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아이들이 감정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2014. 7. 19.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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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강민수,이희훈 기자]

▲ 노란 꽃잎 깔린 국회 도착하는 단원고 학생들

'친구들의 억울한 죽음, 진실을 밝혀주세요'가 적힌 현수막을 앞세우고, 희생자를 추모하는 노란 우산을 쓴 세월호 침몰사고 생존 단원고 2학년 학생들이 16일 오후 희생된 친구 부모들이 '제대로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단식농성중인 국회 정문에 도착하고 있다.

ⓒ 권우성

▲ 환하고 깨끗한 단원고 2학년 교실

단원고 2학년 교실은 모두 환하게 불이 켜져 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떠난지 94일째이 지났지만 책상 위에는 먼지 한톨 없었습니다. 매일 학부모들이 돌아가며 책상과 바닥을 청소하고 국화가 시들기 전 새 꽃을 들고 아이들의 빈자리를 찾아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 이희훈

"아이들이 꽃잎을 지르밟고 가는데 유가족들이 많이 울었습니다. 희생당한 애들도 다 꽃같이 예쁜 아이들이잖아요. 시민들이 노란 꽃잎을 깔아준 것은 죽은 아이들의 몫까지 열심히 살아가라는 뜻 아니었겠어요."

아침에 내린 비가 교실 창가에 맺혀 있었다. 한 시간 가까운 인터뷰 내내 그의 눈에도 눈물이 글썽였다. 그의 뒤로 22개 책상에 하얀 국화가 놓여 있었다. 한 책상에는 '4월 식단표'가 반쯤 접혀 있었다. 칠판에는 무사귀환을 바라는 선·후배들의 메모가 가득했다. 이곳 안산 단원고 2학년 10반은 학생 23명 중 세월호 침몰사고 이후 단 1명이 살아 돌아왔다.

< 오마이뉴스 > 는 장동원(45) 생존 학생 학부모 대표와 18일 오전, 2학년 10반 교실에서 만났다. 교실은 사고 후 94일이 지났지만 먼지 없이 깨끗했다. 매일 학부모들이 돌아가며 책상과 바닥을 청소하기 때문이다. 또 국화가 시들기 전 새 꽃을 들고 아이들의 빈자리를 찾는다.

'세월호 생존 학생들의 1박 2일 도보행진', 그 후가 궁금했다. 다친 학생들은 없었는지, 학생들의 행진 평가는 어땠는지를 물었다.

생존자들의 1박 2일 도보행진, 그 후

지난 15일 시작된 도보 행진은 안산 단원고를 출발해 광명을 거쳐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으로 향하는 37km의 여정이었다. 출발 22시간 만인 16일 오후, 생존 학생 43명은 국회에 도착했다. 학생들은 국회 본청을 향해 '사랑합니다'라고 외쳤고 유가족들은 눈물로 학생들을 부둥켜 앉았다. 유가족들은 지난 14일부터 '4·16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국회와 광화문 광장에서 단식 농성 중이다.(관련기사: 22시간 만에 국회 도착...눈물 바다)

장씨는 1박 2일 내내 학생들 곁에서 행진을 총괄했다. 그는 무엇보다 안전을 가장 염려했다. 심리적 안정이 필요한 학생들에게 물리적 사고는 또 다른 상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벼운 부상은 있었지만 행진은 큰 탈없이 마무리 됐다.

그는 행진을 무사히 마칠 수 있어서 학생들에게 고마워 하는 표정이었다. 이번 행진은 지난 4월 30일, 안산의 합동 분향소를 단체 참배한 이후 두 달 보름만에 이뤄진 생존 학생들의 단체 행동이었다. 특히 눈덩이처럼 불어난 시민 행렬이 그에게는 감동이었다. 시작은 10여 명의 시민이 함께 학생들과 걸었지만 이튿 날 여의도에 도착해서는 시민 500여 명이 학생 뒤를 밟았다. 시민들은 직접 만든 피켓은 물론 음료수와 아이스크림을 사와 물심양면으로 학생들을 격려했다.

시민 참여를 전혀 예상 못했다는 장씨는 "몸이 불편한 장애 학생들도 응원 나왔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어 그는 "아이들의 발걸음이 더 큰 발걸음을 만들었다"며 "'아직 우리 사회가 죽지 않았구나, 희망이 있다'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또 "아이들은 기사에 달린 댓글만 보다가 끝이 안 보이는 시민 행렬을 실제로 목격하게 됐다, 앞으로 살아가는 데에 큰 힘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행진 후 학생들의 반응에 대해 "대부분 뿌듯해 했다"며 "우정이 중요한 고2에게 숨진 친구들을 위해서 무언가를 했다는 점에서 자부심을 갖는 것 같다"며 반응을 전했다. 또 "행진을 통해서 아이들이 감정을 표현하기 시작했다"며 "'속이 후련하다', '가슴이 뻥 뚫렸다'며 좋아했다"고 전했다.

