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 you Remember]심심풀이 추억 이야기..1994년 이런 일이 있었군

2013. 12. 4.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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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에 20세가 된 사람들의 2013년 나이는 39세다. 그들은 인생의 1차 전성기를 누리며 사회의 허리 역할을 하고 있다. 세상의 미래가 그들의 마음과 판단에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의 뜨거웠던 그 시절 1994년에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그리고 그 일들이 그들의 삶에, 오늘의 이 나라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을까. 사람들은 왜 <응답하라 1994>를 보며 가슴이 촉촉해지는 걸까.

이 바쁜 세상에 1994년을 기억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드라마 <응답하라 1994>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1994년, 당신의 나이는 몇 살이었는가. 지금 드라마 본방 사수를 위해 귀갓길을 서두르는 20대들의 그때 나이는 열 살 미만들이었다. 30대쯤 되었다면 당시 사춘기를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오늘의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까지의 당시 나이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이다. 당시 서울의 중심지는 명동이었고 20대들이 즐겨찾던 곳은 신촌, 이대앞, 돈암동 등 대학가와 대학로, 강남역 등이었다. 압구정동은 이미 부자촌으로 자리 잡은 뒤였고 '오렌지족'이라는, 당시로서는 거의 외계어에 가까운 신조어가 튀어나온 곳도 압구정동 일대였다. 이 신흥 부자촌에도 주택가는 있었다. 지금의 로데오길 뒷쪽은 모두 주택이었다. 청담동 언덕에 '고센'이라는 카페가 문을 열었을 때 그 일대는 모두 으리으리한 저택들로, 고센은 마치 섬처럼 언덕 꼭대기에 앉아있었다.

지금은 청담동, 신사동 가로수길, 강남역, 삼성동 등이 강남 상권을 주름잡고 있었지만 당시에는 갤러리아 백화점 앞과 현대백화점 사거리 일부 지역에만 상업 시설이 있었다. 강북에서 볼 때는 강남역 사거리도 멀게 느껴졌던 시절이다. 그때 가로수길은 갤러리와 디자이너 브랜드 중심의 조용한 길이었다. 그 당시에도 '스타일'은 존재했다. 20대 젊은 여자라면 통 넓은 '고소영 청바지' 정도는 입어줬어야 했다. 요즘 다시 눈에 많이 띄는 청재킷도 유행했다. 청재킷에 청바지에 웨스턴 부츠로 깔맞춤한 애늙은이 같은 젊은이들도 많았다. 레이어드 스타일도 유행했다. 특히 간절기가 되면 셔츠 위에 니트를 걸치고 다니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브랜드보다 '보세옷' 인기가 더 좋았던 것도 당시 패션의 특징이었다. 이대앞, 돈암동, 신촌에 나가면 온통 보세옷가게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인기 브랜드들도 있었다. '게스', '안전지대', '겟 유즈드', '인터크루', '엘레쎄' 등은 당시 '쫌 사는 집 아이'들이 즐겨 찾던 브랜드들이었다. 잔스포츠 등 백팩이 대학생들의 교복 가방처럼 인기 몰이를 하기 시작했다. 백팩 시장을 거의 석권했던 '이스트팩'은 1994년만 해도 거의 보이지 않다 1997년부터 큰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그러나 1994년을 전후로 젊은이들에게 가장 인기를 끌었던 브랜드는 역시 '마리떼 프랑소와 저버(Marithe Francois Girbaud)'가 아닐까? 프랑스 디자이너의 이름이기도 한 '마리떼 프랑소와 저버' 청바지의 등장은 그 이전까지만 해도 쌍마(리바이스), 조다쉬, 서지오발렌테 등 꾸준히 사랑받던 청바지에 익숙했던 사람들에게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마리떼 프랑소와 저버 청바지는 '방송 PPL'을 제대로 성공시킴으로써 소비자에게 크게 어필했다. 당시 인기 탤런트 장동건이 <우리들의 천국>에서 즐겨 입던 옷이 바로 '마리떼 프랑소와 저버'였다. 그때는 PPL이라는 개념도 없었다. 아는 피디, 친한 작가가 있으면 얼마든지 브랜드 노출을 시킬 수 있던 시절이었다. 마리떼 프랑소와 저버는 청바지 코디 문화도 잠시나마 바꿔놓았었다. 상표를 자랑하려고 벨트를 매지 않거나 힙합 스타일 라인의 진을 입을 땐 스타일상 윗옷을 내려입어야 하는것이 코디의 ABC임에도 불구하고 상표 노출 욕구 때문에 굳이 바지 속에 넣어입는 모습도 종종 볼 수 있었다. 1994년 즈음의 일이다.

