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의 평화헌법 개정은 전쟁 전 체제 회귀 시도"

2014. 6. 22.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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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오에 겐자부로·김영호 교수 특별대담

오에, 한국 언론 20년 만에 처음 만나

"아베는 지금의 평화헌법 체제를 미국의 강요에 의한 '나쁜 레짐(체제)'이라고 보고 전쟁 전의 '아름다운 레짐'으로 되돌아가려 하고 있습니다. 아베가 전전 체제를 아름답다고 본다면 반성이나 사죄는 없는 거지요."

평화헌법을 지키려는 일본 양심세력을 대표하는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의 아베 정권에 대한 우려와 경고는 간절했다. 그는 지난 13일 도쿄 자택에서 김영호 경북대 명예교수와 대담을 하면서 "아시아 차원에서 민중들이 평화로운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이 우리의 최종적인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에가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나 대담에 응한 것은 1995년 이후 처음이다. 아베 정권이 고노 담화 흔들기 등으로 과거사 반성을 훼손하고 '전쟁할 수 있는 나라' 일본을 만들려 하는 데 저항하는 그의 진심이 담긴 대담이었다.

도쿄/길윤형 특파원 charisma@hani.co.kr

일본이 전후 평화헌법을 개정해 '다시 전쟁을 할 수 있는 국가'로 변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보수 세력의 핵심엔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있다. 그렇다면 정반대편에서 평화헌법 수호를 위해 노력하는 양심 세력의 중심엔 누가 있을까. 일본의 평화헌법을 지키려는 '9조의 모임'을 통해 치열한 현실 참여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1994년 노벨상 수상자 오에 겐자부로(79)가 있다. 오에는 13일 오전 도쿄 세타가야구 세조에 자리한 자택에서 동아시아 공동체 문제에 대해 오랫동안 천착해 온 김영호 경북대 명예교수(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이사장)와 대담을 했다. 이번 대담은 지난 10일로 10돌을 맞은 '9조의 모임'의 의미를 한국 시민들과도 공유해 달라는 김 교수의 요청을 오에가 흔쾌히 받아들이면서 성사됐다. 일본의 평화헌법, 동아시아의 다양한 현안, 동아시아 시민사회의 미래 등을 아우르는 두 지성의 대화는 3시간 넘게 이어졌다.

편집자

"일본이 저지른일 전혀 속죄 안돼…전쟁세대 늘 기억해야"

오에 겐자부로전쟁 않겠다고 약속한 평화헌법과미군에 기지 내준 미-일조약 양립이일본의 모순이자 '애매함'의 출발점김영호헌법 9조 무력화 시도 '애매함' 극치일 시민사회의 평화헌법 수호운동동아시아 시민운동의 기폭제 되길

김영호(이하 김)

"반갑습니다. 제가 선생을 처음 뵌 것이 1994년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한국을 방문하셨을 때였지요. 제가 몇 해 전에 유명 디자이너의 도움을 받아 반 고흐의 유명한 그림 <별이 빛나는 밤에>의 일부를 프린트해 넥타이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어두운 동아시아 정세 속에서 별처럼 빛나는 일본 평화운동가 여러분의 이미지를 생각하고 골라 보았습니다."

오에 겐자부로(이하 오에)

"감사합니다. 넥타이는 평소 하지 않습니다. (방으로 들어가 넥타이를 매고 온 뒤) 3년 만인 것 같네요.(웃음) 저의 마지막 작품집인 <만년양식집>(In Late Style)을 드리겠습니다. 김 선생이 오신다기에 미리 서명해 두었습니다. 소설을 하나 쓰려면 5년 정도는 그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제가 지금 79살이니 쓰려면 한권 정도는 더 쓸 수 있겠지만, 이제 그 일을 그만두고 일본의 헌법을 지키기 위한 '9조의 모임' 활동에 집중하려 합니다."

"선생 세대의 일본인들에게 평화헌법이란 어떤 의미입니까."

