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도 밤섬, 한때 누군가의 집터였다
밤섬은 서울 영등포구와 마포구 사이 한강에 떠 있는 무인도다. 수십년간 외부에서의 접근이 차단돼 원시림 같은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2009년 무인도에 표류한 남자 이야기를 담은 영화 '김씨표류기'의 촬영지로 유명해졌지만 이곳이 한때 누군가의 집이었다는 걸 아는 이들은 생각처럼 많지 않다.
29일 밤섬을 찾은 유덕문(75) 할아버지는 음미하듯 천천히 땅을 밟으며 기억을 더듬었다. 유 할아버지는 태어나서 스물일곱 살까지 이곳에 살았다. 서울시 마포구 율도동(栗島洞) 60번지. 당시 밤섬의 행정 주소다. 유 할아버지는 친구들과 물놀이 하던 곳, 낚시하던 곳 등을 가리키며 흐릿해진 추억을 되새겼다.
그는 "밤섬은 당시에도 외딴섬이었어. 문명의 이기를 보지도 느끼지도 못했지"라며 40년 전 밤섬의 모습을 설명했다. 전기가 없어 호롱불을 켰고, 수돗물이 없어 한강 물을 마셨다. 그러나 동네에 서로 모르는 이웃이 없을 만큼 가깝게 지냈다고 했다.
유 할아버지는 이런 고향을 지근거리에 두고도 마음대로 갈 수 없다. 밤섬이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되며 일반인 출입이 금지됐기 때문이다. 이날은 추석을 앞두고 밤섬 실향민들에게 1년에 딱 하루, 밤섬의 문이 열리는 날이었다.
1968년 여의도 개발 당시 정부는 필요한 잡석 채취를 위해 밤섬 주민들을 이주시킨 뒤 섬을 폭파했다. 율도동이라는 명칭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당시 밤섬에 살던 442명은 고향을 떠나 마포구 창전동 와우산 기슭으로 이주했다.
섬은 폭파 후 수십년간 자생적으로 생태계를 유지하며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유 할아버지는 멀리 신촌 방향을 바라보더니 바닥을 가리키며 "이쯤이 예전 우리 집이 있던 곳일 거야"라고 말했다. 그의 눈시울이 잠시 붉어졌다. 지금은 어른 키만 한 갈대와 수풀로 뒤덮여 예전의 집터는 완전히 사라졌다. 유 할아버지는 "이젠 같이 올 친구도 많지 않다"며 고개를 떨궜다. 그는 "지금은 당시 이주민 중 40∼50명만 생존해 있는 것으로 안다"고 했다.
주민들이 떠난 지금의 밤섬은 사람 대신 철새의 쉼터로 변모했다. 2012년 람사르 습지로 지정되기도 했다.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도심 습지로 인정받은 것이다. 사라진 섬 주변으로 퇴적물이 쌓이면서 지금의 밤섬을 이뤘고 면적도 서울광장의 21배에 달할 정도로 커졌다. 서울시는 밤섬 면적이 1966년 미군이 최초로 측정했던 4만5684㎡에서 매년 평균 4400㎡씩 증가해 현재 27만9531㎡(외곽길이 2895m)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유 할아버지는 "람사르 습지로 지정되기까지 했으니 내 고향인 밤섬을 좀더 신경 써서 보호해줬으면 좋겠다"며 "가슴 속에 늘 존재하는 마음의 고향을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마지막 말이 아닐까 한다"고 말했다.
황인호 기자 inhovator@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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