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은 자기 이름에 숯검댕이를 묻혔던 분

입력 2014. 4. 20.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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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간송미술관장 전영우

성북동에 있다고 해서, 높다란 담장이 성벽처럼 둘러싼 저택일 줄 알았다. 미술관 팻말이 크게 붙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성북초등학교와 담장을 마주하고 있는 간송미술관 입구는 생각보다 수수했다. 차 한 대가 겨우 들어가는 골목 어귀, 간송가의 장손인 전인건(43·간송미술문화재단 사무국장)이 나와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복장이 이래서 죄송합니다.”

흙투성이 작업화를 가리키며 그가 말했다. 서울 방학동에 간송 전형필의 100년 넘은 구옥을 문화재로 등록했는데 그 보수 현장을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전인건의 안내로 완만한 언덕길을 따라 올라갔다. 개나리와 진달래, 목련이 흐드러지게 어우러지고 신록이 움트는 숲 군데군데 간송이 수집한 석조 유물들이 놓여 있었다. 귀한 보물이 가득했지만, 특별히 공들여 관리한 정원이라기보다는 흔히 볼 수 있는 고향집 뒷산, 작은 암자에 오르는 길같이 담담하고 고즈넉했다.

우리나라 최고의 문화재 수장가 간송 전형필의 자손들,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떻게 사는 사람들일까 궁금했다. 서울 도심이라곤 믿어지지 않는 이 적요하고 오래된 집터에 은거하듯 살아온 이들. 간송은 일제 식민통치에 맞서는 방편으로 조선의 문화재 지킴이를 자처했다지만, 간송이 남긴 유물을 평생 지키고 살아온 후대의 생각은 어떤 걸까. 모든 것을 돈으로 사고파는 자본주의 시대, 그들이 지키고자 한 건 과연 무엇이었을까. 기대와 불안이 엇갈리는 마음을 안고 전영우 간송미술관장 자택 문을 두드렸다.

삼성이나 현대에 넘어간다는
별별 루머에 휩싸인 적이 많다
비슷한 제안이야 왜 없었겠나
신세 지는 걸 별로 안 좋아해
공짜로 해준다는 게 젤 무섭다

수줍음을 정말 많이 타고
본인 드러내길 싫어했던 간송
집집마다 문패달기 캠페인 할 때
이름이 너무 잘 보인단 이유로
문패에 숯검댕이까지 묻혔으니

가난한 집 제삿날처럼 다가오던 전시회

-국보급 간송 문화재들이 대거 외부로 반출되어, 요즘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공개 전시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보화각(간송미술관의 전신)이 세워진 지 76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인데 애지중지하던 보물들을 밖으로 시집보낸 심경이 어떤가?

“전시는 (간송미술관에서도) 40여년 동안 봄가을로 계속했기 때문에 전시 자체의 두려움은 크게 없는데, 전혀 다른 환경에서 전시가 이뤄지게 되니 생소하다. 아마 유물들 스스로도 생소해할 거다.(웃음) 사실 처음 가봤을 땐 아주 암담했다. 디디피(DDP)라는 건물 자체가 상상을 초월하는 디자인 건물이라서 엘리베이터 빼놓고는 수직 수평도 없고, 창문도 자빠졌지, 천장은 돔이지… 이걸 어떻게 전시해야 하나 감이 안 잡혀 가지고 처음엔 황당했는데, 여럿이 머리 맞대고 하다 보니까 지금의 디스플레이가 결정이 됐다.”

-간송미술관 전시는 늘 무료였는데, 작년에 간송미술문화재단 설립하고 이번에 외부에 공개 전시하면서 입장료를 받고 있다. 간송가가 문화재를 다루는 방식을 바꾸려는 것으로 이해해도 되나?

“입장료는 우리가 받겠다고 해서 받는 게 아니다. 디디피가 보안에 드는 경비문제도 있고 하니 책정한 거다. 원래 하던 대로 봄가을 간송 전시회는 무료로 계속할 거다. 우리가 대외 공개 전시를 시작한 게 71년인데, 처음엔 공개한들 여기 누가 올까, 몇 명이나 올까 걱정했다. 당시엔 일반 대중을 위한 전시라기보다는 학계나 전공자들에 대한 자료제공의 의미가 강했다. 그러다가 참 우연찮은 기회에 대중적인 소문이 나가지고, 이상한 드라마 한 편 때문에….(웃음)”

-아, 신윤복이 여자였다고 가정한 티브이 드라마 말인가?

