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한국인들에게

2013. 12. 11.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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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스퍼드 대학에 재학 중이던 파란 눈 영국 청년 다니엘 튜더(Daniel Tudor)가 한국에 처음 발을 디딘 건 2002 한일 월드컵이었다. MBA 과정을 마치고 스위스 헤지펀드 회사에서 근무하다 <이코노미스트> 한국 특파원으로 명함을 바꾼 그가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라는 책을 냈다. 몰이해와 비난 섞인 지적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체험에서 우러나온 사랑과 존경, 친밀감이 바탕이 된 한국인에 대한 책은 처음이다.

-셔츠는 유니클로, 니트 스웨터는 알프레드 던힐, 재킷은 엔지니어드 가먼츠 by 샌프란시스코 마켓, 팬츠와 행커치프는 모두 H&M 제품.

한국에 처음 온 게 언제예요?대학생 시절 2002 한일 월드컵 때 한국 친구 초대로 왔어요. 8강, 4강 경기를 모두 한국에서 봤죠. 그 전설의 승부차기! 한국과 스페인 경기를 해운대 해수욕장에서 봤다니까요. 엄청 좋았어요! 그리고 서울로 올라와 안국동 게스트 하우스에서 지냈는데, 근처에서 축구공 가지고 놀고 있으면 지나가던 모르는 사람들이 공 차자고 해서 길거리에서 축구를 했어요. 한두 시간 축구 하고 고깃집 가서 소주 마시고. '꽐라'될 때까지. 그때 한국에 반했어요.

'꽐라'라고? 한국말 정말 잘하시네. 한국이 그렇게 마음에 들었어요?네. 그래서 월드컵 끝나고 영국으로 돌아갔다가 대학 졸업하고 다시 한국에 왔어요.

졸업하고 영국에서 할 수 있는 게 많았을 텐데?주위 친구들은 거의 런던으로 떠났어요. 은행원이나 변호사가 됐죠.

옥스퍼드 대학 졸업하고 '나 한국 갈래' 하는 용기는 어디서 나온 거죠?원래 이런 사람이에요. 제가 역마살이 꼈어요.

아시아인이 유럽에 로망을 갖고 있는 것처럼 유럽도 아시아를 그렇게 본다고 들었어요. 일본은 1백50년 전부터 유럽 대륙에서 신비롭게 생각되어온 나라예요. 많은 유럽인들이 일본 문화에 빠졌죠. 중국도 그래요. 그런데 한국은 아직까지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아요. 그게 제가 이 책을 쓴 목적이에요. 서양 사람들에게 한국을 알리고 싶었어요.

다니엘이 한국에 처음 왔던 10년 전엔 지금보다 더 한국에 대해 알려진 게 없었을 텐데, 무작정 한국에 온 거예요?무슨 직장을 갖든 상관없이 그냥 오고 싶었어요. 처음엔 많은 외국인들처럼 영어 강사로 일했어요. 근데 재미가 없었어요. 한국 사람들은 원어민 영어 강사를 내려다보고 무시하거든요. 특히 서울 처음 왔을 때, 압구정동 영어학원에서 일했는데 대부분 학생들이 부잣집 아이들이었어요. 학생들이 저보다 잘나가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어요. 정말 싫었어요. 그래도 한국이 너무 좋아서 참았어요.

영국도 '명문대 나와 곧바로 좋은 직장에 가야 한다'는 인식이 강한가요?대부분 그래요. 근데 요즘엔 많은 젊은이들이 대학 졸업 후 직장에 가기 전에 한 1년 동안 세계 여행을 다녀요. 이걸 'Gap Year'라고 부르죠. 그리고 직장에 들어가도 1년에 30일에서 50일 정도 휴가를 받으니까 1년에 두세 번씩은 장기 여행을 떠나요. 저도 처음엔 1년만 한국에서 살아야지, 했는데 영국으로 돌아가기 거의 2주일 전에 한국에서 직장을 구했어요. 금융회사였어요. 한국 대기업은 휴가를 너무 안 줘요.

전공은 뭐였어요?철학, 정치학, 경제학. 이 세 가지가 합쳐진 거였어요. 거만한 얘기인데 영국에선 좀 유명한 전공이에요. 그런데 전 '날라리' 학생이어서 성적이 안 좋았어요.

고향은 어디예요?/맨체스터.

맨체스터는 너무 멋진 밴드들이 많이 나와서 동경하는 도시예요.스톤 로지스(The Stone Roses) 알아요? 작년 '지산 록 페스티벌'에 와서 저도 갔어요. 제가 어렸을 때, 그러니까 1990년대엔 대부분 젊은이들이 라이브 클럽에서 시간을 보냈어요. 합법적으로 18세가 넘어야 입장할 수 있는데 그땐 제가 너무 '동안'이어서 못 들어갔어요. 안타까워요.

