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님과 영감님이 만났다

2014. 9. 12.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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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대화는 거침이 없었다. 두산그룹 박용만 회장은 조영남을 '영감님'이라 불렀고, 조영남은 고향 후배 대하듯 박 회장에게 툭툭 농담을 던졌다. 올해로 칠순인 조영남과 예순인 박용만 회장. '절친'의 만남에 기자가 동행했다.

지난 8월 12일,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조영남의 <왕따 현대미술> 전시회에서 낯익은 얼굴을 만났다. 두산그룹 박용만 회장이다. 그는 오후 7시쯤, "영감님(그는 조영남을 '영감님'이라고 불렀다), 저 왔습니다" 하며 성큼성큼 전시장에 들어왔다. 넥타이를 매지 않은 정장 차림의 그는 수행비서도 없이 혼자였다. "영감님이 또 전시회를 여셨어, 바빠 죽겠구먼."(박 회장) 때마침 라디오 생방송을 마치고 방송인 최유라와 함께 전시장에 있던 조영남이 그를 맞았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가 싶더니 박 회장이 조영남을 향해 돌직구 멘트를 날린다. "영감님, 오늘 보니 눈이 왜 이래? 쌍꺼풀 수술했어? 언제?"(박 회장) "몇 달 전에 했지. 아주 센세이셔널했어. 성공했다고!"(조영남) 두 사람의 거침없는 대화다. 이른바 '돌직구'를 날리는 막역한 사이인 것. 박 회장은 두산그룹 초대회장인 고 박두병 회장의 다섯 번째 아들로, 넷째 형인 박용현 현 서울대학교 이사장에 이어 2012년 두산그룹의 회장직을 맡았다. 두산그룹은 우리나라 재벌 기업 중 '형제 경영' 원칙을 고수하는 이례적인 회사다. 박 회장은 작년부터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직도 겸임하고 있다. 그런 그가 전시장에 나타나니 사람들이 하나둘씩 다가가 인사를 건넨다. 그러자 박 회장은 주머니를 뒤지더니 명함 뭉치를 꺼내 한 장씩 돌리며 말한다.

"요즘은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 명함 돌리는 게 일이에요. 나 같은 사람을 알아봐주니 감사하죠. 평생 그래본 적이 없구먼."(박 회장) 회장님답지 않은 소탈한 면모는 인간관계만 봐도 알 수 있다. 박 회장은 다양한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를 따르는 트위터 팔로어만도 17만 명에 육박할 정도. 지난 6월 둘째 아들 재원씨의 결혼식에도 각계각층의 인사를 하객으로 초대했다. 당시 재계 인사는 물론이고 유명 연예인들도 결혼식에 참석했다. 피아니스트 노영심은 명동성당에서 열린 '음악 혼배 미사'를 진두지휘했고, 방송인 김제동과 방송 기자 김주하, 배우 이윤지·황신혜를 비롯한 유명인이 참석해 결혼을 축하했다. 박 회장은 자신의 단골집으로 알려진 부암동의 치킨집 사장님도 하객으로 초대하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물론 이 자리에 조영남과 최유라도 참석해 박 회장 일가와 환담을 나누는 모습이 <우먼센스> 카메라에 포착되기도 했다. 두 사람의 인연은 몇 해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평소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알려진 박 회장은 같은 성당의 신도 최유라와 친분이 있었는데, 그녀가 <지금은 라디오 시대>에서 함께 호흡을 맞추는 조영남을 박 회장에게 소개하면서 서로를 알게 됐다. 평소 파워 트위터리안으로 알려진 박 회장은 지난 2011년 4월경 조영남의 사진을 트위터에 올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당시 조영남은 패션지 <보그>의 화보 촬영을 하는 중이었고, 그 잡지의 발행인인 박 회장이 지나가는 길에 이 장면을 포착하고는 트위터에 이를 공개한 것. 커다란 화투 패를 배경으로 금방이라도 웃음을 터뜨릴 듯한 표정과 다소 어정쩡한 포즈를 취한 조영남의 사진에 박 회장은 "웃음을 멈출 수가 없네요. 담 달 <보그> 화보 속 주인공 조영남 형님 ㅋㅋ"이라는 멘션을 올렸다. "영감님 전시는 안 오려야 안 올 수가 있나요? 형님이랑 제가 잘 통하는지는 모르겠는데 친한 건 사실이에요. 사실 개인적으로 전 영남이 형이 그리는 화투장을 그리 '애정하지는' 않습니다만. 하하."(박 회장)

