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가 날 버려도 여기선 영웅".. 게임으로 도피한 어른들

2014. 4. 17. 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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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살해한 게임아빠 충격.. 청소년보다 더 위험한 '성인의 중독'

[동아일보]

대구 북구에 사는 주부 A 씨(34)는 온라인 전략시뮬레이션 게임 '스타크래프트'만 생각하면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그의 남편이 직장에서의 스트레스를 푼다며 스타크래프트에 빠져들면서 퇴근 후엔 식사도 않고 외동딸 얼굴조차 보지 않은 채 컴퓨터에만 매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A 씨는 남편이 게임에 몰두하는 것을 막기 위해 다투기도, 컴퓨터를 없애보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는 "이웃들이 '좋은 회사 다니는 남편 둬서 좋겠다'고 할 때면 억장이 무너진다"고 말했다.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사이버 공간에 매달리는 어른의 한 단면이다.

○ 게임 안에 '나만의 공간'이 있다.

지난달 7일 경북 구미에서 "게임을 하러 가야 하는데 자지 않았다"는 이유로 28개월 된 아들을 살해한 정모 씨(22)의 사건 이후 청소년들의 주된 문제였던 게임 중독 현상이 '성인'과 '부모 세대'에까지 확산된 것으로 확인됐다. 16일 새벽 동아일보 취재팀이 서울 시내 PC방 6곳을 방문해 보니 밤 12시가 넘은 시간인데도 많은 성인이 게임에 심취해 있었다.

구로구 구로동의 한 PC방에 있던 정모 씨(36)는 매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6시까지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게임에 매달렸다고 했다. 그는 "대학을 졸업했지만 취업에 실패해 게임으로 시간을 보낸다. 말수가 적고 붙임성도 없던 나에게 게임은 유일하게 주위에서 인정받는 수단이었다"고 말했다.

서대문구 신촌동 PC방의 한 대학생(23)은 "나 스스로 '중독됐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게임을 하는 순간만큼은 공부나 취업 같은 고민을 잊을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가정과 회사에서 소외된 중장년층 남성도 게임 중독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다. 한국정보화진흥원 인터넷중독 상담사는 "40, 50대의 경우 게임 공간에서 가정과 회사의 소외를 극복하려는 사례가 많았다"며 "지난해 4월경 센터를 찾은 한 50대 대기업 퇴직자는 하루 종일 '리그 오브 레전드' 게임을 하며 자녀들에게도 자신의 온라인상 레벨에 대해 자랑하다 폭력까지 행사했다"고 말했다.

○ 게임 공간으로의 도피

미래창조과학부와 한국정보화진흥원이 지난달 발표한 '2013년 인터넷 중독 실태조사'에 따르면 만 20세 이상 성인 중독 위험군 비율은 5.9%, 144만여 명에 달했다. 8만9000명으로 집계된 50대 중독 위험군은 이번에 최초로 조사된 수치다. 정보화진흥원은 중장년층의 인터넷 중독 위험성 확대를 반영해 2010년 이전까지 만 39세, 2011년 만 29세, 2013년 만 54세로 조사 대상 연령을 높여 왔다.

성인들이 주로 빠져드는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의 특성은 남들에게 즉각적으로 성취감이 공개되고 게임상 동료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점으로 요약된다. 전문가들은 성인 게임 중독 문제의 특징적인 원인으로 '성인 사회화의 실패'를 꼽았다. 학업 스트레스 해소가 주된 원인인 청소년 게임 중독과 달리 성인의 경우 △결혼 및 가정생활로의 정상적인 이행 실패 △대학이나 직장 등 사회 활동에서의 부적응이 '게임 공간으로의 도피'를 낳는다는 지적이다. 구미에서 두 살배기 아들을 살해한 정 씨의 경우 두 가지 요건에 모두 해당됐다. 그는 고등학생 때 만난 아내와 결혼해 아들을 낳았지만 아내가 공장 기숙사에 들어간 뒤 혼자 게임으로 하루를 보내는 등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이어가지 못했고 직업도 없이 사회화에 실패한 대표적 사례였다.

김형근 서울중독심리연구소 소장은 "20대는 취업 실패와 적응 불안, 40, 50대는 진급 누락이나 가정 내 역할 실패 등이 작용한다"며 "세부적인 원인은 다르겠지만 근본적으로 사회적으로 뒤처진 자신에 대한 괴로움을 게임을 통해 벗어나려는 양상은 연령대별로 동일하다"고 분석했다.

곽도영 now@donga.com·홍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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