12살때 제정된 평화헌법에 희망

오에

"저는 1935년 일본 시코쿠 에히메현의 작은 숲속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저희 조상은 그곳에서 지폐를 만드는 연료가 되는 삼지닥나무를 재배하는 일을 했습니다. 전쟁이 끝나던 무렵에 저희 부친이 돌아가셔서 어머니께서 가업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의 패전이 닥쳤습니다. 이후 일본 사회엔 인플레이션이 밀려왔습니다. 그러자 정부가 새로 만든 지폐에 매우 싼 원료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로 인해 저희 집 가업이 1946년에 사실상 끝나게 됐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2년이 지나 제가 12살이 됐을 때 지금의 새로운 헌법이 만들어졌습니다. 당시 학교 선생님께서 새로 만들어진 헌법에는 "개인의 권리에 관한 내용과 앞으로 일본이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맹세가 들어 있다"는 얘길 해주셨습니다. 그런 얘기가 매우 신선하게 들렸고, 저는 매우 큰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하고 대학을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전쟁의 포기와 교전권 부정을 규정한 일본 평화헌법 9조는 선생의 역사에 대한 성찰, 동아시아 침략에 대한 속죄, 히로시마·나가사키 등 원폭 피해자들에 대한 공감, 오키나와에서 드러나는 평화헌법과 미-일 안보조약의 모순에 대한 비판, 보수적 역사수정주의와의 싸움, 아시아의 미래 구상이 모두 응축된 사상의 원점인 것 같습니다."

'일 속죄 당위'가 헌법 9조에 담겨

오에

"저는 어릴 때부터 아시아에서 일본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세계에서 일본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보다 늘 먼저 생각해 왔습니다. 그게 제 문학이나 사회적인 글의 일관된 테마입니다. 일본은 중국을 침략했고 한국의 땅과 사람을 일본의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아시아에서 일본이 저지른 일에 대한 속죄가 전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전쟁을 기억하고 있는 우리들은 평생 아시아에서 일어난 일을 기억하고 속죄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의 근본입니다. 그 정신이 평화헌법 9조에 표현된 것이지요.

전쟁이 끝날 때 전 10살이었습니다. 그때 일본의 아이들은 모두 군국주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빨리 어른이 되어, 전쟁에 나가서 천황을 위해 죽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일본은 전쟁에 나가서 졌습니다. 게다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떨어져 많은 이들이 숨졌습니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나서 어머니는 주변에서 쌀을 구해 오니기리(주먹밥)로 도시락을 한가득 만들어 히로시마로 갔습니다. 거기 어머니의 여학생 시절 친구 다섯 분이 살고 계셨죠. 어머니는 5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가서 사흘 동안 여러 사람에게 친구들의 행방을 물었습니다. 모두 숨졌다는 소식만 들었습니다. 어머니가 매우 실망해 집으로 돌아온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전 히로시마의 비극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이후 저는 일본이 아시아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늘 걱정하게 됐습니다. 일본이 중국과 한국에 큰 잘못을 했기 때문에 일본이 다시 아시아에서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일본이 어떻게 될까' 어머니에게 물었던 기억도 납니다. 히로시마의 상황을 보고 온 어머니도 매우 비관적이었습니다.

이후 일본은 1951년 9월 미국 등 연합국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일본의 본격적인 '전후'가 시작된 것이죠. 그 직전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은 1950년 8월 자위대의 전신인 경찰예비대를 창설합니다.(이 조직이 1952년 10월 보안대를 거쳐 1954년 7월 지금의 자위대로 확장됨) 또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함께 미-일 안보조약이라는 군사조약을 체결합니다. 일본이 미국의 군사력에 의해 보호를 받고, 그 대신 미국에 기지를 제공하게 된 것이죠. 이런 식으로 일본은 평화헌법을 가지면서 군비를 가진 나라 미국과 안보조약을 맺어 미국의 보호를 받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런 일본의 (모순적인) 현실을 가장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 오키나와 문제입니다. 현재 일본 내 미군 기지의 70%가 오키나와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미국과 강화조약을 맺을 때 오키나와를 일본에서 제외하고, 오키나와의 기지를 미국에 넘겨준 것입니다. 그래서 평화조약에 의해 오키나와는 버림받은 것입니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저는 일본이 왜 오키나와를 잘라 버렸는지를 공부하고 싶었습니다. 당시는 소설을 쓰려는 때였기 때문에 출판사(이와나미 서점)에서 돈을 받아서 오키나와에 여행을 가 책(<오키나와노트>, 1970)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비슷하게 공부를 해 히로시마에 대해서도(<히로시마노트>, 1965) 썼습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이어진 제 일의 출발점입니다."