스쿨 밴드도 하고 그랬어요?네, 했어요. 그냥 아마추어로…. 지금 사는 오피스텔이 손바닥만 한데 기타만 여섯 대가 있어요. 아까도 중고 시장에 펜더 기타 좋은 게 싸게 올라왔기에 문의 문자를 보냈는데 아직 대답을 못 받은 상태예요.

맨체스터가 음악에 대한 영감을 주는 도시라고 하더라고요.일주일에 5일 정도는 비가 와요. 사람들은 밖에 못 나가니까 집 안에서 즐길 거리를 찾아야 해요. 1990년대 맨체스터는 '유럽에서 가장 원치 않는 임신율이 높은 나라'였어요.(웃음) 그리고 최고의 뮤지션들도 있죠.

날씨 때문에 우울해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사실인가요?/맞아요. 근데 저는 지금 한국에 사니까 밝은 거예요. 사실 저는 대학교 2학년 때 심한 우울증에 빠졌어요.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하고 나면 내 인생에 다음은 뭐가 있느냐, 하는 생각을 했어요. 런던으로 가서 평범한 직장 다니는 게 싫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다른 꿈이 있었거든요. 좋은 책이나 좋은 음악을 만들고 싶은데 기회가 없을 것 같았어요. 삶이 너무 지루했어요.

지루한 걸 싫어하는구나.그래서 한국을 좋아해요. 서울은 계속해서 무언가가 바뀌고 항상 새로우니까.

서울 시민들은 대부분 그걸 안 좋은 점으로 꼽는데. 처음 책이 나온 건 한국이 아니고 미국이었네요? /미국, 영국, 호주 같은 영어권 나라들이었어요. 예상보다 리뷰가 괜찮았어요. 사실 저 쉽게 상처받는 사람이에요. 소심쟁이. 그래서 걱정 엄청 많이 했어요.

소심쟁이가 그런 책을 썼어요? 한국 사람들이 싫은 소리 듣는 걸 얼마나 싫어하는데요.저는 이 책을 한국에 대한 존경과 사랑으로 썼어요. 진지하게 이 책을 읽어보면 그걸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사랑과 비판이 함께하는 건 괜찮아요. 간혹 한국에 대해 글을 쓰는 외신 기자들 중에 한국이 서양권보다 수준이 낮다는 전제하에 비꼬는 경우가 좀 있죠. 하지만 전 달라요. 한국을 사랑하니까. 그래서 용기 있게 썼어요.

사회과학 분야 베스트셀러에 올랐더라고요. 한국인이 다니엘의 진심을 잘 받아들이고 있어요.이제 한국 사람들은 건설적인 비판을 받아들일 수 있어요. 한국 처음 왔을 때 다니던 금융회사에 친구가 있었거든요. 한 번은 한국 자동차 브랜드에서 새 모델을 내놨는데, 디자인 안 좋다고 했더니 그 친구가 막 화를 냈어요. "You don't like Korea!" 하면서. 그런데 이제 그런 사람은 없죠. 적어도 '국뽕'은 없잖아요?'국뽕'이 뭐예요?

정부나 기관에서 과도한 과장, 선전으로 '한국은 Great Country' 하는 거예요. 네티즌들이 많이 쓰는 단어예요(웃음) 예전에 한국은 외국 사람들에게 'Korea is Great!' 하면서도 한국 사람들끼리는 '우리나라는 너무 작고, 자원도 없고, 파워도 없고…' 이런 성향이었어요. 근데 요즘엔 점차 자신을 얻는 것 같아요. 한국 처음 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저한테 'Korea is good' 'You must eat Kimchi' 이랬는데, 요즘은 그런 사람들 별로 없어요.

포장되고 과장된 게 지금은 많이 자연스러워졌다는 거죠?네. 학교 다닐 때도 가장 시끄러운 학생들이 알고 보면 제일 자신 없고 소심해요.

미국 타임스스퀘어 광장이나 유력 매체에 비빔밥이나 독도에 관한 광고를 하는 건 어때요? 너무 프로파간다 같아요?포스터를 보면, 특히 독도 광고는 조금 위협적으로 보여요. 그리고 무엇보다 왜 미국 타임스스퀘어예요? 유럽이나 아프리카, 러시아에는 광고를 내지 않잖아요. 이게 너무 슬퍼요. 한국은 너무 미국에 집착해요. 저 미국 싫어하지 않아요.(웃음) 하지만 너무 이상하잖아요. 한국 사람들은 왜 미국 명문 대학에 목숨을 걸죠? '하버드, 하버드'… 치과 이름도 보스턴 치과, 하버드 치과, 뉴욕 치과…. 저는 서울치과를 가고 싶어요. 미국 너무 생각하지 말고, 사랑하지도, 그렇다고 싫어하지도 말고 그냥 한국과 같은 하나의 나라라고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차라리 자신을 믿었으면 좋겠어요. 한국의 지식, 지성, 역사, 문화를 믿으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서유럽은 시민혁명이나 민주주의 역사가 오래됐잖아요. 조금씩 천천히 변하고 쌓여온 거라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나 자부심이 견고하죠. 하지만 한국은 그걸 50년 만에 이뤘잖아요. 부작용이 있을 수밖에 없어요.맞아요. 50년 만에 이렇게 변할 수 있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어요. 유럽인이나 미국인도 같은 상황이었다면 이렇게 못했을 거예요. 이미 그것 자체만으로도 한국은 자랑해도 돼요. 대부분 서구권 국가들이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우리가 짱이야'라고.