이번에 열린 조영남의 전시에 두산그룹은 후원사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박 회장은 현재 예술의전당의 임원이자 국립오페라단의 후원회장직을 맡고 있으며, 2012년부터는 명동 정동극장 이사장으로도 활동 중이다. 이렇듯 문화·예술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 문화 전반에 조예가 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절친' 조영남의 전시장을 찬찬히 둘러보며 작품을 하나하나 감상했다. "오, 이 그림은 대학 때 그린 거라서 그런지 상당히 깔끔하네. 저 그림은 굉장히 여자 감성으로 그린 것 같고요."(박 회장)"생각해보면 난 대학 때 그림을 최고로 잘 그렸던 것 같아. 그래서 저 그림은 수억원을 준다고 해도 안 팔아."(조영남)"영감님, 걱정 마슈. 억대를 준다는 사람이 글쎄, 있을까요?"(박 회장) 분위기는 화기애애하다. 박 회장이 다시 멈춰 선 곳은 화투의 광 패 다섯 장과 '킹'이 그려진 카드 네 장을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들의 사진과 절묘하게 콜라주한 작품이었다. "아니, 형님, 이건 매치가 잘못된 것 같아."(박 회장)"오오, 그래? 매치가 안 되면 성공한 거야. 그게 콘셉트거든."(조영남)박 회장은 전두환 전 대통령을 가리키며 "누가 봐도 이분은 달광이랑 어울리는 것 같은데?"하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박 회장은 평소 두산그룹 임직원들에게도 종종 유쾌한 장난을 치는 친근한 회장님으로 유명하다. 지난 만우절 아침에는 홍보실 직원에게 "어떻게 그딴 신문에 그런 기사가 나지?"라는 문자를 보내 직원들의 진땀을 빼기도 했다. 몇 분 뒤 "일면에 났잖아! 만우일보"라고 답했다고. 특유의 유머러스한 성격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박 회장이 전시장을 돌아보다 또 한 번 멈춰 선 곳은 조영남의 신작 '태극기' 앞. 두 개의 작품을 붙여두어야만 하나의 태극기가 완성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이 마음에 들어요. 꼭 화합하지 못하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나타낸 것 같아서요. 며칠 후면 교황님이 이 나누어진 것을 하나로 붙이러 오시는 거잖아요. 그나저나 영감님, 태극 문양 가장자리의 괘는 다 맞게 그렸어요?"(박 회장)

"그릴 때 그거 하나 생각 안 했겠수? 이 몸이 다 확인하고 그렸지. 그나저나 그 교황은 정말 기가 막혀. 어쩜 그렇게 존경받을 행동을 하는 거야? 정말 대단한 거 같아."(조영남) "거 참, 교황이 뭡니까 교황이. 교황님이시지. '교황님'이 기가 막힌다고 해야죠."(박 회장)잘 알려진 것처럼 박 회장은 재계 인사 중 가장 유명한 천주교 신자다. 두산그룹은 창업주 시절부터 독실한 천주교 집안으로 유명한데, 박 회장은 어릴 적부터 할머니 손을 잡고 성당에 다녔다. 작년 12월엔 총 5회에 걸쳐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발행하는 <서울주보>에 칼럼을 연재하기도 했는데, 그의 진솔한 모습이 엿보이는 대목이 화제가 됐다.

"어릴 적 할머니께서 가끔 점을 보고 오시곤 했습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셨는데도 미래에 대한 불안은 어쩔 수 없으셨나 봅니다. (중략) '앞으로 두 달 동안 절대 문지방을 밟지 말아야 다음 시험을 잘 본다'라는 말을 들은 날은 문지방에 누워서 한 시간을 버틴 적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 방식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 시험을 잘 보려고 몇 날 밤을 새우며 고생을 하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기겁을 하던 할머니께서 그 덕에 오히려 점쟁이가 말한 기간 동안 마음 편하게 지내셨지요."(2013년 12월 1일 자 <서울주보> 칼럼 중) 이 밖에 어린 시절 아버지 고 박두병 회장에 대한 추억과 애주가였던 그가 술을 끊게 된 사연 등도 함께 공개해 화제가 됐다.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회사를 경영하는 일도 요즘같이 격변하는 시대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과 우려가 늘 가슴 한구석에 있습니다. 사업가로서 가지는 당연한 스트레스의 원인이기도 하지요. 이렇게 크고 작은 불안이 마음에 생겨 앞일이 궁금할 때 저는 조용히 기도를 합니다. '하느님, 제 앞날의 일을 다 알고 계시지요? 따로 여쭤보지 않고 그냥 하던 대로 열심히 살면 되는 거지요?'"

그가 쓴 칼럼의 한 구절이다. 사업가로서 미래가 걱정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터. 그런 그에게 신앙은 든든한 버팀목이다. 박 회장은 이번 교황 방한을 위해서도 후원금 10억원을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에게 전달했다. 교황이 한국에 와서 대립이 아닌 평화의 메시지를 전해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그의 바람이었다. 지난 7월 명동성당에서 열린 방한 축하 음악회에도 둘째 아들과 함께 참석해 맨 앞자리에서 끝까지 공연을 함께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교황의 방한을 누구보다 기다리고 있을 박 회장에게 신앙생활에 대해 물었다. "저라고 뭐 특별할 게 있나요? 그냥 평범한 신도 중 한 사람이죠. 저는 그저 미사가 있다고 하면 일찍 가서 줄을 서는 한 사람일 뿐이에요. 8월 16일 시복식에는 당연히 가죠. 30만 명이 모여서 교황님을 뵙는 그 자리에 제가 안 가겠어요? 사람이 많이 몰릴 것 같아 저는 새벽 4시쯤 들어갈 생각이에요."(박 회장)

그는 자신은 그저 평신도일 뿐 교황의 방한에 대해 입장을 밝힐 만한 위치가 아니라며 짐짓 손사래를 쳤다. 그러면서도 "내가 천주교 신자라서가 아니라, 교황님이 오시는 일은 정말 귀한 일"이라고 말했다. "이번 방한을 계기로 사람들이 옆 사람 손을 더 잡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옆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든 가리지 않고요. 그게 교황님이 전하시고자 하는 메시지라고 생각해요. 내 곁에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어 잡는 것. 그게 평화고, 또 나눔 아닐까요?"(박 회장)인터뷰를 끝낸 박 회장은 그의 '절친'들과 함께 자신이 트위터에서도 추천한 적 있는 '맛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며칠 뒤, 박 회장의 트위터에는 한 장의 사진이 올라왔다. 교황의 시복미사가 열리기로 한 날 새벽에 올린 광화문 광장의 사진이었다. '옆에 있는 사람의 손을 잡으라'는 교황의 메시지를 이미 박 회장은 실천 중이다.

취재_정희순 기자 | 사진_김승환, 오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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