"9조의 모임의 고모리 요이치 사무국장(도쿄대 교수)이 자신의 최신 저서에서 선생을 두고 '죽은 자의 목소리를 살아남은 자가 대변하는 말과 글'이라고 평했습니다. 제가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1994년 노벨 문학상 수상식에서 발표된 '애매한 일본의 나'라는 수상 연설이었습니다. 196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아름다운 일본의 나'라는 수상 연설이나 아베 총리의 저서 <아름다운 나라에>와 너무나 선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의 애매함은 그뒤 계속 커지고 있습니다. 아베 총리는 헌법 해석을 변경해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하려 합니다. 정부의 각의 결정으로 일본의 최상위법인 헌법 9조를 사실상 무력화하려는 것입니다. 그런 절차와 과정은 애매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습니다. 특히 1993년 발표된 '고노 담화'에 대해서는 일본군의 위안부 강제동원 개입 사실에 대한 그간의 광범위한 조사와 국제적 공감 위에서 담화를 확대·강화해야 하는데 거꾸로 가고 있습니다."

후쿠시마 사고도 애매함의 참화

오에

"평화헌법이 있고 동시에 내용이 애매한 미-일 방위조약이 있다는 것이 모순이자 애매함입니다. 그리고 미-일 방위조약의 일환으로 원전 시스템이 만들어졌고, 이로 인해 2011년 3월11일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애매함의 확대가 불러온 대참화입니다. 헌법 9조 운동은 반원전 운동이나 원전제로 운동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그리고 동아시아에서 보면 어떻습니까. 이번 '9조의 모임' 10돌 강연회에서 김 선생이 강연해 주셨고 한국의 시민단체들이 연대 성명을 보내주어 '9조의 모임' 활동이 동아시아 연대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아베는 지금의 평화헌법 체제를 미국의 강요에 의한 '나쁜 레짐(체제)'이라고 보고 전쟁 전의 '아름다운 레짐'으로 되돌아가려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전전을 나쁜 레짐으로 보는데 아베는 전후를 나쁜 레짐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는 전쟁 시기 도조 히데키 내각의 각료(상공대신)였습니다. 기시는 도쿄 전범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기소되었는데 아베는 그를 가장 존경한다고 합니다. 도쿄 전범재판은 미국이 승자로서 제멋대로 한 재판으로 보는 거지요. (아베가) 전전 레짐을 아름답다고 본다면, 전전에 대한 반성이나 사죄는 용납할 수 없는 거지요. 그래서 고노 담화나 무라야마 담화는 수정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것입니다. 단, 지금 전전 레짐 그대로 돌아갈 순 없으니까, 그것을 현대적으로 계승한 제3의 레짐을 만들려 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것을 헌법 개정으로 실현하려는 거지요."

"9조의 모임 10주년 기념 강연회의 날이 바로 한국의 6·10 민주항쟁 기념일이었습니다. 아시아에서 고도산업화를 이루고 그 결과로 중산층이 형성되고 그들이 반체제적 운동권과 제휴하여 정권 교체를 이룬 아시아 최초로 민주·시민혁명이 성공한 날이었습니다. 동아시아 전체가 거의 시민혁명 직전의 단계에 도달했고, 이를 위해 한국과 일본의 시민사회가 앞장서야 하고, 그래서 연대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과거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일본 시민사회가 지원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일본 시민사회는 정권 교체의 기억을 갖고 있지 않아 좀처럼 투표 민주주의(Voting Democracy)에서 소리 민주주의(Voice Democracy)로 넘어가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일본 시민사회의 평화헌법 수호 운동이 성공해 동아시아 전체의 시민사회가 깨어나는 기폭제가 되기를 빕니다. 반대로 아베의 반혁명이 성공하면 시진핑이 '주동작위' (主動作爲: 할 일을 주도적으로 한다) 전략의 반격을 할 것이고, 동북아는 민족주의의 대결장이 되어 시민사회는 위축될 것입니다."

