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져가는 관동조선인대학살..갈 곳 잃은 '절규'

입력 2014. 8. 31. 07:14 수정 2014. 8. 31.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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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 제사 지낸 유족 "죽기 전에 일본의 사과 받았으면"

반세기 제사 지낸 유족 "죽기 전에 일본의 사과 받았으면"

(제주=연합뉴스) 변지철 기자 = "일본 군인들에 의해 그렇게도 끔찍하게 희생당한 억울한 영혼이 의지할 곳 없는 낯선 이국 일본땅에서 구천을 헤맬 것을 생각하면…"

국내에서 처음으로 확인된 관동조선인대학살 희생자 유족 조팔만(87)씨와 그의 아내 이신생(82·여)씨는 끝내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훔쳤다.

조씨는 지난 1923년 9월 일어난 관동(關東·간토) 조선인 대학살 때 도쿄 고토(江東)구 가메이도(龜戶) 경찰서에서 희생당한 제주도 대정읍 인성리 출신의 조묘송(趙卯松·1891∼1923·당시 32세)씨의 양자(養子)다.

학살 사건 당시 일가족 모두가 희생됐기 때문에 이후 가장 가까운 친척인 조팔만씨가 조씨의 양자로 들어가 50년 가까이 희생자들의 제사를 지내온 것이다.

가메이도 경찰서 학살은 관동대지진이 발생한 다음 날인 1923년 9월 2일부터 이틀간 이어진 끔찍한 학살이었다.

규모 7.9의 대지진이 전날 오전 도쿄를 비롯한 일본 관동지방을 강타하자 다음날부터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폭동을 일으키고 있다, 폭탄을 소지하고 방화를 한다'는 괴소문이 나돌았고 일본은 즉각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때부터 일본 곳곳에서 조선인을 상대로 한 끔찍한 학살이 자행됐다.

당시 가메이도 경찰서에는 300여 명의 조선인이 격리 수용됐는데 일본 내 사회주의자 척결에 나섰던 일본군 기병 1개 중대가 경찰서를 덮쳐 조선인을 무차별 학살했다.

'재일본 관동지방 이재(罹災)동포 위문반'을 만들어 관동 조선인 학살 희생자 실태를 조사했던 최승만씨가 목격자 나환산(羅丸山·조선인 추정)씨로부터 전해 들은 기록에 따르면 일본군은 사건 당일 오후 경찰서 연무장으로 들어가 조선인을 세 명씩 불러내 입구에서 총살하기 시작했다. 총소리 때문에 인근 사람들이 두려워할까 봐 우려한 지휘관이 총 대신 칼로 죽이라고 명령했고 군인들이 일제히 칼을 빼 나머지 83명을 한꺼번에 죽였다.

당시 임신한 여성도 한 명 있었는데 일본군이 부인의 배를 갈라 아기까지 처참하게 죽였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연합뉴스가 목격 증언 기록 등을 토대로 당시 학살된 희생자들을 추적한 결과 제주도 대정읍 인성리 출신의 조묘송과 그의 동생 조정소(趙正昭·1900∼1923·23세)·조정화(趙正化·1904∼1923·19세), 아내 문무연(文戊連·1885∼1923·38세), 아들 조태석(趙泰錫·1919∼1923·4세) 등 일가족 5명이 가메이도 경찰서에서 몰살된 것으로 드러났다.

일가족 모두가 희생돼 집안의 대가 끊기자 10여 년간 부모와 오빠, 동생들의 제사를 지내지 못했던 제주에 남은 조묘송의 여동생들은 가장 가까운 친척인 조팔만씨의 아버지에게 팔만씨를 양자로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당시 조팔만씨의 나이 13세였다.

그러나 팔만씨의 아버지는 요청을 거절했다.

가정형편이 완전히 기운 친척 집에 어린 팔만씨를 양자로 보낼 수는 없었다. 팔만씨를 양자로 보내면 앞으로 힘들게 살아갈 것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조묘생의 여동생 4명 중 홀로 살아남은 조술생씨는 1958년 12월 어른이 된 조팔만씨를 다시 찾아갔다.

그녀는 팔만씨에게 양자로 들어와 30년 넘게 구천에서 맴돌며 쉴 곳을 찾지 못하고 떠돌아다닐 오빠들의 제사를 맡아줄 것을 눈물로 호소했다.

팔만씨와 그의 아내 신생씨는 두 번이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이후 아들 역할을 맡아 2008년까지 50년 가까이 제사를 지냈다.

집안 사정이 넉넉지 못한 상황에서 해마다 돌아오는 제사와 명절을 챙기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때로는 간소하게, 때로는 빚을 져서라도 제사를 지냈다.

지금은 지제(止祭·기일에 지내는 제사와 차례를 중지하는 것)를 한 상태다.

조팔만씨는 "91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났다. 억울하게 희생당한 영혼들의 넋을 위해서라도 관동조선인 대학살에 대한 진상 규명이 하루빨리 이뤄져야 한다"며 "앞으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죽기 전에 일본의 사과를 받고 해원이 이뤄지길 바란다"고 호소했다.

그는 "후손의 도리로써 일본에 가 희생된 현장을 둘러보고 국화꽃 한송이라도 바치고 싶다"며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다.

그의 아들 영균씨는 "일부 시민단체와 언론에 의해 관동조선인학살에 대한 조명이 이뤄지고 있지만 아직도 국민들이 이 문제를 자세히 알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며 1세기가 지나기 전에 국가 차원의 진상 규명이 먼저 이뤄지길 바랐다.

bjc@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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