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범근의 따뜻한 축구] 매번 나를 반겨주는, 손흥민과 펠러를 만나다

2014. 4. 16.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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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요일에 레버쿠젠에 갔다. 곳곳에서 긴장감이 느껴졌다. 감독을 해임시키고 첫 경기다. 챔피언스리그 출전자격을 얻으려면 꼭 이겨야하는 경기였다.

경기 시작 전 VIP 룸에 있는데 루디 펠러가 건너왔다."아…glueckbringer가 왔네!"

'glueckbringer'는 행운을 가지고 오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지난 가을 내가 레버쿠젠에 왔을 때 그날 경기를 가뿐하게 이겼다. 경기가 끝나자 "네가 오니까 이긴다"며 자주 와야겠다며 좋아했다. 그런데 오늘은 어느 때보다 승리가 간절한 터라 그 행운을 내가 다시 가져다주길 바라는 마음이 큰 모양이었다.

"차, 오늘 이기면 매 경기마다 너를 한국에서 모셔 올께!"레버쿠젠에서 아마추어 책임자로 있는 내 친구 겔스도프는 이렇게 더한 말로 나는 부담스럽게 했다.

이런.

가만있어도 괜히 왔다 싶은데 나 때문에 이길 수 있기를 바라고들 있으니!

사실 이렇게 예민한 때에는 나도 별로 나타나고 싶지 않다. 경기 전 분위기가 얼마나 까칠한지 내가 더 잘 안다.

그러나 이미 약속을 해놓은 터라 방법이 없었다. SBS 스태프들도 이런 상황이 부담스러운 눈치였다. 마음껏 촬영을 하기에는 몹시 거북한 분위기다. 내가 선수나 감독으로 현역에 있을 때 경기 전에 불쑥 나타나 생각해서 격려해준다며 "오늘은 꼭 이기라"든지 "꼭 골을 넣으라"든지 하는 아마추어 응원가들을 만나는 일은 정말 괴로웠다.

경기 전에는 서로 보지 않는 게 가장 마음 편하다. 아무런 자극도 받고 싶지 않다. 그래서 집에서 역시 경기 전에는 두리한테 경기 얘기를 하지 않는다. 불문율이다.

그러나 루디 펠러 입장에서는 내가 온다는 걸 알고 있으니 그냥 있기도 좀 뭐했을 것이다. 이렇게 예민할 때는 가급적 경기 얘기는 서로 피한다. 루디나 나나 승부세계에서는 백전노장이라 할 수 있으니까.

그러니 대화는 겉돈다. 서로에게 미안하지 않을 만큼 최소한의 평범한 대화를 이어갈 뿐이다. 나이가 중년을 넘어서다보니 모처럼 친구들을 만나면 튀어나온 배와 듬성듬성한 머리가 가장 먼저 관심 대상이다. 공연한 배만 서로 두들기며 인사치레를 했다. 상황이 그러니 스태프들도 'SBS 따봉'을 해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다.

이기면 나를 한국에서 모셔오겠다던 친구 겔스도프는 프로팀하고는 반발자국쯤 떨어져있는 위치라 긴장의 강도가 좀 덜했다.

1980년에 등 뒤에서 태클을 하다가 겔스도프의 구부린 무릎으로 내 허리를 부딪히는 바람에 요추 뼈가 금이 가는 부상을 당한 적이 있었다. 선수생활을 못할 수도 있다는 우려를 했었다. 난리가 났었다.

프랑크푸르트 팬들이 레버쿠젠으로 몰려가는 바람에 큼지막한 개들을 끌고 다니는 경찰들의 보호 속에서 훈련을 하기도 했고, "우리 아들이 겔스도프를 죽여 버리겠다고 레버쿠젠으로 갔다"며 어떤 아줌마가 신고를 하는 바람에 레버쿠젠은 말할 것도 없고 프랑크푸르트 경찰까지 바짝 긴장을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결국 겔스도프와 나는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고 이제 그런 일들은 기억에서 조차도 완전히 지워져 버린 지 오래된 일이었다.

분데스리가 수비들의 거친 태클은 사실 새삼스러울 것도 의아해 할 것도 없는 일이다. 어찌 보면 내 친구 겔스도프나 내가 운이 없었고 겔스도프는 너무 심하게 괴로움을 당했다. 친구와 함께 경기를 보는 것은 참 오랜만이다.

소리치고 탄성을 토해내는 즐거움은 우리를 20대 그 때로 가져다 놓은 것 같았다. 공연히 심판을 야유하고 박수로만은 모자라서 발도 구르면서 하이파이브로 흥민이의 어시스트를 축하했다.

하하하.

2골을 먼저 넣더니 1골을 먹었다. 베를린이 레버쿠젠을 계속 몰아칠 때는 '나를 행운으로 생각하는데…'. '지면 안되는데…'하는 쓸데없는 욕심에 배나 더 신경이 쓰였다.

경기가 2-1로 끝났다. 정말 다행이다. 감독을 그만두고 난 후 이렇게 용을 쓰고 경기를 본 기억이 까마득하다. 다음부터는 이렇게 코너에 몰린 경기는 보러 오지 말아야겠다.

경기가 끝나고 흥민이가 나왔다. 나를 보자마자 "감독님이 오셔서 이겼다!"며 좋아했다. "감독님 오셔서 더 열심히 하려고 했는데 잘됐는지 모르겠어요."

칭찬해 달라는 얘기인 것 같다. 하하하. 경기가 잘 끝난 탓에 흥민이는 카메라 앞에서 "SBS 따봉!"을 했다. 그런데 어찌나 정신이 없었는지 레버쿠젠에서 뛰고 있는 류승우를 못 챙겼다.

아무래도 내가 어려울 수밖에 없을 터이니 먼저 나나 카메라 앞에 나타나질 못한 것 같다. 내가 먼저 찾아봐야 하는 일인데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SBS 팀은 2주간의 출장을 마치고 오늘 귀국했다. 두리는 브라질의 지코는 그만두고라도 발락을 히츠펠트를 두고 철수한 우리들이 잘 이해가 안가는 모양이다.

이 두 스타들은 두리가 유독 좋아하는 사람들이라서 더 그런 것 같다. 나 역시 전화만 해놓고 그냥 돌아가는 게 미안하다.

오늘 오후에는 나 혼자라도 다시 레버쿠젠에 가서 류승우를 보고 와야겠다. 마음이 짠하다.지난번 아우크스부르크에 있는 아마추어 꼬마는 형들 몰래 백 유로짜리 하나를 더 쥐어줬는데 승우한테도 꼭 그러고 싶다.

레버쿠젠의 방문이 이렇게 혼란스러웠던 적은 처음이다. 흥민이에게도 언제부터 벼르고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못했다.

그러고 보니 용돈도 못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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