"아시아 평화가 민족보다 우선…시민의 힘 믿어"

김영호일본·중국의 패권 대 패권 대결은'적대적 상호의존'의 악순환 불러'동아시아 평화회의' 구성해시민 주체되는 미래구상 만들어야오에 겐자부로아시아 민중들의 평화가 최종목표개별국가 번영보다 우선가치 돼야인간·휴머니즘이 시민운동의 근간앙시앙레짐 회귀 시도 돌파해야 

오에

"진심으로 찬성합니다. 아시아의 차원에서 아시아 민중들이 평화로운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게 우리의 최종적인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개별 국가의 번영이나 평화도 중요하지만 아시아 전체가 침략당하지 않고 침략에 말려들지 않는 아시아 전체의 자립과 평화가 가장 중요한 가치입니다. 이것이 개별 국가의 가치보다 상위에 있습니다. 중국의 지식인들이나 시민사회도 아시아 전체의 평화, 아시아 전체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소중하게 생각할 것이라 믿습니다. 이런 생각을 같이 나눠보자는 목소리가 동아시아 미래 구상입니다. 지난 10주년 집회에서 한국 분들이 성명을 통해 그런 생각을 일본에 전했고, 일본인들이 이에 대해 공감을 표했습니다. 저는 이런 것들이 오랜 축적을 통해 쌓여 큰 힘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시민운동은 국가의 체제에 따라 다르지만, 개인들이 자신과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한다는 점에서 큰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민들의 근본적인 생각은 일치합니다. 이것이 이른바 휴머니즘입니다. 인간에겐 역시 휴머니즘밖에 없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전후 유럽통합이 독일의 철저한 반성과 경무장화 및 나토(NATO) 체제로 가능하게 되었다면, 동아시아에선 일본의 평화헌법, 과거사에 대한 반성 위에서의 일정한 보상 그리고 미국 주도의 안보 질서를 통해 일본과 동아시아 국가들의 국교가 재개되었습니다. 이후 정경분리형 무역과 투자의 활성화로 고도성장이 이뤄졌습니다. 그로 인해 밖으로는 동아시아 공동체를 지향하는 데 이르렀고, 안으로는 중산층을 중심으로 시민사회화의 초입에까지 왔습니다. 중국도 고도성장의 결과 태어난 3억의 중산층, 1980년대 이후 태어난 인터넷 세대, 천안문 세대 그리고 신공민운동, 그리고 200만개가 넘는 시민단체(NGO)를 중심으로 중국 나름의 시민사회화가 진행되는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 며칠 전 천안문 사건 기념일에는 홍콩 시민 15만명이 천안문 사건 재평가를 요구하는 시위를 했습니다. 일본의 평화헌법과 그것과 연계된 냉전 후 동아시아 체제는 '시빌 아시아'라는 세계사적 옥동자를 잉태하는 데까지 온 것입니다. 시빌 아시아 혁명의 성공을 위해서는 서유럽과 같은 동아시아의 역사 화해와 동아시아 공동 안보 시스템이 절실합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아베 일본의 역사수정주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에 의한 군사대국화라는 반동이 본격화한 것입니다. 지금은 잠자는 사자인 중국이 '굴욕의 세기'의 통분을 안고 깨어나는 시기가 아닙니까. 중국이 패권주의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과거 일본의 패권주의에 대한 반성이 중요했는데 일본이 반대로 가고 있는 것이지요. 그 결과 패권주의 대 패권주의의 대결이 오고 동북아는 적대적 상호의존의 악순환 트랩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아베의 일본은 중국이라는 적을 이용하여 영토 민족주의를 자극하고 우경화를 유도합니다. 또 '헌법 9조냐 안보냐' 하는 양자택일 구도 속에 시민들을 가두어 집단적 자위권 행사에 대한 지지율을 끌어올립니다. 중국은 일본이란 적을 이용하여 국가주의적 분위기를 대대적으로 띄워 국내 민주화의 요구를 억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적대적 상호의존'의 악순환 구도 속에서 국가는 시민을 위축시키는 제국화 경향을 띠게 되어 '제국과 시민'이라는 구도를 만듭니다. 이런 상황에서 피해를 보는 것은 한·중·일의 시민들입니다. 따라서 시민과 시민의 연대가 절실합니다. 각국의 진짜 주인은 시민 아닙니까! 나는 '동아시아 시민평화회의'를 구성해 시민이 주체가 되는 아시아 미래 구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센카쿠 갈등, 아시아 멸망길 될수도

