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도 믿을 수 없고.. 정말 미쳐버리겠어요"

백철 기자 입력 2014. 4. 19. 16:18 수정 2014. 4. 19.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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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몰한 여객선 '세월호'의 선체가 완전히 물 속에 잠겼다. 1분 1초가 아쉬운데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간다.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실종자 가족들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내 아들이, 딸이, 동생이 살아 돌아올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부의 대응은 굼뜨기만 하다. 침몰한 지 수십시간이 지나도록 왜 한 명도 구조를 못하는지, 정말 배 안에 사람이 있긴 있는 건지, 구조상황을 제대로 알려주지도 않는다.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 계속 되는 동안 실종자 가족들의 가슴은 까맣게 타들어 간다. 이를 지켜보는 국민들의 슬픔도 깊어간다.

세월호 침몰사건 실종자 가족 권오복씨(59)는 4월 17일 저녁 진도 실내체육관 건물 안에 설치된 매트에 앉아 있었다. 권씨의 눈 밑엔 가무잡잡한 다크서클이 져 있었다. 오랫동안 잠을 이루지 못한 듯 보였다.

바닥을 한 번 내려다보고 한숨을 내쉰 권씨는 옆에 앉아 있는 조카딸 지연양(5)을 쳐다봤다. 눈에 애처로운 기색이 역력했다. 지연양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지만 동생과 제수, 조카는 30시간이 넘게 생사를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대통령 방문 때 얼굴 보기 싫어 나와버렸어요

권씨는 혹시라도 생존자 소식이 들려올까 체육관 건물 앞에 설치된 뉴스 스크린과 자신의 자리를 계속해서 오갔다. 조금 어두운 표정으로 말을 이어가던 권씨가 갑자기 고개를 들고 눈을 번쩍 떴다. 어딘가에서 3명이 새롭게 발견됐다는 말이 들려왔다.

권씨는 지나가던 사람들에게 "누구야? 살았대?"라고 큰소리로 물었다. 누군가 "시체가 발견됐어요"라고 말했다. 듣고 싶은 답이 아니었던 듯 권씨는 원래 표정으로 돌아왔다.

권씨의 동생인 실종자 권재근씨(48)는 늦깎이 신랑이었다. 7년 전 베트남 신부 한윤지씨(29)와 결혼한 뒤 서울 강북구의 월세방에서 살며 청소일 등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동생이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새 삶을 살기 위해 조금씩 제주시 한림읍의 땅을 사 모았다. 이제야 일가족이 먹고 살 만큼 감귤 농장을 만들었는데…."

이날 권재근씨 가족은 서울 생활을 완전히 청산하고 제주도로 이사를 가는 길이었다.

권오복씨는 세월호가 인천항을 떠나던 15일, 동생과 함께 점심식사를 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동생이 갑자기 사정이 생겼다며 일찍 배를 타는 바람에 나중에 식사를 함께하기로 약속했다. 그는 "원래 동생이 제주도와 서울을 자주 오가는 터라 별다른 생각은 없었다"고 말했다.

그게 동생과의 마지막 통화가 됐다.

동생 가족이 탄 6000톤 급 대형 여객선 세월호는 16일 오전 전남 진도군 해상에서 침몰했다. 오전 8시 50분쯤 '쿵' 소리와 함께 배가 기울기 시작했고, 2시간여 만에 완전히 거꾸로 넘어졌다.

해경은 세월호가 항로를 변경하는 과정에서 급격하게 뱃머리를 돌리다 1·2층에 실린 화물 컨테이너와 승용차 등이 한쪽으로 쏠리면서 전복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476명의 승객 중 19일 오전 0시 현재 174명은 구조됐지만 29명은 살아돌아오지 못했다. 273명의 생사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권씨는 아직도 동생이 왜 갑자기 아침 배를 탔어야만 했는지 알지 못한다.

