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약창 주변주민 50년 불만 '폭발'

최병태 기자 2014. 7. 26.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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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에 여의도 45배나 되는 땅 군사시설보호구역으로 묶여 재산권 행사 못해

충청남도 천안시. 하늘 아래 편안한 곳이라 해서 천안(天安)이라는 땅이름이 붙여졌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계 바늘을 약 50년 이전으로 돌려놓고 보면 천안이라는 동네가 그때부터 결코 편안한 세월을 보냈다고 보기는 어려울 성싶다. 바로 탄약창 탓이다.

탄약창이라는 게 유사시나 예기치 않은 사고로 탄약이 폭발이라도 하면 필연적으로 엄청난 피해를 불러올 수밖에 없는 위험 시설물이기 때문이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데 마음이 편안할 리 없다.

천안에 육군 제3 탄약창이 터를 잡은 것은 1963년. 설치된 지 올해로 51년째다.

탄약창은 천안시 서북구 일대 753만㎡(약 228만평) 규모로 성환읍·직산읍·입장면 등 3개 읍·면에 걸쳐 있다. 탄약창 부지 외곽 경계선으로부터 1㎞ 약 1229만㎡(약 327만평)는 1976년부터 군사시설보호구역으로 묶여 있다.

1호선 수도권 전철을 타고 성환역에 내리자 겉으로 느껴지는 이 동네 분위기는 여느 시골과 다름 없이 고요했다. 거대한 위험 시설물을 품고 50년을 함께하고 있는 시골 동네라는 사실이 피부에 와닿지 않았다. 탄약창과 주민들이 묘하게도 오랜 기간 무덤덤하게 공존의 세월을 보내온 것일까?

3탄약창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남서울대학교. 지역 주민들은 군사시설보호구역 내에 대학이나 기업체 설립이 허가된 것은 재산권 행사에 큰 제약을 받고 있는 자신들과 비교했을 때 형평성이 안 맞는다고 주장한다. / 천안|최병태 선임기자

접경지역·서해5도 특별지원과 대조

그러나 최근 들어 이런 불편한 공존의 방정식이 깨지고 있다.

주민들이 탄약창으로 인한 피해를 더 이상 견뎌낼 수 없다고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탄약창 주변 군사시설보호구역을 축소하고 탄약창으로 인해 피해를 보고 있는 주민들에게 다양한 지원을 해달라는 것이다.

"머리에 50년째 포탄을 이고 살아왔습니다. 이제는 국가가 주민들의 불편과 불안을 조금이라도 줄여주기 위해 조금 물러설 때가 된 것 아닙니까?"

성환읍 토박이 강형철씨(60)는 "탄약창이라는 게 중요 국가 시설물이니 폐쇄나 이전까지는 바라지 않는다"면서 "앞으로라도 최소한 재산권 행사를 할 수 있게 국가가 나서야 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탄약창은 천안시 제3 탄약창을 포함해 전국에 9곳이 있다. 충남지역에 3·11 탄약창, 충북지역에 5·7·8 탄약창 등 충청지역에 5곳이 몰려 있다. 이밖에 대전·경북·전북·경남에 각각 1곳이 있다. 그만큼 충청지역 주민들이 다른 지역 주민들에 비해 탄약창에 대한 거부감이 클 수밖에 없다.

탄약창 보호와 유사시 주민 보호를 위해 지정된 군사시설보호구역 면적은 전부 128㎢(약 3879만평)다. 여의도 면적의 45배 크기다. 군사시설보호구역 내에 땅이나 가옥 등 시설물을 갖고 있는 주민들은 재산권 행사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러나 구역 내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정부로부터 아무런 지원이나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

군사분계선 이남 일정 구역은 '접경지역지원특별법'으로, 백령도 등은 '서해5도지원특별법'을 근거로 정부가 다양한 분야에 걸쳐 지자체와 주민들에게 지원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3탄약창 주변 주민들의 기억 속에는 탄약창 조성을 위해 자행된 국가 권력의 횡포가 또렷이 남아 있다. 성환읍에서 농사를 짓는 오경환씨(77)는 자신의 땅을 탄약창 조성 때 거의 빼앗기다시피 한 아픈 기억을 떠올렸다. 그는 1960년대 초 아산에서 이곳으로 이사와 지금까지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천안에 탄약창이 막 조성되던 때였다.