오에

"그렇습니다. 다만, 중국에 대해 저는 조금은 신중합니다. 일본한텐 중국을 침략했다는 책임이 있습니다. 중국의 민중에게 끼친 피해를 완전히 속죄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두 나라가 적대적 방향으로 가는 것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등에서 두개의 민족주의가 충돌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일본이 멸망하는 길이고, 아시아가 멸망하는 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완전 동감입니다. 수년 전 <아사히신문> 주최로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와 함께 도쿄 아사히홀에서 같이 강연한 적이 있습니다. 리 총리는 한·중이 이따금 일본을 상대로 과거사 청산을 이야기하면 일본이 돈을 내어 무마한다, 일본은 그런 '산타클로스 행위'를 그만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다음에 제가 일본이 과거를 청산하지 않으면 과거가 현재가 되고 그 제약에 묶이게 된다, 그런데 한-중이 과거사를 비판하면, 일본이 과거사를 청산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한·중이야말로 일본의 산타클로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청중으로부터 박수가 많이 나왔습니다. 이후 언론에서 이를 '산타클로스 논쟁'이라 보도했더군요.

우리는 2010년에 100년 전 일본의 한국병합조약이 '불법이고 무효'라는 한·일 지식인 공동성명을 발표했습니다. 당시 선생께서도 서명을 해주셨죠. 우리는 이를 '산타클로스 동맹'이라 불렀습니다. 2012년 10월엔 센카쿠열도와 독도에 대해서도 한·중·일 시민 공동선언이 나왔습니다. 영토 문제에 대한 산타 동맹, 위안부 문제에 대해선 더 큰 산타 동맹이 분투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산타 동맹이 확대되어 동아시아 시민평화회의가 가능하다고 봅니다. 이 경우 재원은 '크라우드펀딩'을 통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것이 시민 참여를 확대하는 길이기도 하니까요. 산타클로스는 크리스마스 때 메시아의 탄생을 예고합니다. 지금의 위기는 동아시아 시민사회라는, 즉 '시빌 아시아'라는 진짜 잠자고 있는 사자가 태어날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중요한 시기입니다. 여기서 시빌은 시민간 또는 문명화된(civilized) 인민을 포괄한 개념입니다. 우선 동아시아 시민 평화회의는 중국의 아시아, 일본의 아시아가 아닌 아시아의 아시아, 시민 본위의 아시아가 되어 분쟁의 불씨를 협력의 핵으로 바꾸는 대변자가 되길 기대합니다."

인간 자체가 바로 평화

오에

"시빌 아시아의 시빌(문명화된)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인간은 여러 수단을 통해 지식을 얻고 공유하는 것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민족주의라는 것은 공유된 시민들의 문화를 의심하고, 가두고, 보를 만들어 물의 흐름을 막습니다. 나치즘이나 현재 일본의 일본주의라는 것이 그렇죠. 일부러 들리는 것을 듣지 않고, 보이는 것을 보지 않게 해서 사람들을 내면으로 숨어들게 합니다. 예를 들어 일본의 젊은이는 인터넷을 이용해 쉽게 국경의 벽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일본이 지난해 12월 만든 특정비밀보호법이라는 것은 이런 흐름을 막는 보를 설치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이용할 수 있는 지식획득(인텔리전스)의 기회가 점점 다양화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것을 정말로 우리가 공유하는 쪽으로 움직일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지금 말씀하신 시빌 아시아라는 운동에서 지식을 얻고 공유하는 공간의 확대를 의미하는 시빌이 중요합니다.

