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봐야 한다는 여기.. 소문대로네

입력 2014. 1. 7. 11:05 수정 2014. 1. 7.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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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이민선 기자]

낙풍루(동문)

ⓒ 이민선

"이렇게 추울 때는 온돌방 아랫목에 등 대고 있는 게 최곤데"

시간이 멈춘 마을, 낙안읍성(전라남도 순천)에 가면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낙안읍성은 조선시대 지방도시 모습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까짓것 가자, 5시간이면 갈 수 있는데...' 하는 마음으로 2013년 마지막 일요일 아침(29일)에 자동차 시동을 걸었다.

세월이라는 게 참! 내 나이 아직 겨울이 아닌데도 벌써 겨울만 되면 아랫목이 그립다. 아마도, 그 옛날 어린 시절 가족들이 아랫목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던 때를 내 몸이 기억하기 때문일 것이다.

'청춘'이란 이름으로 불릴 때는 하얀 눈만 내리면 몸이 뜨거워져 거리로 뛰쳐나갔다. 이젠, 흰 눈이 거리에 쌓여도,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 퍼져도, 떠오르는 건 아랫목뿐이다. 거리로 뛰쳐나가 환호하는 인파 속에 섞여 있던 게 언제였는지 가물가물하다.

숙소에 미리 짐을 풀어놓고 낙안읍성을 차근차근 둘러볼 요량으로, 도착하자마자 숙소부터 찾았다. 분명 온돌방일 것 같은 봉긋한 지붕의 초가집을 미리 예약해 놓았던 터다. 군불을 지펴 뜨끈해진 온돌방을 기대하며 숙소를 찾아보았지만, 어쩐 일인지 미리 예약한 민박집은 찾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찌 된 것일까? 내비게이션이 가르쳐 준 대로 분명 갔는데도. 어쩔 수 없이 낙안읍성부터 둘러본 다음 숙소를 찾아보기로 하고, 동문 밖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초가지붕 민박집

ⓒ 이민선

성문(동문)을 통과하자 사극에서 보았던 조선 시대 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봉긋봉긋한 초가집이 좌우로 죽 늘어서 있는데, 이엉과 용마름을 새로 이어 하나같이 깔끔한 모습을 하고 있어, 보기만 해도 기분이 상쾌했다.

내비게이션을 보고도 찾을 수 없는 민박집

'대장간'이란 이정표를 보고 반가운 마음에 이정표를 따라 고샅길로 들어섰다. 대장간의 실제 모습이 늘 궁금하던 터였다. 옛날 대장간 모습을 재현해 놓은 곳인 줄만 알았는데, 지금도 무엇인가 만들어 팔고 있는 '진짜 대장간'이라 더 반가웠다.

장인의 포스가 물씬 풍기는 연세 지긋한 대장장이 할아버지가 있어 반가운 마음에 "일하는 모습을 볼 수 있겠느냐"고 묻자 그는 "오늘은 일 끝났다"며 손을 흔들었다. 아쉬운 마음에 부엌칼이라도 살 수 있겠느냐고 하자 그는 나를 쓱 한 번 훑어보더니 "이거 녹스는 칼이라 칼 갈 줄 모르면 쓸 수 없어요"하고는 눈길을 거두었다.

그래도 왔으니 기념으로 하나 살까 하다가 아무래도 대장장이 할아버지 말대로 얼마 안 가 녹슨 채로 방치할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허 참, 대장장이 할아버지는 내가 칼 갈 줄 모른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귀여운 초미니 전기차

ⓒ 이민선

대장간에서 남서쪽으로 걸으니 기와집 한 채가 나온다. 죄인을 가두어 두던 옥사다. 옥사는 옛 지방관아에 딸린 부속사다. 사극에서 보면 대개 옥사는 관아 옆에 있는데, 특이하게도 이곳 옥사는 관아와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 이유를 이곳 향토 학계에서는 풍요로운 곳이다 보니 흉악범이 그리 많지 않아서 그랬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옥사를 지나 다시 남서쪽으로 내려가다 보니 성의 남쪽 문인 쌍청루가 나타났다. 성곽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어 올라보니 낙안읍성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때 내 눈에 띈 것이 있었는데, 바로 예약해 두었던 숙소인 OO민박이다. 초가지붕을 한 민박집이 사진에서 보던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문 부근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제야 난 내비게이션을 보고도 숙소를 찾을 수 없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숙소인 민박집은 성 밖이 아닌 성안에 있었던 것이다. 표를 끊어야 들어올 수 있는 성안에 민박집이 있으리란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하고 성 밖만 빙빙 돌았던 것이다.

당장 민박집으로 가 따뜻한 아랫목에 파고들고 싶었지만, 잠시 참기로 했다. 시간이 멈추어버린 낙안읍성의 정취에 취해 이미 몸이 뜨거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보고 싶은 것 다 보고, 그다음에 숙소에 들기로 했다.

