼쳐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개탄했다고 한다.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이 고전 속에 갇혀 있다가 영화 덕분에 떠서 번역가가 부자가 됐다고 한다. 평론가 요하임 패히는 "영화는 책의 적이 아니라 마치 잠자는 공주를 깨우는 왕자와 같아서 아무도 안 읽는 문학 작품을 깨워서 읽힌다"고 했다는 대목도 김 원장은 언급했다. 그는 "이른바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은 '미녀와 야수' 같다"면서 "거대한 영화와 인터넷 시장으로 상징되는 야수에 잡힌 순수문학이라는 미녀는 결혼을 통해 미남 왕자도 얻고 성주가 됐다"고 비유했다. 경계를 뛰어넘고 담을 허물지 않는 한 활자 매체의 예정된 죽음 앞에서 문학이 야수의 성을 탈출할 가능성은 없다는 말이다.

"예전에는 지식과 정보를 얻는 게 주로 책이었지만 지금은 엄청난 다매체 시대입니다. 할아버지 세대에서 손자로 세월이 흐르듯 서서히 진행될 뿐이지, 활자매체의 소멸은 어쩔 수 없는 현실입니다. 다른 매체와 손을 잡고 다시 한 번 경계를 넘어야 문학은 생존하고 융성할 수 있습니다."

김 원장은 미군정청 통역관으로 일했던 부친이 서재에 꽂아둔 책들에 영향을 받아 문학과 외국어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만화도 좋아했고, 중학교 시절에는 세계문학을 섭렵하는 건 물론 영어판 '앵무새 죽이기'에 깊은 감명을 받으며 자연스레 문학에 빠져들었다. 대학신문에 '방화(放火)'라는 단편소설이 당선되기도 했다. 영화에도 빠져들어 문학평론가의 영화 읽기로 교과서에까지 소개될 정도로 각광을 받았다. 그는 골프나 음주를 삼가는 대신 그 시간에 집에 들어가 영화관처럼 꾸며놓은 스크린을 앞에 두고 빽빽한 DVD '서가'에서 뽑아낸 영화를 보는 게 낙이라고 했다. 이론을 공부하면서 창작으로부터 멀어졌다는 그는 올여름 30여년 대학 교수를 마감하고, 본격적으로 소설 창작에 매진할 뜻도 분명히 밝혔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나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 같은 작품을 쓰고 싶습니다. 추리기법을 동원하되 다양한 지식을 공유함으로써 지금 세계 지성과 독자들이 원하는 코드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어떻게 쓰면 해외 독자들과 소통할지는 분명히 알 것 같습니다."

소설가 김성곤도 기대되지만 한국문학번역원장의 짧은 소임도 아쉽긴 하다. 그는 한국문학번역원장 일이야말로 30여년 동안 축적해온 비교문학과 영문학, 포스트모더니즘과 해외 인맥 쌓기의 결실인 셈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마따나 한국문학번역원은 이제 도약할 시점이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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