인간에게는 여러가지 불가해한 능력이 있어 기본적으로 새로운 것을 향하고 어려움을 돌파해 갑니다. 저에겐 오늘 51살이 된 히카루라는 아들이 있습니다. 저의 아이는 장애를 갖고 태어났습니다. 처음엔 단순히 일반 아이들보다 지능이 낮았습니다. 그러나 이후 간질이 발생했습니다. 간질은 내장에도 영향을 줘 자유로운 활동이 불가능해졌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이런 어려움을 늘 극복해 왔습니다. 그리고 회복될 때마다 원래 상태로 돌아오는 게 아니라 계속 인간으로서 앞으로 나가고 성장해 갑니다. 그래서 인간은 앞으로 계속 성장해 가는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지금 김 선생이 말씀하신 것이 사실 '9조의 모임'을 처음 만들자고 호소했던 가토 슈이치(1919~2008·일본의 평론가)와 제가 하려고 했던 것이기도 합니다. 인간다움이라는 것을 지키고 새롭게 하는 것, 넓게 말하면 르네상스에서부터 이어져 온 휴머니즘이라는 것이 지금의 시민운동의 근간에 있습니다. 그동안 여러 어려운 시대가 있었고, 지금은 원전이나 핵무기라는 암흑이 있습니다. 모두가 조금씩 앞으로 나가는 게 지금 필요합니다. 그것이 지금 아시아에 너무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9조의 모임을 통해) 우리가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올해는 일본의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1867~1916)의 <마음>(고코로)이 출판된 지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100년 전은 동아시아의 가장 큰 난국이었습니다. 그때 50살 중반이던 소세키가 한국, 중국 등 아시아를 여행합니다. 그런 지식인이 <마음>을 쓰기 3년 전에 강연을 하고, 이 책을 쓴 해에도 강연을 합니다. 그리고 책을 쓰고 몇년 뒤에 사망합니다.

소세키는 고코로를 쓰기 3년 전 '일본 문화의 개화'라는 주제의 강연을 합니다. 메이지 시대가 시작된 40년 동안 일본이 어떻게 개화하고 발전했는지를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소세키는 '메이지의 정신'이 벽에 부딪혔다고 말합니다. 첫번째 강연에선 '일본이 엉망인 쪽으로 가고 있다'고 말하고, 3년 뒤엔 비슷한 내용을 말하면서도 '시민들은 이를 극복할 것'이란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비관적인 상황에서 의지의 낙관주의를 말하고 그가 숨집니다. 이후 20~30년 뒤 일본은 전쟁을 일으키고 원자폭탄의 피해도 입습니다. 바로 그게 아베가 말하는 전전의 레짐입니다. 이를 극복하고 다시 일본의 문화를 만든 것이 전후의 문화이고, 가토 슈이치가 말했던 문명입니다. 그러나 일본에서 전전의 '앙시앵 레짐'으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일본이 이렇게 나쁘게 되고 있으니 이를 인식하고 이를 돌파하자고 한 것이 9조의 모임입니다."

"선생은 시에서 '나는 삶을 다시 고쳐살 수 없지만, 우리는 삶을 고쳐살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비관적인 현실 속에서 의지에 의한 인간의 낙관적 미래를 그렸습니다. 선생의 소설 <불타오르는 녹색의 나무> 제일 마지막이 '조이풀'이라는 말과 함께 끝나는데, 선생이 평화이고 조이풀(joyful)입니다."

오에

"아닙니다. 인간 자체가 바로 평화입니다."

정리 길윤형 도쿄특파원 charisma@hani.co.kr

1994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일본의 소설가다. 도쿄대학에 재학중이던 1957년 문단에 데뷔했고 <사육><개인적 체험><히로시마 노트><만년원년의 풋볼>등 수많은 작품을 꾸준히 발표했다. 베트남전 반전운동, 히로시마 반핵운동 에 참가하고, 천황제를 비판한 소설을 발표해 우익의 협박을 받았으며, 김지하와 솔제니친 등 정치적 탄압을 받는 작가들의 석방 운동에 동참한 실천적 지식인이다. 일본 우익세력에 맞서 헌법 9조를 지키기 위한 '9조의 모임'을 결성해 일본 군국주의와 전쟁 반대를 위해 노력해 왔고, 일본의 진정한 과거반성을 외치며 한·일 관계개선에 힘을 쏟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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