권씨 가족들은 정부와 언론에 대해 깊은 불신감을 드러냈다. "정부가 열심히 실종자 구조에 나서는 것처럼 언론에서 호도하고 있다"는 게 가족들의 설명이다. 조카인 지연양이 병원에 있을 때 기자 여러 명이 마이크를 들이대며 '반응'을 요구했던 것 역시 가족들에겐 충격이었다. 지연양의 병실에 기자들이 계속 몰려드는 통에 결국 권씨 가족은 조카를 실내체육관으로 데리고 올 수밖에 없었다.

17일 오후 4시 20분쯤 박근혜 대통령이 진도 실내체육관 현장을 찾았다. 박 대통령은 "여러분께 신뢰를 받을 수 있도록, 마지막 한 분까지 구조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권씨는 "대통령이 왔을 때 얼굴조차 보기 싫어서 밖에 나와 있었다"고 말했다. "사건이 터진 지 30시간이 지났는데 왜 단 1명도 구조를 못하는 것인지, 정말 배 안에 사람이 있긴 있는 건지, 실종자와 생존자 현황은 어떻게 되는 건지 가족들에게도 제대로 정보를 알려주지 않고 있다. 가족 입장에선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권씨는 "오랫동안 힘들게 살던 동생이 이제야 좀 여유가 생겼는데, 마지막 순간에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라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18일 오전 진도 팽목항에서 세월호 실종자 가족들이 실종자들의 무사귀환을 기원하고 있다./김창길 기자

"우리 애한테서 메시지가 왔어요"

500명이 넘는 실종자 가족들이 모여 있는 진도 실내체육관은 눈물과 흐느낌, 오열이 끊이지 않았다. 어떤 어머니는 오열하다 실신해 실려나갔고, 어떤 어머니는 자식이 빠져 있는 바닷가로 나가 하염없이 바다만 바라만 보고 있었다. 어떤 아버지는 실종자 명단을 확인하다 그만 고개를 파묻고 울어버렸다.

그래도 이들을 버티게 만드는 것은 아들이, 딸이, 동생이 살아돌아올 거라는 믿음 하나였다. 그 믿음은 시간이 흘러도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다.

어쩌다 한 번씩 "우리 애한테서 메시지가 왔다"며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비명소리가 터지면 다른 가족들과 취재진이 몰려들었다. 살아 있다고 믿고 싶은 마음은 그렇게 메시지를 보내왔고, 그걸 믿고 싶은 다른 가족들도 기꺼이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잔인한 희망고문이었지만 가족들은 결코 그 싸움에서 질 수 없다는 듯 희망을 놓지 않았다.

실종된 단원고 여학생의 엄마인 40대 ㄱ씨도 그랬다. ㄱ씨는 주위에서 배 안의 생존자들이 문자와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내온다는 말을 믿고 딸을 찾을 수 있으리란 희망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17일 오전 경찰은 생존자가 보냈다는 메시지의 대부분이 허위라고 발표했다. 그래도 ㄱ씨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가족들은 누가 하는 말이라도 1%도 믿지 못한다. 가족들이 보는 상황하고 밖에 사람들이 보는 것이 너무 다르다. 많은 아이들이 아직도 배 안에서 고통스러워하며 문자와 전화를 통해 가족들에게 살려달라고 하는데 해경이 너무 굼뜨다는 생각만 든다. 오늘 오전부터 우리 애 핸드폰이 꺼져 있다고 나오는데 아무리 마음을 좋게 먹으려고 해도 정말 미쳐 버리겠다. 이젠 오히려 갑자기 전화가 올까봐서 무섭다."

하지만 가족들이 기다리던 소식은 들려올 줄 몰랐다. 밤 9시쯤 한 30대 여성이 울음을 터뜨렸다. 이날 아침까지만 해도 실종된 남편이 문자를 보냈다고 주장하던 여성이었다. 새로 발견된 시신이 남편의 것일 수도 있다는 말에 그 여성은 울음을 터뜨리며 멍한 눈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주변 사람들이 "남편을 찾았냐?"고 물었다. 이 여성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입을 벌린 채 멀뚱멀뚱 눈물만 흘렸다. 잠시 후 체육관 앞에서 대기하던 응급차가 50대로 보이는 또 다른 여성을 급히 실어 날랐다. 발견된 시신 중에 자신의 가족이 있다는 말을 들은 모양이다

사망자 시신이 발견될 때마다 가족들은 누구 할 것 없이 절망의 끝을 경험한다. 답답한 마음은 조급해지고, 조급한 마음은 분노로 폭발한다.

