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통곡할 때 .. 혼자 살려 도망치다 결국 백골로

정강현 2014. 7. 25. 0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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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병언 사망 - 100일 추적기정강현 기자의 스토리텔링 리포트목수 양회정을 운전사 삼아 순천행양씨가 만든 밀실서 검찰 따돌렸지만10억 돈가방 남긴 채 비극적 종말

빗물이 스며들자 우거진 수풀이 수런댔다. 수풀 한가운데 백골(白骨)이 된 노인이 누워 있었다. 비는 백골 위에 동그란 파문을 그리며 떨어졌다. 빗물을 받아 낸 백골이 천천히 썩어 들고 있었다. 6월 12일 오전 9시쯤이었다. 전남 순천경찰서에 신고 전화가 걸려 왔다. 순천시 학구리에 사는 일흔일곱 살 박씨 할아버지였다. "여기 학구리 야산인데 뼈만 남은 시체가 있당께!"

 학구리 야산으로 경찰 7명이 달려갔다. 시신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부패한 상태였다.

 "백발을 보니 노인인 것 같은데…. 행색이 딱 노숙자구먼. 일단 부검부터 해 보자고."

 백골이 된 노인은 그렇게 무연고 시신으로 처리됐다. 순천 경찰 누구도 '백골 노인'을 알아보지 못했다. 백골 옆의 가방도, 나무지팡이도 무심히 지나쳤다.

 '백골 노인'의 이름은 그로부터 40일이나 지나서야 세상에 알려졌다. 아해(兒孩) 유병언. 아해는 노인의 호였다. 올해로 일흔세 살인 노인은 'AHAE'라는 이름의 사진 작가로도 활동했다. 그 일만 아니었더라면, 그는 억만장자 출신 사진작가로 명성을 더 쌓았을지도 모른다. 정말이지 그 끔찍한 사고만 아니었다면….

 4월 16일 진도 앞 바다에서 세월호가 침몰하고 있을 때, 노인은 경기도 안성 금수원에 있었다. 그는 세월호를 운항한 청해진해운의 회장이었다. 기독교복음침례회(일명 구원파)를 이끄는 노인은 심각한 고민에 휩싸였다. 1990년대 초 자신을 감옥에 가둔 오대양 사건의 기억이 스쳐 갔다.

 세월호 침몰 나흘째. TV에선 계속해 세월호 관련 뉴스가 흘러나왔다.

 "아직도 세월호에서 살아 돌아오지 못한 승객은 269명에 이르며…."

 노인은 수사 당국이 결국 자신에게 세월호 사고에 대한 책임을 물을 거라고 판단했다. 이곳저곳에 은닉해 놓은 수천억원의 재산도 위태로워질 터였다. 노인은 금수원에서 가족회의를 열었고, 수사가 본격화되기 전에 온 가족이 도피하기로 결정했다.

 세월호 관련 뉴스에 그의 이름이 나란히 붙기 시작했다. '세월호'와 '유병언'은 연일 포털사이트 검색어 상위에 랭크됐다. 세월호 침몰 일주일 뒤인 같은 달 23일 노인은 금수원을 슬그머니 빠져나왔다. 사복 경찰 20~30명이 금수원 앞을 지켰지만 누구도 그를 보지 못했다. 검찰도 경찰도 눈치채지 못한 사이 그는 한 구원파 신도 집으로 숨어들었다.

 다음 날 노인은 자신이 마치 금수원에 있는 것처럼 세간의 시선을 어지럽혔다. 자신의 변호사를 통해 처음으로 메시지를 내놓았다.

 "유병언 회장은 법적·도의적 책임을 다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 재산 100억원을 내놓을 용의도 있습니다."

 그 시각 노인은 측근들과 도피 계획을 치밀하게 짜고 있었다. 측근들은 장기 도피를 준비했다. "순천이 제일 좋을 것 같습니다. 도와줄 사람을 물색하겠습니다."

 노인은 현금 20억원가량을 여행가방에 넣고 순천으로 떠났다. 얼굴은 변장을 한 채였다. 거리에 노란 리본을 매단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5월 2일. 실종자 74명이 여전히 침몰한 세월호에 갇혀 있었다.

 검찰은 특별수사본부를 차리고 노인을 압박했다. 큰딸 섬나는 프랑스에, 막내아들 혁기는 미국에 있으니 큰 위험은 없을 터였다. 문제는 노인 자신과 장남 대균이었다. 5월 13일 검찰은 먼저 대균을 소환했지만 나타나지 않았다. 검찰은 독이 오를 만큼 올랐다.

 "16일에 유 회장을 소환합니다. 응하지 않으면 곧바로 체포영장을 청구할 겁니다."

 노인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이때부터 검경의 지루한 검거작전이 이어졌다. 5월 21일 금수원에 대한 압수수색을 벌였지만 허탕이었다. 두 부자에 대한 공개 지명수배도 내려졌다. 아버지는 5억원, 아들은 1억원의 현상금이 내걸렸다.

 노인은 이미 순천으로 내려간 뒤였다. 목수인 구원파 신도 양회정을 운전기사로 데려갔다. 은신처는 '숲속의 추억'이라는 별장이었다. 양회정은 망치질을 해 가며 별장을 수리했다. 노인이 몸을 숨길 수 있도록 통나무 벽 뒤에 10㎡(약 3평) 크기의 밀실도 만들었다. 노인은 5월 하순께 이런 메모를 남겼다.

 "눈 감고 팔 벌려 요리조리 찾는다. 기나긴 여름 향한 술래잡기가 시작됐다."

 한여름 술래잡기에 연인원으로 145만 명의 수사인력이 동원됐다. 운명의 날은 5월 25일이었다. 검찰 수사팀은 노인이 은신하고 있는 순천 별장에 나타났다. 별장에는 구원파 여신도 신씨가 있었다. 신씨는 검찰 수사관들을 향해 영어를 써 가며 격렬히 저항했다. 이때 노인은 운전기사 양씨가 만들어 놓은 밀실에 숨어 있었다. 수사관들은 별장 곳곳을 들쑤시면서도 밀실은 그냥 지나쳤다.

 이때부터 노인의 행적은 더 모호해졌다. 현상금을 노린 '유병언 헌터'가 순천에 몰려들었다. 그러나 끝내 술래는 잡지 못했다. 노인은 순천에 있는데 금수원만 들쑤셨다. 금수원 2차 압수수색이 끝난 다음 날, 노인은 백골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검경 가운데 누구도 '백골 노인'이 자신들이 찾아 헤매던 술래라는 걸 몰랐다. 40일이나 지나고 난 뒤에야 백골 노인을 겨우 알아봤다. 한 검찰 고위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자진 출석하거나 금수원에만 머물렀다면 일가 전체가 몰락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유병언'이란 이름의 최후는 참혹했다. 10억 돈가방을 남기고 순천 별장을 빠져나왔던 그는 숨진 채 발견됐다. 그가 세상에 남겼던 메모는 이렇게 끝이 난다. "내 노년의 비상하는 각오와 회복되는 건강을 경축하며…." 그러나 일흔셋 노인의 각오는 꺾였고 끝내 백골로 산화하고 말았다. 세월호 사고의 책임을 따져 보지도 못한 채.

세월호 침몰 101일째. 진도 팽목항에는 10명의 실종자를 기다리는 노란 깃발이 고요하게 흔들리고 있다.

정강현 기자  

※이 기사는 검찰과 경찰의 설명을 토대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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