이어 그는 "'나는 그때 행진했다'는 추억을 만들어줬다는 점에서 아이들이 앞으로 당당해질 것"이라며 "아픈데도 서로 '업어주겠다'며 응원하는 모습이 대견했다, 아이들의 우정도 돈독해졌다"고 말했다. 육체적으로는 힘들었지만 서로를 격려하면서 심리적 치유도 가능했다는 것이다.

다음은 장씨와 나눈 일문일답을 정리한 것이다.

"'서로 업어주겠다'는 아이들, 대견스러워"

세월호침몰사고 단원고 생존학생 학부모 대표 장동원씨.

ⓒ 이희훈

- 도보 행진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아이들이 선택한 일인데, 정말 잘했다고 봐요. 아이들이 나이 먹고 나서 '나는 그때 행진을 했었지'라며 추억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준 거잖아요. 앞으로 더 당당해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버지로서도 뿌듯하고 대견스러웠습니다. 어른들한테도 가까운 거리는 아니잖아요. 무릎 보호대를 찬 애도, 복숭아 뼈 다쳤던 애도 끝까지 행진했잖아요. 골반이 아픈데도 가려고 하고 서로 '업어줄게'라며 자기들끼리 응원하는 모습이 참 대견스럽더라고요. 아이들 우정도 돈독해졌고요."

- 행진 도중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었나요?

"안전에 대한 우려가 가장 컸죠. 중간에 수인산업도로의 상태가 좋지 않았습니다. 공사 중이기도 했고요. 사고 없이 잘 지나갔습니다. 날씨도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하늘공원(단원고 희생자들이 묻힌 납골당) 가는 것도 아이들이 먼저, '가는 길에 들렀다가 가면 안 되냐'고 한 겁니다. 앞에서 묵념을 하고 친구들을 어루만져 줬죠. 그리고 눈물도 흘렸습니다."

- 학생들은 스스로 행진을 어떻게 평가했나요?

"어제 오후에 학생 평가회가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대부분 뿌듯했습니다. 당연한 것 같아요. 고2에게 우정이 중요할 텐데, (숨진) 친구들을 위해서 무언가를 했다는 점에서 자부심을 갖게 되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자주 이용하는 누리집에 악플이 많아서 그동안 외부 반응에 민감해 했습니다. 하지만 자기들 눈으로 직접 봤잖아요. 어디를 가든지 시민들이 환영했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행렬, 그 속에서 시민들이 선물한 물, 음료수 등을 봤습니다."

- 뒤따르는 시민들이 처음에 10여 명으로 출발했는데 점점 불어났습니다.

"경기도 시흥의 목감 사거리에서부터 사람들이 쭉쭉 늘어났습니다. 광명 KTX역 지나 아파트 단지로 진입하면서 더 늘어났죠. 새벽 1시가 넘었는데도 서울시립 근로청소년 복지관 앞에 50명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노란 꽃잎은 죽은 아이들의 몫까지 살아달라는 뜻"

세월호침몰사고 단원고 생존학생 학부모 대표 장동원씨.

ⓒ 이희훈

- 시민 참여를 예상했습니까?

"전혀 못했죠. 아이들 때문에 잠을 잘 못잤는데, 새벽 4시인가 5시인가. 숙소 방문을 열어놨었는데, 누가 들어오는 거예요. 새벽 내내 만들었다면서 과자하고 밭에서 직접 딴 오이를 밀어 놓고 갔어요. 굉장히 감동받았습니다. 많은 분들에게 인사 못 드렸습니다.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 가장 잊지 못할 장면이 있다면?

"시민들이죠. 이튿 날 아침에 복지관을 출발하는데 80명이 넘는 시민들이 박수를 쳤습니다. 그 중에 여섯 살짜리 꼬맹이도 있었어요. 교사에게 '어떻게 나왔냐'고 했더니 '언니, 오빠들이 우리 아이들 보면 힘이 날 것 같아서 데리고 왔다'고 했어요.