지난 18일 진도 실내체육관에서 세월호 실종자 가족들이 구조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 김창길 기자

"민간 잠수부 포상금이라도 걸어라"

단원고 학생의 한 아버지는 "살아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시간싸움인데, 구조를 서둘러야 하는데, 해경의 답답한 구조에 분통이 터진다"며 눈물을 쏟았다.

또 다른 어머니도 "아기들이 살아 있으니까 어서 구하러 가야지 말로만 작업을 하느냐"며 "아이들이 물속에서 떨고 있다"며 더딘 구조작업에 애를 태웠다. 실종자 가족들 사이에서는 민간 잠수부들에게 포상금을 주는 한이 있더라도 실종자 수색에 빨리 나서달라는 목소리까지 나왔다.

실종자 가족 권오복씨는 "17일 저녁부터 (생존자들을 살리기 위해) 배 안에 공기를 집어넣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실종자들이 살아 돌아올 확률은 줄어든다. 그런 생각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진다. 어떤 실종자 가족은 "하늘이 돕지 않는 한 어렵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그래도 이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아니 버릴 수 없다. 아이들이 저 차가운 바닷속에 있기에.

"저희가 애타는 부분이 지금도 배 가운데 식당칸이나 오락실에 있는 아이들은 살아 있다고 믿고 있어요. 1분 1초가 급한 부분이기 때문에 지금 물살이 세고 컴컴하긴 하지만 더 많은 잠수부들을 투입시켜서 배 안에 들어가 그 결과를 가족들에게 알려줬으면 좋겠어요."

< 선장보다 용감했던 고 박지영씨 >

17일 아침 목포 한국병원. 고 박지영씨(22)의 장례식장엔 영정사진도 없이 위패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 옆에 목포시청에서 보낸 조화 하나가 있었다. 박씨의 홀어머니는 건강이 악화돼 빈소는 이모부인 김정길씨가 지키고 있었다.

청해진해운 매점 직원이었던 박씨는 마지막 순간까지 학생들을 대피시키다 끝내 목숨을 잃고 말았다. 선장과 선원들은 도망쳤지만 박씨는 자신이 해야 할 역할 그 이상을 해냈다.

선실 3층까지 물이 차오르는 긴박한 순간에도 침착하게 승객들을 대피시켰다. 마지막 구명조끼마저 학생에게 양보했다. 생존자들은 "학생들이 걱정하자 '선원은 맨 마지막이다. 너희들을 다 보낸 뒤 나도 따라가겠다'며 바다로 먼저 뛰어내리게 했다"고 말했다.

그녀의 지시를 따른 승객들은 모두 구조됐지만 맨마지막을 지키던 박씨는 살아돌아오지 못했다.

초라한 빈소를 지키던 이모부 김씨는 박씨가 3년간 다녔던 회사에서 연락 한 번 없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솔직히 목포시장은 지영이랑 직접 관계가 없는 분임에도 불구하고 직접 빈소도 찾아 오셨고 조화도 보내왔다. 그런데 청해진해운 사람들은 얼굴을 비치기는커녕 전화 한 통화도 없다."

김씨는 아직도 그렇게 일을 좋아하고 어머니와 동생 뒷바라지에 여념이 없던 책임감 강한 조카가 죽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는다고 했다.

먼저 세월호에서 탈출한 이준석 선장에게 화를 내던 김씨는 조카를 영웅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사고의 철저한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조카를 영웅으로 봐주시는 것은 고맙다. 하지만 왜 우리 조카 혼자서 1시간 가까이 배 안에서 구조활동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는 따져봐야 한다."

< 백철 기자 pudmaker@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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