시간이 멈춘 낙안읍성의 정취에 취해

옥사

ⓒ 이민선

성곽 길을 따라 낙안읍성을 한 바퀴 돌기로 했다. 칼바람이 불어왔지만, 낙안읍성의 정취에 취한 때문인지 한기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한기보다는, 왜구를 맞아 '결사항전'하는 조선 병사들의 가쁜 숨소리가 느껴졌다.

낙안읍성 역시 여타의 성과 마찬가지로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성이다.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조선 태조 6년, 낙안출신 의병장 김빈길 장군이 백성들과 함께 토성을 쌓았다. 세월이 흘러 토성이 허물어지자 세종 6년에 석성으로 개축하는 작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성문 앞에 반원형의 성곽이 돌출된 모습이 특이했다. 적들이 성문을 부술 수 없도록 하기 위함인듯했다. 기록을 찾아보니 역시 그랬다. 성문을 부수기 위해 제작된 충차(衝車) 등이 접근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성을 옹성(甕城)이라고 한다. 성곽 주변 약 10m~30m 부근엔 도랑이 패 있는데, 이도 역시 적군을 일차적으로 막기 위한 방비였다. 이를 해자(垓字)라고 한다.

성곽

ⓒ 이민선

동문 밖 입구에는 동물 형상을 한 돌상이 서 있는데, 삽살개를 본떠 만든 석구(石狗)상이다. 그런데, 왜 하필 개 일까. 그것도 진돗개나 풍산개가 아닌 삽살개를. 기록을 찾아보니 삽살개의 '삽'은 막는다는 의미고 '살'은 액운을 의미했다. 즉, 이름이 액운을 막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 삽살개를 본뜬 것이다.

이렇듯 주변의 나쁜 기를 막는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보다는 개의 충성스러움과 용맹, 의리, 지혜 등을 따르라는 의미가 더 크다. 왕에게 충성하고 왜적이 침입하면 용감하게 싸우며, 송사가 있으면 지혜롭게 판단하라는 교훈적인 의미가 있는 상징물이라고 한다.

왜군이 발을 들일 수 없었던 낙안읍성

삽살개가 정말로 액운을 막아 준 때문인지, 낙안읍성은 역사 속에서 비교적 편안한 땅이었다. 임진왜란 때도 감히 왜군이 발을 들이지 못했는데, 이순신 장군이 맹활약하던 전라도(전라좌수영)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전라좌수영은 순천도호부, 낙안군, 홍양현, 보성군, 광양현과 여수 돌산읍, 고흥영남면 금사리, 고흥 점안면 여호리, 고흥도양읍 봉암리, 고흥 도화면 대발리를 관내로 두고 있었다.

성곽위에서 본 낙안읍성

ⓒ 이민선

그렇다고 낙안읍성이 뒷짐만 지고 있었던 건 아니다. 낙안 수군들은 이순신 장군을 도와 왜군을 무찌르는 선봉장으로 활약했으며, 백성들은 군량미를 대는 등 보급창고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낙안읍성 북서쪽에는 고을 수령이 기거하며 업무를 보던 동헌이 있다. 동헌 중앙 마루에 수령이 송사하는 모습을 마네킹으로 표현해 놓았는데 그 모습이 익살스럽기도 하고 잔인해 보이기도 한다.

방망이를 든 사또가 동헌 마루에 앉아 고함을 치고 있고, 아전들은 마루 밑 툇마루에서 선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 죄인은 뒤로 손이 묶인 채 꿇어앉아 있는데, 아무래도 억울하다는 표정 같다.

마당 한편에는 죄수가 형틀에 엎어진 채로 곤장을 맞고 있는 모습의 마네킹이 있는데, 민망하게도 엉덩이 살이 드러나 있다. 그냥 때리면 되지 왜 다 큰 사람 바지를 벗겼던 것일까!

형틀에 매달린 죄수 마네킹, 곤장치는 아이

ⓒ 이민선

동헌 옆에는 낙안읍성의 역사와 풍물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관인 낙민루가 있다. 이곳을 둘러보면 낙안읍성이 농민들 위주로 구성돼 있는 커다란 공동체라는 걸 알 수 있다. 전시된 물품 대부분이 농민들한테 필요한 농기구 등이다. 또한, 공동체의 결속력을 다지기 위한 줄다리기 같은 행사를 마네킹을 이용해 전시해 놓았다.

낙안읍성 곳곳을 한 바퀴 돌고 나자 어느새 땅거미가 내려앉아 있다. 또 그리던 초가지붕 온돌방으로 가야 할 때다. 사립문을 밀고 들어가자 후덕한 인상의 주인아저씨가 반긴다. 방문을 열자 열기가 후끈... 그런데 아뿔싸 알고 보니 군불을 지핀 온돌방이 아니라 최신식 보일러 방이다. 무늬만 초가집이었을 뿐 내부는 방안에 화장실까지 딸린 최신식 주택이었다.

그래도 서운치는 않았다. 조선 시대 읍성 모습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다는, 우리 고유의 민속경관이 가장 잘 보존 돼 있다는, 죽기 전에 꼭 한 번은 보아야 한다는 아름다운 낙안읍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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