“그 드라마를 할 때 우연히 우리가 혜원(신윤복 전)을 하고 있었거든. 그때 만약 우리가 추사 같은 걸 하고 있었으면 상관이 없었을 텐데.(웃음) 마침 타이밍이 그렇게 맞는 바람에 ‘혜원 미인도 실물 좀 보자’ 하고 관람객들이 몇 백 미터씩 줄을 서면서 쇄도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 이 시설만으론 더 버틸 재간이 없을 정도로 관람객이 자꾸 늘고 요구도 다양해져서 이제는 관람객들을 위해서라도 변화를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생각했다. 간송 미술작품이 대거 출장전시를 하게 된 건 이런 시대의 변화다.”

-간송미술관은 전시에 인색하고 폐쇄적이라는 비판을 들어왔다. 2005년에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님이 인터뷰를 하면서 간송박물관은 “첫째가 수집과 보존, 둘째가 연구, 셋째가 전시”란 얘기를 하셨던데, 같은 생각이신가?

“수집-보존-연구-전시라는 건 미술관, 박물관의 하나의 정석이다. 학교에서 공부할 때도 그렇게 배웠다. 단순한 전시만을 위한 전시가 아니라, 선행돼야 할 것이, 보존도 해야 하고, 연구도 해야 한다. 우린 그렇게 배워왔고 그렇게 실천하고 있다.”

-간송은 보존에 특별히 신경을 쓰는 것 같다.

“요즘 박물관은 뭐 항습, 항온 기계 그런 거 다 있다. 그런데 옛날 사람들이 보관하던 건 다 썩었나? 그건 절대 아니다. “포쇄”라고 해서 볕 좋은 날 작품 풀어서 그늘에서 말리기도 하고, ‘거풍’을 해서 바람 쐬고 해충을 방지하기도 한다. 그리고 족자는 돌돌 잘 말면 꽉 압축이 돼가지고 보관이 잘된다. 요새 유리(액자에) 끼고 그러는 게 더 오래 못 간다. 특히 형광등 밑에 두면 나중에 다 날아간다. 국립박물관 초창기에는 여건이 안 돼서 그랬겠지만 형광등을 썼었다. 단원의 <마상청앵도>(馬上聽鶯圖)라고, 선비가 버드나무 아래서 꾀꼬리 우는 걸 보는 유명한 작품인데 꾀꼬리가 노랗지 않나? 근데 그게 형광등 받아서 노란 게 아니라 허옇게 됐다.(웃음)”

우리 그림은 아무리 최첨단의 시설을 쓰더라도 전시관에 오래 나가 있으면 보존이 쉽지 않다는 주장이다. 서양화와 달리, 두루마리나 화첩은 접은 채로 수장고에 보관해 두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라고. 간송미술관은 가급적 전통적 방식의 보관과 전시방식을 지키려 한다. 그러자니 연간 300일의 개방전시 요건을 충족할 수 없어 간송미술관은 여전히 국내 미등록 미술관으로 남아 있다.

-요즘엔 문화재나 예술품이 부유층 재테크의 도구로 이용되는 경우가 많다. 재산 축적이나 상속, 절세의 수단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재테크는 무슨… 돈만 짜내는 게.(웃음) 옛말에, 가난한 집 제삿날 자꾸 돌아온다고, 전시회 겨우 마련해서 봄 전시 끝나고 한숨 돌리면 가을 전시 또 되지. 그래도 안 할 수는 없는 상황이고. 그동안 정말 어려운 시절이었다. 지금도 크게 달라진 건 없지만… 경제적으로 뒷받침이 없는 상황에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오일장 치른 뒤부터 달려온 빚쟁이들

-간송이 일찍이 “십만석지기” 대부호였던 사람인데, 돌아가시면서 유물을 관리하는 데 쓸 유산은 남기셨을 것 아닌가?

“내가 대학 4학년 때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형님(전성우 이사장)은 유학 가 있고, 상주는 나 혼잔데. 문상객들이 상주한테 절하면 나도 절해야 되는데, 하도 (절을) 해서 허리가 부어서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그렇게 초상을 치렀다. 5일장을 치렀는데, 아 이제 한숨 돌린다 그랬더니 정확하게 5일장 치른 다음부터 이상한 거다.”

-무슨…?

“빚쟁이들이 그때부터 등장하는데, 살고 싶지 않더라. 악몽 같았다….”

간송 가문의 재력의 원천은 원래 서울 주변과 황해도, 충청도 등지의 농지와 배오개(종로4가) 상권이었다. 재산의 상당부분을 일제하 문화재를 구입하고 민족사학 보성고보를 인수하는 데 쓰고 해방 후 농지개혁으로 토지의 대부분을 잃어버린 터에, 배오개 상권은 유일하게 현금이 들어오는 수입원이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직후 입주 상인들이 가겟세를 낼 형편이 못 된다고 하면서 그마저도 돈줄이 막혀버린 상태였다.

-그래서 가겟세를 깎아주셨나?

