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이제 눈물 닦고 '꽃신'을.."

2014. 6. 28. 11:35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25일 오후 서울 성북동의 한 연습실.

연습실 안은 배우들의 열기로 후끈했다. 낯선 이의 방문도 모른 채 배우들은 연기에 몰입해 있었다.

조용히 한쪽에 자리 잡고 앉은 기자. 얼마 안 가 낮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저 배우들 대체…'

"연기한 지 십수 년 됐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에요. 연습이 끝난 뒤에도 가슴이 먹먹해요. 친한 사람들을 만나도 웃고 얘기하기가…"

"노래할 때마다 눈물이 나요. 내가 그 사람인 듯싶어져서…"

잠깐의 휴식시간, 배우들은 땀을 닦으며 이렇게 말했다.

배우들은 그야말로 작품 속 인물인 듯했다. 흔히 하는 말로 '빙의'된 것처럼 곧 막을 올릴 작품에 매달리고 있었다.

이런 몰입은 어디서 나올 수 있는지 묻고 싶었는데 다시 연습이 시작됐다. 배우들은 작품 속 그 장면, 그 역할로 완벽하게 돌아가는 데는 10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

◆ 위안부 문제 다룬 첫 뮤지컬 '꽃신'

기자가 찾은 곳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담은 뮤지컬 '꽃신'의 연습실이었다.

뮤지컬 '꽃신'은 1940년대 일본군 위안부로 강제 동원된 할머니들의 가슴 속 응어리와 한이 농축된 작품이다. 실제 위안부 피해자인 박옥선, 이옥선, 강일출 할머니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다.

기획자 이종서 씨는 '꽃신'의 탄생 배경을 이렇게 말한다."지난해 8월 14일 서울 광화문광장을 지나다가 우연히 위안부 피해자인 고 이용녀 할머니의 노제를 지켜보게 됐습니다. 그 자리에서 할머니를 위해 무언가를 꼭 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이 씨는 그러면서 자신의 스마트폰을 기자에게 보여줬다. 배경 화면에 할머니 세 분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앞서 언급한 박옥선, 이옥선, 강일출 할머니다.

"지난 10개월, 작품 활동 준비로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할머니들의 사진을 꺼내봤죠. 전 할머니들께 가슴 아픈 이야기를 많은 사람에게 꼭 알리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 약속 지키고 싶습니다."

이 씨의 스마트폰 배경 화면은 자신과의 약속,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과의 약속이었다.

'꽃신'은 내용이 내용인 만큼 뻔한 상업 뮤지컬로 볼 수 없다. 그렇다고 역사물로만 그리지도 않았다. 할머니들의 꽃다운 시절 사랑 이야기가 담겨 있다. 지루해 할 수 있는 부분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소재를 더해 매끄럽게 연결한 것이다. 장기 공연을 염두에 둔 포석이다.

"애국심에 호소하는 일회성 공연이 아닙니다. 우리 옆집 할머니들의 가슴 아픈 역사입니다. 관객들의 마음속에 오래 남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연출가 김근한 씨의 설명이다.

◆ 연출가에서 배우까지…이어지는 재능기부

뮤지컬 '꽃신'은 연출진, 배우들의 재능 기부로 만들어지고 있다. 모두 노 개런티로 공연에 임하는 것이다.

'마리아 마리아' 등 여러 뮤지컬 작품에서 뛰어난 연기를 선보인 강효성 씨를 비롯해 정찬우, 서범석, 최혁주, 윤복희, 김진태 등 실력파 배우들이 출연한다.

배우 겸 예술감독을 맡은 강효성 씨(순옥역)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평소 큰 관심은 없었어요. 그냥 우리 역사 속 한 장면이겠구나 생각했었죠. 하지만 인터넷으로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 영상을 보고 같은 여자로서 마음으로 울었습니다"라고 출연을 결심한 이유를 설명했다.

강 씨는 오디션 현장에서 처음 만난 할머니들의 모습이 강렬한 충격으로 남아있는 듯했다.

"할머니들을 뵙고 나서 더 확고하게 마음을 굳혔어요. (위안부 얘기가 나오자) 깊게 팬 주름 사이로 뜨거운 눈물을 흘리셨어요. 연기할 때 (그런 할머니의) 모습을 계속 떠올리며 몰입하고 있습니다."

배우 정찬우 씨(윤재역)는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작품이기도 했지만, 함께 출연하는 배우들을 보고 마음을 굳혔습니다. 내가 가진 작은 재능으로 위안부 할머니들의 마음을 무대에서 잘 전달해드리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꽃신'에 출연하는 46명의 앙상블 단원들도 재능기부로 참여한다. 사실 뮤지컬계 앙상블 단원들의 보수는 적다고 알려져 있다. 아니 적어도 너무 적어 3D 업종으로도 불릴 정도다. 그런 그들이 시대의 아픔을 함께 나누겠다며 작은 보수도 마다하고 기꺼이 작품에 참여해 모두를 숙연케 한다.