"군이 탄약창 부지 확보를 위해 땅을 사들이면서 3.3㎡당 70원도 안 되게 가져갔어요. 그것도 현금으로 준 게 아니라 10년 만기 채권으로 말입니다. 발악을 해서 일부를 보존하기는 했지만 이후 군사시설보호구역으로 묶이다 보니 땅값이 똥값이 됐습니다. 은행은 땅을 담보로 대출을 해주지도 않아요. 농사 짓기도 너무 불편하구요."

그는 "배를 따게 되면 과수원에 저장시설이 있어야 하는데, 창고 하나 짓지 못하게 하니 제 값을 못 받더라도 그때 그때 헐값에 내다팔 수밖에 없다"면서 "군사시설보호구역을 아예 없애야 한다"고 말했다.

지역 주민들은 탄약창 주변 지역 주민들에게도 경기 평택시에 준하는 지원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성근 천안시 성환읍 대홍2구 이장이 3탄약창을 가리키고 있다. / 천안|최병태 선임기자

탄약창 주변지역 지원 법제화 촉구

강형철씨는 "이곳 탄약창은 주한미군 탄약도 많이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면서 "서울 용산에 주둔하던 미군부대가 평택으로 옮겨가는 데 정부는 특별법을 만들면서까지 엄청난 규모의 지원을 했다. 우리라고 지원을 못 받을 이유를 납득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3탄약청의 경우 군사시설보호구역 범위를 외곽 경계지역으로부터 1㎞에서 대폭 줄일 수 있는 나름대로의 근거도 제시했다.

"국회와 국방부 등을 통해 확인한 결과 국방부는 2011년 3탄약창 현대화 공사를 끝내고 2012년 탄약 재배치를 했다. 3탄약창의 주요 탄약이 지하에 보관되고 있는 만큼 군사시설보호구역을 현재처럼 1㎞로 할 이유가 없다."

들쭉날쭉하고 명쾌하지 못한 법 적용도 주민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주민들은 창고 하나 짓지도 못하는데, 납득할 수 없는 시설은 버젓이 들어선다는 불평이다. 이 중 대표적으로 꼽히는 것이 남서울대학교다. 남서울대학교는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에 있는 수도학원을 설립해 키운 이재식·공정자 부부가 학원사업을 하기 위해 설립한 학교다. 1993년 12월에 남서울산업대학교로 개교했다가 1998년에 현재 명칭으로 바뀌었다.

이성근 성환읍 대홍2구 이장은 "주민들은 지붕이 금방 허물어질 것 같아도 증·개축을 못하는 판에 탄약창 철책과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대학 건물은 어떻게 들어설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는 또 "군인들은 탄약창 영내는 물론 군사시설보호구역에 숙소를 짓고 있다"면서 "주민들이 그런 건축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라고 말했다.

군사시설보호구역 축소와 지원을 요구하는 주민들의 애타는 목소리는 아무런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국민권익위원회는 지역 주민들의 요구가 잇따르자 지난 1월 군사시설보호구역 1229만㎡ 중 약 3% 정도인 39만6000㎡는 해제하도록 하는 안을 지역 주민과 군부대에 제시했다.

그러나 지역 주민들은 권익위원회 제시안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 급기야 천안지역 주민 1200여명은 지난 21일 국회에 탄약창 주변 지역 지원 법제화를 촉구하는 주민청원서를 제출했다.

박완주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천안을)이 지난 3월 하순 대표 발의한 '탄약창 주변 지역 지원에 관한 법률안' 제정과 '군사기지 및 군사시설 보호법 일부 개정 법률안'이 아무런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는 데 대한 일종의 반발이다. 국회가 하루 빨리 법률 제·개정에 힘을 써달라는 것이다.

이 2개 법률 제·개정안은 박 의원을 비롯해 탄약창을 끼고 있는 다른 지역의 여야 의원 11명이 발의했다.

이 법안의 뼈대는 탄약창 주변 지역 개발과 주민 재산권 보호를 위해 국가 차원의 지원이 있어야 하고, 탄약창 주변 군사시설보호구역을 현행 1㎞에서 500m로 줄이는 것이다.

박완주 의원은 "정부가 안보를 특정지역 주민들의 일방적 희생으로 강요해서는 안 된다"면서 "박근혜 정부의 규제개혁 차원에서라도 50년 넘도록 피해를 본 탄약창 주변 주민 보호에 정부가 적극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 최병태 기자 cbtae@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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