그럼 한국이 그런 나라가 됐으면 좋겠어요?아니요, 아니에요. 백범 김구 선생이 이런 말을 했어요.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면 족하다." 김구 선생은 한국이 강한 나라가 아닌, 그냥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길 바랐던 거예요.

2007년에 영국으로 돌아가서 MBA 과정을 마치고 스위스에서 헤지펀드 관련 일을 하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네요?금융업의 나쁜 영향을 알았어요. 영국에서도 대부분 엘리트 인재들이 금융업으로 몰리고 있는 실정이에요. 그럴수록 사회는 손실이라고 생각해요. 금융업은 파괴적인 산업이에요. 트레이더로 일하면서 회의를 느꼈어요. 이거 사고, 이거 팔고… 트레이딩은 기존에 있는 뭔가를 사고팔고 하는 것뿐이지 새로운 걸 만들지 않아요. 뉴욕, 런던, 홍콩의 금융가에 모여 있는 똑똑한 사람들이 사고팔고, 사고팔고만 하지 말고 발명가가 되거나 과학자가 되거나 작가가 되거나 뭔가를 창조하면 더 좋지 않을까요? 물질 만능주의에 빠진 취리히에서 일하면서 깨달은 건 그거예요.

<이코노미스트> 한국 특파원은 어떻게 된 거예요?어느 날 갑자기 <이코노미스트> 웹사이트 기사를 읽다가 인턴십 모집 광고를 봤어요. 어렸을 때부터 글쓰기를 좋아했는데 잘할 수 있을지는 몰랐죠. 그래도 해봐야지, 하고 이력서를 보냈는데 편집장 전화가 온 거예요. 인터뷰할 때 한국 얘기를 많이 했어요. 그때 <이코노미스트>엔 한국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없었거든요. 인턴십이 끝나고 마침 한국 특파원 자리가 비었으니 저보고 가겠냐고 연락이 왔어요. 1초 생각하고 왔어요.

책은 한국 특파원으로 활동하면서 틈틈이 준비한 건가요?네. 한국에 대한 책들은 대부분 한국전쟁에 관한 거나 북한 정치, 경제에 관한 거였어요. 진짜 한국의 모습을 제대로 쓴 책이 없더라고요.

영문판 원래 제목이 <Korea: The Impossible Country>네요. 'Impossible'이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아요.'Positive'한 의미와 'Negative'한 의미, 두 가지를 담고 있어요. 60년 전 전쟁을 겪고 나서 매우 가난하고 힘든 나라였는데 현재의 업적을 성취한 게 'Impossible'한 거죠. 하지만 지금 한국의 20대, 30대 젊은이에게 한국은 'Impossible'한 나라예요. 입시, 스펙, 취업, 결혼, 이 모든 게 스트레스 받는 일이니까요. 제가 한국 젊은이였다고 해도 인생은 'Impossible'하다고 생각할 것 같아요.

그게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잖아요.물론 아니죠. 세계적으로도 심각하죠. 한국이 못난 나라라서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한국은 자격지심에서 좀 벗어나도 돼요. 제가 만약에 영국에서 뭘 하다 실패하면 아프겠지만 다시 시작할 수 있어요. 근데 한국은 그게 안 돼요. 오죽하면 '루저'라는 단어가 생겼겠어요. 한국 사회는 루저를 너무 쉽게 만들어요. 명문대 안 가고 좋은 직장 안 가고 의사, 변호사 아니면, 강남에서 안 살면, 예쁘지 않으면 다 루저라고 해요. 너무 힘들잖아요. 한국은 세계에서 명품을 가장 많이 사고, 자살을 제일 많이 하는 나라예요.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그래요. 한국은 사회적 압박이나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요. 한국 사람들, 충분히 성공했어요. 이제 좀 안심해도 돼요.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죽기 살기로 달려왔는데 이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그게 배어버린 것 같아요.이제 한국도 춤도 추고, 샴페인도 한잔하면서 과거의 아름다운 것들을 되돌아보고 즐기면 좋겠어요. '지금 멈추면 더 이상 발전이 없다, 우린 죽는다!' 같은 거짓말은 믿지 말고.

photography: 김참 /editor: 조하나 / STYLIST: 김예진 / HAIR&MAKE-UP :정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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