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채증' 남발하는 경찰, 시민을 잠재적 범죄자 취급.. 정부 비판 차단용 무기로

박홍두 기자 입력 2014. 9. 1. 06:01 수정 2014. 9. 1.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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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비 규정도 불명확.. 교통용 CCTV도 집회 촬영 이용
채증당한 사람 삭제 요구 권리 없어 개인정보 보호 취약

지난 30일 오후 7시쯤 서울 경복궁역 사거리 인도를 경찰 100여명이 틀어막았다. 길가던 시민들이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 "왜 막는 거죠? 집에 가야 하는데…." 어느 경찰관도 이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10분 넘게 경찰이 길을 막자 한 시민이 "이 동네 사는 사람인데 왜 못 가게 막느냐"고 따졌다. 항의 소리에 경찰 사이에서 막대 봉들이 올라왔다. 채증 카메라를 매단 봉이었다.

경찰의 채증은 2010년 2329건에서 2013년 5366건으로 2배가량 늘었다. 올해 7월 말까지 2568건을 채증했다. 정권 비판 집회에선 어김없이 채증 카메라가 대거 등장한다. 카메라들은 세월호 참사 가족 농성과 일반 시민 추모 집회도 바삐 쫓는다. 이 과정에서 불법 행위를 하지 않은 집회 참가자들과 시민도 채증 대상이 되고 만다. 카메라는 시민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몰아간다. 지난달 23일 청와대 인근 골목에서 갓난아이를 안고 친정으로 가려던 주부 ㄱ씨는 길을 막는 경찰에 항의하다 채증 카메라가 자신을 찍는 것을 보고 다른 길로 갔다. ㄱ씨는 "범죄자가 된 것 같아 너무 무서웠다. 아이가 놀라 다른 길로 돌아갔다"고 말했다.

경찰이 지난 1월 서울 중구 민주노총 사무실 앞에서 자진출석 의사를 밝힌 김명환 철도노조 위원장과 대치하는 동안 채증팀 요원들이 긴 막대에 고정한 카메라로 현장 상황을 녹화·촬영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채증 카메라의 실체는 '무법 카메라'다. 관련 법률은 없고, 경찰 내 예규인 '채증활동규칙'만 있을 뿐이다.

경찰청 정보국은 채증의 법률적 근거로서 3가지 법 조항을 든다. 경찰법 3조의 '범죄의 예방·진압 및 수사, 치안정보의 수집'과 경찰관직무집행법 2조의 '범죄의 예방·진압 및 수사, 기타 공공의 안녕과 질서유지', 형사소송법 196조의 '사법경찰관은 범죄의 혐의가 있다고 인식하는 때에는 범인·범죄사실과 증거에 관해 수사를 개시·진행해야 한다'이다. 이들 법 조항 어디에도 채증이라는 단어를 직접 언급하지 않는다.

채증 장비 규정도 명확히 없다 보니 교통체증상황을 점검하는 폐쇄회로(CC) TV도 집회 채증에 이용된다. 대법원 판례는 채증 활동을 '명확히 불법 상황이 있을 때'로 한정하지만, 경찰은 이 판례를 어기며 채증을 이어가고 있다.

채증당한 사람이 채증 자료를 열람하거나 정정·삭제할 수 있는 권리도 규정에 없다. 채증활동규칙에는 '채증 자료가 수사 등 목적을 달성한 경우에는 지체 없이 폐기하여야 한다'고 돼 있지만, 누가 언제 어떻게 폐기했는지 알 길이 없다. 경찰은 시민사회와 국회의 채증 정보 공개 요청에 '개인정보'라는 이유를 들어 거부한다. "관련 전문가의 감독을 받으라"는 국가인권위 권고에도 응하지 않고 있다.

채증 통계도 축소했을 개연성이 높다. 경찰은 세월호 참사 이후 관련 집회에서 219건을 채증했다고 밝혔지만, 한 곳의 집회 현장에서 채증 카메라는 수십대가 등장한다. 일단 찍고 나서 수사 기록 작성에 필요한 채증 건수만 기재할 가능성이 높다. 나머지 영상 폐기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채증은 박근혜 정부의 집회·시위 엄단 기조와 맞물려 급증하는 추세다. 세월호 집회 등에서 집회·시위를 억압해온 강신명 서울청장이 최근 경찰청장에 부임하면서 우려도 커진다. 박경신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차벽과 경찰관의 인의 장막으로 길을 막은 뒤 들이대는 채증 카메라는 정권에 비판적인 목소리에 '가만히 있으라'고 억압하는 도구"라고 말했다.

<박홍두 기자 ph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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