앙상블 단원 홍해선 씨는 이렇게 말한다."제 작은 목소리로 상처받았던 어린 소녀들, 지금의 할머니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싶어요. 위안부 문제는 젊은 세대들도 꼭 관심을 두고 지켜봐야 할 현재 진행형의 역사에요. 일본이 자꾸 과거사에 대해 입장을 번복하고 있잖아요. 이 작품에 참여하면서 전 오히려 배우는 게 많네요."

◆ 대구에서 서울로 그리고 일본까지

'꽃신'은 7월 4일 2014 대구 국제뮤지컬페스티벌(DIMF)에 참가한다. 대구 공연을 시작으로 서울(7월 5일∼8월 17일, 마포아트센터)에서 본격적으로 관객과 만난다.

공연 수익금의 50%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쉼터인 '나눔의 집'에 기부되고 나머지 수익금은 지방 공연과 해외 공연 준비에 사용될 예정이다.

기획자 이종서 씨는 해외 공연도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일본, 중국 등 아시아에서 유럽까지 가는 게 목표란다.

이 씨는 "특히 가장 먼저 일본에서 공연하고 싶습니다. 일본인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싶습니다. 할머니들이 평생을 거리에서 아픈 상처를 안고 투쟁하셨지 않습니까. 뮤지컬이라는 문화 콘텐츠로 역사적 각성을 주는 한류를 이어나갈 겁니다"라고 말한다.

◆ 2014년 6월 20일…일본 정부, 고노 담화 검증 결과 발표

"일본 정부가 조금 전 군대 위안부 강제 동원을 인정한 고노담화 검증 결과를 국회에 보고했다고 교도통신이 보도했습니다. 고노 담화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조사 결과에 따라 1993년 8월 4일 고노 요헤이 당시 관방장관이 발표한 것으로, 군대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하고 사죄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2014년 6월 20일 오후 3시 46분 일본 정부의 고노 담화 검증 결과 국회 보고 사실이 속보로 방송됐다.

뒤이어 국회에 보고된 구체적 내용도 전해졌다."일본 정부는 군대 위안부 강제 동원을 인정한 고노 담화 작성 과정에서 한일 정부 간의 문안 조정이 있었다는 내용의 담화 검증 결과를 내놓았습니다."

우리 정부는 '일본 정부가 고노 담화를 계승한다고 하면서 이를 검증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되며 신뢰성을 훼손하는 행위'라는 내용의 성명을 냈다.

중국도 일본 정부를 강력히 비난했다.

그리고 6월 21일.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명예 회복과 일본군 위안부 범죄 해결을 위한 단체 한국정신대대책협의회도 성명을 냈다.

"일본 정부가 내부적으로 우익의 지지를 이어가고 한국 정부의 설 자리를 좁히려는 시도로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조직적인 국가 범죄다."

할머니들은 담화를 검증한 것 자체가 문제라며 분노하고 있었다. 다시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은 것이다.

◆ 그리고...

2014년 6월 8일. 또 한 명의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가 한을 풀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배춘자 할머니다.

남은 위안부 피해 할머니는 이제 50여 명.

그러나 하루하루 생기는 빈자리에 가슴 아파하면서도 남은 할머니들은 마음을 다잡고 수요일이면 일본 대사관 앞으로 달려간다.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눈이 오면 눈을 맞으며 사시사철 그렇게 늘 굳게 닫힌 철문 앞에서 일본 정부의 사과를 소리 높여 외친다.

(뮤지컬 '꽃신' 중)

"해순이는 밤낮으로 그림을 그리데. 우리는 늙어 금방 죽어 없어져도 그림이랑, 노래, 책 이런 거는 오래 남을 거 아이오. 민들레 홀씨 맨키로 약해 보이도 그래도 그기 멀리멀리 날아 안 가겠나. 그래 우리를 오래오래 기억해 주소. 그래야 다시 그런 일이 안 생길 거 아이오"

그렇다. 할머니들은 세상과 작별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그런 그들이 쇠잔한 몸으로 그림과 책, 노래를 통해 그들의 이야기를 알리고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기자는 뮤지컬 '꽃신'이 그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더 많은 이들에게 직접적으로 알리게 하는 다리 역할을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힘없는 민족으로 태어나 시대의 희생자로 살 수밖에 없었던 불쌍한 딸들을 관객들이 작품 속에서라도 함께 가슴 아파하고 위로해줄 계기가 되길 기대해본다.

YTN PLUS 오진희 기자 (ojh6572@ytnplus.co.kr)[사진출처 = YTN / (주)뮤지컬 꽃신]

Copyright © YT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