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거슨시 '민권법 황무지'..흑인차별은 일상이었다

2014. 8. 21.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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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미 퍼거슨시 현장 르포 '흑인 사망' 시위 확산]

시위 지역은 흑인분리의 중심지

백인 거주지에 흑인 늘자 갈등

잠재됐던 분노 표출된 것

경찰들 이유없이 불심검문경미한 사안에도 불러세워'인종차별 금지법' 50돌의 현주소

20일(현지시각) 오후 5시 미국 미주리주 퍼거슨시 흑인 시위의 주무대인 웨스트 플로리산트 거리 초입에 들어서자 군용 지프인 험비가 막아섰다. 얼룩무늬 군복을 입은 군인들은 도보 이동자의 출입은 허용했지만 차량에 대해서는 운전자의 신분을 일일이 확인하면서 진입을 막았다. 시위 진압에는 직접 나서지는 않지만, 반경 1㎞의 경계선을 쳐 경찰 지휘부를 보호하고 있었다.

18살 흑인 소년이 백인 경찰의 총격으로 사망한 데 반발한 흑인들의 시위가 갈수록 격화하자, 지난 18일 제이 닉슨 미주리주 주지사가 주방위군 투입을 결정했을 때 미국 내에서는 적지 않은 파장이 일었다. 주방위군이 1960년대 베트남전 반대 시위와 흑인들의 민권 운동을 무자비하게 강제 진압한 역사의 기억이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주요 언론들은 반세기 전 이들의 진압 장면을 보여주는 사진을 실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주지사의 결정을 존중하면서도 임무를 최소한으로 제한할 것을 주문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주방위군까지 투입할 수밖에 없었던 이번 사태는 올해가 인종차별을 금지한 미국 민권법 제정 50돌을 맞은 해여서 더더욱 흑인들에게는 고통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아울러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 행태가 얼마나 강고하게 사라지지 않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민권법은 1950~60년대 흑인들의 치열한 민권운동의 결과로 1964년 7월 발효됐다. 이 법은 학교·영화관·식당·버스 등 공공장소에서 인종 분리를 금지하고, 경찰력 집행과 투표권 행사, 고용 등에서도 차별을 금지했다. 19세기의 유산인 짐 크로우법(인종 분리법)을 폐기한 기념비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20일 퍼거슨시에서 만난 주민들은 이번 사건이 우연히 일어난 게 아니라고 했다. 그동안 잠재됐던 분노에 흑인 소년 마이클 브라운의 죽음이 불을 붙였다는 것이다. 이곳 교회에서 청소년 캠프를 진행한다는 흑인 애덤 윌슨(28)은 "백인 경찰들은 흑인 청소년들을 아무런 이유없이 불심검문을 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며 "예컨대, 무단횡단 같은 경미한 사안에도 경찰들이 불러세우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흑인 앤서니 로스(26)는 "여기서 운전하다 경찰에 안 걸린 흑인은 아마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흑인들이 운전을 하면 경미한 잘못에도 차를 세우고 경찰들이 차량 구석구석을 수색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퍼거슨시의 경우 인구 구성을 감안하더라도 흑인이 불심검문을 당하는 경우가 백인보다 37%나 많았다.

브라운이 숨진 도로는 이런 사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듯했다. 브라운이 무단횡단을 하다 숨진 도로는 매우 비좁은 2차선 도로였다. 도로 양쪽에는 연립주택 단지가 형성돼 있어 주민들이 자연스럽게 무단횡단을 하고 있었다. 주변엔 횡단보도도 눈에 띄지 않았다. 브라운은 이 연립주택에 있는 할머니 집에 가는 중이었다. 집 앞에 있는 간이도로를 걷다가 백인 경찰의 단속에 걸려 다투다 총에 맞아 사망했다. 아직 수사 결과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흑인에 대한 경찰 단속의 '일상화'도 이번 사건에 일조를 한 것으로 보인다.

경찰 단속의 일상화는 반세기 전에 폐지된 '인종 분리법'과 맞닿아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흑인들이 이 지역에서 사는 것을 불편하게 만들어 흑인들의 추가 유입을 막거나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도록 압박하려 한다는 것이다. 20년 이상 이곳에서 미용재료상을 해온 재미동포 이수룡(47)씨는 "이곳은 흑인 동네치고는 상대적으로 살기가 좋은 곳이어서 세인트루이스 동부 등 흑인 빈민지역에서 이사오려는 사람이 많다"며 "경찰이 대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흑인들이 살기 불편하게 하려는 목적도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퍼거슨시가 속한 세인트루이스 카운티는 2000년 이후 흑인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외곽으로 이사를 가는 백인들이 많아졌다. 미주리주 정부 통계를 보면, 이 카운티는 1980년대만 해도 백인 인구가 80%를 넘었으나 지금은 30% 수준으로 줄었다. 퍼거슨시의 경우 백인 인구는 2000년 42%에서 지난해 21%로 줄어든 반면 흑인 인구는 같은 기간 54%에서 75%로 증가했다. 이곳은 주변에 보잉사의 공장 등 제조업체들이 많이 있어 흑인들의 유입이 계속되고 있다.

이런 인구 구성 변화는 학교들에도 영향을 미쳤다. 백인들이 외곽으로 나가면서 시내 학교들은 사실상 '흑인 학교'들로 바뀌고 있다. 이에 따라 학교 재정이 악화해 인가가 취소되는 경우도 속출하고 있다. 브라운이 다녔던 노르망디 고교도 몇년 전 인가가 취소됐다. 그래서 교육열이 있는 흑인 부모들은 아이들을 외곽의 백인 동네에 있는 학교로 보내려 하지만 무언의 압력을 받는다는 게 이곳 주민들의 얘기다. 퍼거슨시는 흑인 동네와 백인 동네가 만나는 경계선상에 있어 흑백 갈등이 더 첨예했던 것으로 보인다.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워싱턴대학의 클래시사 헤이워드 교수(정치학)는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에 "1916년에 인종 분리법을 만든 것을 비롯해 세인트루이스 지역은 100년간 인종 분리의 극단적 사례였다"며 "이 지역의 정치와 관행이 이번 사건을 일으킨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에릭 홀더 미 법무장관은 사건 수사 초기단계임에도 20일 이례적으로 퍼거슨시를 직접 방문했다. 그만큼 인종 갈등의 폭발력이 크다는 점을 의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행보다. 흑인인 홀더 장관은 이날 50여명의 지역 지도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흑인들이 경찰을 불신하는 이유를 이해한다"며 자신이 겪은 사례들을 열거해 눈길을 끌었다. 그는 과거에 도로에서 속도 위반에 걸린 뒤 트렁크와 좌석 밑까지 검문을 당했다며 "얼마나 모욕적이고 분노가 치밀었는지를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퍼거슨/박현 특파원 hy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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