신체장애를 갖고 있는 대안학교 학생들도 마중 나왔어요. 몸이 불편한데,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응원해준다는 점에서 많이 울었습니다. 아이들이 속으로 아픔을 갖고 있을지라도 저 친구들을 봐서라도 잘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여의도에 도착한 뒤에도 행렬은 끝이 안 보였습니다. 아이들에게 '뒤돌아보라'고 했지요. 그걸 보고 우는 애들도 있었고요. 정말 이 아이들의 한 발걸음이 큰 발걸음을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한 걸음, 한 걸음이 수십 명, 수백 명, 아니 전국의 많은 시민들이 응원들을 해줬을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 사회가 아직 죽지 않았구나,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걸 아이들이 직접 본 것이죠. 매일 기사에 달린 댓글만 보다가 끝이 없는 행렬을 목격한 것이죠. 앞으로 살아가는 데에 큰 힘이 될 것입니다.

또 아이들이 무사히 완주한 것도 감동적이었습니다. 행진을 마치고 안산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탄 뒤, 긴장이 풀려서 그랬는지 울기도 했어요. 아이들에게 다가가 물었더니 '아저씨 너무 좋았어요'라고 말했습니다. < 오마이뉴스 > 가 생중계를 해주니까 함께 못 오신 부모님들도 보시고 안심을 하셨고, 아이들 걱정에 행진에 반대했던 부모님들도 가기 전에는 걱정했지만 별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저도 나중에 알았지만 시민들이 국회 정문 앞에 노란 꽃잎을 깔았더라고요. 꽃이라는 게 애들한테 딱 어울리는 것 같아요. 아이들이 꽃잎을 지르밟고 가는데 유가족들이 많이 울었습니다. 희생당한 애들도 다 꽃같이 예쁜 아이들이잖아요. 꽃을 깔아준 것은 죽은 아이들의 몫까지 열심히 살아가라는 뜻 아니었겠어요."

- 아이들이 유가족에게 쓴 편지에 아이들이 끝까지 함께 하겠다고 했습니다. 행진과 같은 직접 행동을 앞으로도 하겠다는 것일까요?

"많은 생각이 듭니다. 아이들은 현실로, 학교로 돌아가야 합니다. 사고를 잊지는 못하겠지만 이제는 이겨내고 있잖아요. 학생이니까 공부해야 되고 현실로 돌아왔으면 좋겠어요. 또 어른들의 몫이 있는 거잖아요. 생존 학생 부모님들은 유가족을 어떻게 도울지 논의하고 있습니다."

- 행진이 심리 치유의 첫 걸음이었다고 말씀을 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당연하다고 봐요. 학생들은 친구에 대한 죄스러움이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행진에 앞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내가 과연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고2라면 친구 사이의 의리, 우정이 전부 아니겠습니까.

아이들이 고민을 하고 그 고민을 표출할 방법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그 출발점이 안산에서 팽목항까지 십자기를 메고 가는 분들(유가족 순례단)을 따라가겠다고 한 것입니다. 이번 도보 행진을 하면서 아이들이 감정을 표현하기 시작한 것 같아요. 상담 치료보다 더 치유가 되고 있다고 보는 것 같아요. '속이 후련하다', '답답한 가슴이 뻥 뚫렸다'고 말했어요."

- 행진 후에 따님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저에게 '아빠, 잘했다'고 해요. 또 '친구한테 할 수 있는 게 없었는데 뿌듯했다'고 말했어요. 그리고 제 딸과 가장 친했던 친구의 아버님(유가족)이 계시는데 국회에서 못 만났어요. 아버님이 광화문에 있다가 국회로 오는 중에 길이 엇갈린 거예요. 나중에 전화로 아버님이랑 통화를 했는데, '애가 나를 찾았을텐데 미안하다'고 했어요. 내 자식도 없는데 남의 자식 못 본 게 미안하겠어요. 제가 더 미안하죠."

- 학부모들이 이렇게 환한 모습 처음 봤다고 하셨습니다. 아이들이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합니다.

"트라우마라는 게 부모와 대화도 없고 시무룩해 있는 거잖아요. 방에 들어가서 나오지도 않고요. 그런 모습만 보다가 행진에서는 서로 위해주고 '깔깔깔' 웃었잖아요. 당연히 해야하는 것인데 아픔이 있으니까 지금까지 못한 겁니다. 서서히 아이들이 자기의 감정을 표출하고 있어요. 원래는 어른들에 대한 불신이 많아서 말도 잘 안했는데 사고에 있었던 얘기를 하고 있어요. 어제도 광주에서 검사가 와서 아이들의 진술을 받았습니다. 구체적으로 진술을 하고 있는 그대로 얘기를 했습니다."

장동원씨 인터뷰② "'살아 남은 애들이 왜 특혜받냐'는 말, 큰 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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