“깎아준 게 아니라 못 내겠다고 버티면 그냥 못 받는 거지. 간송이 그런 분이다.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가겟세는 못 받아도 세금은 꼬박꼬박 나오니까, 빚을 내서라도 세금 내고 그게 누적이 되니 사채 빚이 불어난 거다. 집안에 남자는 나 혼자 남았는데, 부채 청산을 위해 선대로부터 살아온 배오개 간송 생가를 처분할 수밖에…. 그걸로 끝나나? 세무서에서 상속세를 내야 한다고, 문화재 상속이라는 게 대한민국에서 있어본 일이 없는데, 그냥 넘어갈 수 없다 해서. 우리가 문화재 상속세 1호로 상속세를 냈다.”

서울대 미대 4학년이던 영우는 아버지 뒤를 이어 간송 수장품들을 관리하기 위해서 서울대 고고학과에 다시 편입해 졸업했다. 그에게 간송 문화재는 값으로 따질 수 있는 귀중품이 아니라 돈을 쏟아부으며 관리해야 하는 평생의 “업”이 되었다.

-집안에 보물이 가득한데, 하나만 팔아도 사채 안 쓰고 집 안 팔아도 되는 것 아니었나?

“그런 소리 숱하게 들었다. ‘눈 딱 감고 (청자상감)운학문매병 들고 나가, 그러면 끝나는데 왜 고생하냐’고. 그럼 나도 그런다. ‘그럴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냐’고.(웃음)”

-실제로 일부 매각을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은 없나?

“그간 별별 루머에 휩싸인 적이 많다. 삼성에 넘어간다, 현대에 넘어간다, 대우에 넘어간다, 문선명재단으로 넘어간다, 지금 어느 호텔에 아무개가 나와서 계약을 오늘 한다… 별 소문이 다 도는데 일일이 대꾸할 수도 없고.”

-실제로 그런 제안을 받은 적은 없나?

“비슷한 제안이야 왜 없었겠나? 그렇지만 처음부터 우리는 아예 그런 생각을 안 하니까. 간송 때도 그랬지만, 우린 남 신세 지는 걸 별로 안 좋아해서, 남이 공짜로 뭐 해주겠다는 게 난 제일 무섭다. 옛날부터 간송미술관 지어주겠다는 독지가도 있었는데 ‘아무 조건 없냐?’ 그러면, 조건은 없고 이사장만 자기 주면 된다는 사람도 있고….”

-작년에 간송미술문화재단을 만들면서 후손들이 가진 소유권을 재단으로 이전하기로 했는데 이 결정을 하는 과정에서 형제간 갈등이나 이견은 없었나?

“(단호하게) 이견이 있을 수가 없지. 아버님의 일을 같이 분담해서 하는데 이견은 무슨….”

-그래도 두 분 중 한 분이, 이거 저거 팔자 하는 사람이었으면 합의가 곤란했을 텐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런 사람은 없다.(웃음)”

곁에 있던 조카 전인건이 ‘두 분이 미술관을 맡으신 이후 종이 한 장 밖으로 나간 게 없다’고 나직이 덧붙인다.

-일반인들은 간송가가 여전히 상당한 재력을 갖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서울 중심에 이렇게 넓은 땅을 갖고 있고, 전시회 입장료도 안 받고, 국고보조를 받는 것도 없고, 경매를 하는 것도 아닌데 수십년째 끌고 가니….(웃음)

“어떻게 보면 일만 잔뜩 하고 오해를 사는 거다. 자꾸 우리를 부호, 부호 하는데 난 이 나이 될 때까지 우리 집안이 돈 있고 부자라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고 부유한 삶을 산 적도 없다. 간송 살아 계실 때 양복점에서 새 옷을 맞춰 입는 걸 본 적이 없다. 나 대학 들어갈 때 양복 해준 적은 있지만 본인은 한 번도 맞춘 적이 없어서 ‘골동품 1호’라고 불렸는데.(웃음)”

-그렇지만 밖에서는 <훈민정음>(국보 70호) 같은 경우 부르는 값의 열 배도 더 쳐서 주시고 호탕하게….

“그건 그 정도로 엄청난 금액을 제시해야 앞으로 좋은 물건이 모일 거라는 걸 알아서지, 호탕하게 돈 쓰길 좋아해서가 아니다.”

-아하! 일본인한테 가지고 가는 것보다 여기가 후하다고 소문 내려고….

“그렇다.”

-해방 후에는 더 이상 수집은 안 하셨나?

“해방 이후 본격적인 수집은 거의 스톱이었다. 그때야 무슨 상관 있나, 일본인 아니면 누가 사도 (문화재가) 우리 땅에 있을 거니까. 굳이 사려고 하지 않으셨고. 우리는 우리대로 수집은커녕 관리도 죽을 맛이니….”

