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리포트] 침대에서 침대까지 늘 연결된 직장인..'단절의 의무'를 도입한 이유?

서경채 기자 2014. 4. 25.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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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파리특파원입니다. 파리에서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침대에서 스마트폰을 봅니다. 회사 정보망에 접속해 회사에서 보내 놓은 지시 사항을 확인합니다. 사무실에 출근해서 8시뉴스용 기사를 작성하거나 취재를 합니다. 그러다 파리가 한밤중이 되면 새벽 시간인 서울 본사와 다시 통화합니다. 서울 기준으로 아침 뉴스에 사용할 기사를 전송하거나 메인 뉴스에 어떤 기사를 넣을지 데스크와 논의합니다. 자기 전에 침대에서 스마트폰으로 회사 정보망에 또 접속합니다. 달라진 게 없는지 최종 확인하는 겁니다. 스마트폰을 쥔 채 침대에서 시작해 침대에서 끝나는 일상입니다.

서울과 통신수단은 주로 전화이지만, 서울에서 보낸 이메일을 읽고, SNS로 오는 지시에도 답해야 합니다. 사무실 바깥에 있을 때는 스마트폰을 통해 회사 정보망에 접속해 여러 가지 정보나 지시를 수시로 확인합니다. 스마트폰 접속은 습관을 넘어 중독 수준입니다. 사무실에서 노트북을 쓰면서도 가끔은 스마트폰을 꺼내 회사 망에 접속하기 위해 비밀번호를 누르는 저 자신을 보고 스스로 놀라기도 합니다. 디지털기기 발전이 가져온 부작용(?)일 겁니다. 회사와 연결성은 높아졌지만, 근무시간은 더 빡빡하고 길어졌습니다. 디지털시대에 사는 직장인 대부분이 겪는 문제입니다. 연결이라는 '필요'가 이제는 '피로'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도 디지털기기가 일반화되면서 직장인은 회사가 보낸 이메일에 늘 매여 있습니다. 업무 시간이 끝나도 회사가 메일을 보내면 직장인은 읽고 답해야 하는 의무 아닌 의무가 생겼습니다. 퇴근의 경계가 불분명해지면서 업무 시간은 자연스럽게 길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노동자의 건강이 나빠지고 개인의 행복이 무너진다는 비판이 나왔습니다.

고민 끝에 프랑스 노사는 '단절의 의무'를 시행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생소한 개념인데요, 단절이라는 말뜻 그대로 회사가 직장인과 일시적으로 연결을 끊겠다는 겁니다. 법으로 강제한 것이 아니므로 프랑스의 모든 직장인들이 이 혜택을 보는 것은 아닙니다. 엔지니어링, IT, 컨설팅 분야의 노사 대표가 합의했습니다. 해당 분야에 근무하는 직장인 약 25만명이 대상자입니다. 통상 근무자가 아닌 주로 연간 계약을 맺고 자기 스케줄대로 일하는 직장인입니다. 이들은 프랑스의 법정 근무시간인 주당 35시간을 초과해 일하고 있어 건강을 해치고 있다는 지적을 받아 왔습니다. 그래서 하루에 최소 11시간을 '계속' 쉴 수 있게 해 줘야 한다는 게 합의의 핵심입니다. 이 휴식 시간을 보장하려면 회사는 업무시간 외에는 전화나 이메일로 연락 해서는 안 된다는 거죠.

노조는 단절의 의무가 적용된다고 해서 "회사 사업이 축소되거나 새로운 문제를 야기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가뜩이나 어려운 프랑스 경제 사정을 감안해 기업의 경쟁력을 유지하면서 문제를 풀어가자는 의도입니다. 노사는 개별 회사의 사정과 정책에 맞게 단절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로 했습니다. 예를 들면, 일정 시간대에는 회사 이메일 서버를 강제로 폐쇄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또, 퇴근 시간 이후나 특정 시간대에는 회사가 직장인들에게 회사 이메일을 확인하지 않아도 된다고 권고할 수도 있습니다.

이 제도는 프랑스가 처음이 아닙니다. 독일 자동차 회사인 폭스바겐이 2011년 가장 먼저 시행했다고 합니다. 회사는 업무가 종료되면 회사 서버를 폐쇄해, 회사 관리자들이 이메일을 보내고 받지 못하게 했습니다. BMW, 푸마 같은 회사도 유사한 조치를 취했습니다. 이후 독일 노동부는 노동자의 과로를 막기 위해 비상시를 제외하고는 일과 후에는 관리자들이 메일을 보내고 전화하는 행위를 금지시켰습니다. 독일 노동부 장관은 "기술이 인간을 통제하고 삶을 지배하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기술을 통제해야 한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디지털 강국인 대한민국도 기술의 진보만을 찬양할 것이 아니라, 일과 삶의 조화라는 근본 물음에 응답할 때가 됐습니다.서경채 기자 seokc@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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