한국의 미 키워드는 온건·조촐·청초

-간송이 문화재 수집에 뛰어든 시기는 전시체제가 강화되고 민족말살정책이 본격화하던 1930년대다. 뭔가 뜻있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재력이 필요하고, 재력을 유지하려면 권력에 타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사회지도층이나 지식인들 사이엔 특히 그런 논리가 강한데….

“간송의 삶을 보면 특이한 게, 정치에 몸담고 있는 분하고의 교류가 거의 없다. 지금 생각해보면 격동의 한국사를 거치면서 왜 분개할 일이 없었겠으며, 사회 돌아가는 기막힌 참상을 목격하면서 거기에 대한 비판의 생각이 왜 없었겠나? 그런데 격동기, 해방 이후 내려오면서 끔찍한 한국전쟁도 겪고 정계의 수많은 모순을 보면서도 단 한마디 언급하신 일이 없다. 고의적으로 정치적인 인맥관계는 피하신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 처신이 사회적인 무리에 연루되지 않는 하나의 방법이었는지도 모르겠고….”

-일제 때 뜻을 같이하고 가깝게 교유하셨던 위창 오세창 선생이나 춘곡 고희동 화백도 해방 후엔 정치에 참여하셨는데, 간송은 늘 제자리만 지키셨다.

“그 점에 대해서는, 간송의 개인적인 성품이 얘기되지 않을 수 없다. 결론부터 말하면, 간송은 수줍음을 많이 타는 분이고, 본인을 드러내는 걸 참 싫어하셨다. 요새 유행어로 매스컴을 타본 일이 없고, 단 한번 나간 게 부고 사진밖에 없다고 한다. 몇 년도던가, 우편행정을 위해서 집마다 문패 달기 캠페인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종로4가 생가에 사실 땐데, 열심히 손수 대패질을 해가지고 문패를 새겨서 걸었다. 조금 있더니 다시 나가 가지고 문패를 떼더니 부엌에 가서 행주에 숯검댕이를 묻혀서 쓱 문지르더라. ‘왜 그러시냐?’ 했더니, ‘아니, 이름이 너무 잘 보여.’(웃음) 결국 숯으로 잘 안 보이게 만든 후에야 문패를 걸었던 기억이 난다. 남이 알아보는 거, 남 관심의 초점이 되는 걸 싫어하고 부끄러워하셨다.”

-그런 아버님의 삶의 방식이 두 아드님한테 그대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난 엄청 반발했다. 난 절대 저런 삶 안 산다. 근데 이 나이 먹고 보니 똑같이 살고 있더라고….(웃음)”

얼굴을 구기고 그가 소년처럼 웃었다. 그가 앉은 낡은 천소파 주변으로 목가구와 액자, 박쥐 모양의 붓걸이와 작은 소품들이 오순도순 모여 있었다. 따지고 보면 값비싼 물건들일 테지만, 위압감은 전혀 들지 않는 정겹고 푸근한 공간이었다.

-미술과 고고학을 전공하시고 간송미술관의 한국민족미술연구소를 오랫동안 이끄셨다. 미술사학자로서 한국의 미를 대표하는 키워드는 뭐라고 보시나?

“자금성 갔다 온 어떤 사람은 그런다. ‘우리 창덕궁은 자금성 화장실만하데.’ 자금성 같은 것은 땅을 밀어버리고 설계도대로 집을 짓는다. 산 없어? 그럼 산 쌓고…. 자연의 변괴다. 우리는 다르다. 아름다운 자연 배경이 있으면 그 안에 어울리게 집을 짓는다. 자연 속으로 들어가는 거다. 또 일본은 축소지향이라고, 예쁘게 만들어 놓고, 금각사 은각사 컬러풀하고 정교하게 만든다. 삼국을 비교해보면 우리 것이 뭔지 알 수 있다. 첫째, 과장되지 않고, 남 앞에 자랑한다든지, 스케일이나 컬러풀함을 과시한다든가 그런 게 전혀 없다. 혜곡 최순우 선생의 표현을 빌리면 온건, 조촐, 청초한 거다.”

절대 과장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면서 부드럽게 스며드는 한국의 미. 그런 예술품이 그걸 바라보는 사람을 온건하고 부드럽고 검박하게 만드는 것일까, 그런 사람이 그런 유물의 예술적 가치를 찾아내 발굴하는 것일까. 순서는 알 수 없지만, 성북동 간송가의 정원과 사람과 그들의 이야기는 그들이 간직해온 한국의 보물들과 닮아 있다. 일어서며 찻잔을 정리하려니 전영우 관장이 손사래를 친다.

“그냥 두세요. 어차피 내가 치울 건데. 나 이런 거 익숙해요. 내가 주부습진도 걸렸다고 하면 왜 사람들이 안 믿나 몰라… 하하하.”

녹취 김혜영(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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