지금도 생각나는1994년 인기 가요

80년대를 풍미했던 디스코텍이 여전히 밤문화를 지배하는 가운데 90년대 초에 '록카페'라는 것이 등장했다. <응답하라 1994>에도 등장한 '스페이스', 1996년까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다 화재로 사상자까지 냈던 '롤링스톤즈' 등은 나이트클럽의 매출에까지 영향을 줄 정도로 많은 젊은이들이 들락거리던 곳들이다. 당시 신촌 우산속, 동대문 이스턴호텔나이트, 을지로 풍전 나이트, 종로 ABC디스코텍, 명동 마이하우스, 무교동 코파카바나 등에서 '죽돌이 죽순이'로 활약하던 친구들에게 '락카페'는 완전 신천지였다. 뭐라고? 기본을 안시켜도 된다고? 술 마시다 벌떡 일어나 테이블 사이사이에서 춤추고 논단 말이지? 맥주를 병나발로? 나이트클럽에 들어가면 무조건 '기본'을 시켜야 했다. 인원에 따라 맥주 2~4병에 마른안주 하나, 과일안주 하나로 세팅되는 것을 '기본'이라 했다. 그러나 락카페는 기본이 없더도 되니 용돈 모아 클럽에 가야했던 젊은이들에게 락카페는 신천지일 수밖에 없었다. 1994년에는 락카페와는 다른 새로운 클럽이 등장했다. '레게바'가 그것다. 신촌기차역 근처의 '쥬빌리' 등 원조격 레게바에 들어가면 밥 말리의 레게 음악을 신나게 들으며 흔들거릴 수 있었다. 레게바가 락카페를 밀어낼 정도의 힘을 발휘하게 된 것에는 김건모의 '핑계'가 있었다. 당시 김건모는 신승훈, 서태지와 아이들 등과 함께 한국 대중음악의 톱스타로 활동했었다. 음반을 냈다 하면 기본 100만장을 팔았으니, 그 위력은 두말할 필요없이 강력했었다고 할 수 있다.

'내게 그런 핑곌대지마 입장바꿔 생각을 해봐 니가 지금 나라면 넌 웃을 수 있니….' 이런 한국말 사랑 노래가 레게 리듬에 탑재될 줄 누가 알았을까.

룰라의 '100일째 만남', 윤도현의 '가을 우체국 앞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의 '교실 이데아', '발해를 꿈꾸며, 임종환 '그냥 걸었어', 투투 '일과 이분의 일', 신승훈 '그 후로 오랫동안', '처음 그 느낌처럼', 전람회 '기억의 습작', 신효범 '난 널 사랑해', 박진영 '날 떠나지 마', '너의 뒤에서', 넥스트 '날아라 병아리', 신성우 '서시', 조관우 '늪', 김현철 '달의 몰락', 철이와 미애 '뚜벅이 사랑', 임주리 '립스틱 짙게 바르고', 더클래식 '마법의 성', 박상민 '멀어져 간 사람아', 피노키오 '사랑과 우정 사이', 부활 '사랑할수록', 김광석 '서른 즈음에', '일어나', 장철웅 '서울 이곳은', DJ DOC '슈퍼맨의 비애', 듀스 '우리는', '여름 안에서', 윤종신 '오래전 그날', 마로니에 '칵테일 사랑', 이예린 '포플러 나무 아래' 등도 1994년 젊은 감성을 촉촉하게 적셔주었던 주옥같은 노래들이었다.

한국영화

게임의 법칙(장현수 감독, 박중훈, 이경영, 오연수, 권해효) / 장미빛 인생(김홍준 감독, 최명길, 최재성, 차광수, 명계남) /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정지영 감독, 독고영재, 신혜수, 허준호, 김혜수) / 태백산맥(임권택 감독, 안성기, 김명곤, 김갑수, 신현준) / 젊은 남자(배창호 감독, 이정재, 신은경, 이응경, 김보연) /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장길수 감독, 최진실, 유오성, 김병세, 이덕화) / 결혼 이야기2(김강노 감독, 심혜진, 변우민) / 어린 연인(이성수 감독, 이경영, 우희진, 윤승원, 박주미) / 구미호(박헌수 감독, 고소영, 정우성, 독고영재, 방은희) / 커피 카피 코피(김유민 감독, 진희경, 김병세, 하유미, 허준호) / 라이따이한(서윤모 감독, 이창훈, 린 단 팜) 외국영화데미지(루이 말 감독, 제레미 아이언스, 줄리엣 비노쉬) / 쇼생크탈출(프랭크 다라본트 감독, 팀로빈스, 모건 프리먼) / 레옹(뤽베송 감독, 장 르노, 나탈리 포트만) / 포레스트 검프(로버트 저메키스 감독, 톰 행크스) / 스피드(쟁드봉 감독, 키아누 리브스, 데니스 호퍼, 산드라 블록) /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닐 조던 감독, 톰 크루즈, 브래드 피트) / 크로우(알렉스 프로야스 감독, 브랜던 리) / 라이온킹(로저알 러스, 롭 민코프 감독) / 트루라이즈(제임스 캐머런 감독, 아놀드 스왈제네거, 제이미 리 커티스) / 덤 앤 더머(피터 패럴리, 바비 패럴리 감독, 짐 캐리, 제프 다니엘스) / 긴급 명령(필립 노이스 감독, 해리슨 포드, 웰렘 데포, 앤 아처) / 마스크(척 러셀 감독, 짐 캐리) / 펄프픽션(쿠엔틴 타란티노 감독, 존 트라볼타, 사무엘 L. 잭슨)

일본은 없다(전여옥) /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김진명) /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유홍준) / 돌연변이(로빈 쿡) / 서른, 잔치는 끝났다(최영미) /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스티브 코비) / 영원한 제국(이인화) / 꼬리에 꼬리를 무는 영어(한호림) / 체질을 알면 건강이 보인다(이명복) / 퇴마록(이우혁) / 앵무새 죽이기(하퍼 리) /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김대중) / 반갑다 논리야(위기철) / 7막7장(홍정욱) /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로버트 제임스 윌러) / 개미(베르나르 베르베르) / 나는 다만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을 뿐이다(김정일-의사) /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공지영) / 바이러스(로비 쿡) / 참으로 사람답게 살기 위하여(김수환) -교보문고 참조- 1994년에 이런 일도 있었네?

1994년의 사건 사고

지존파를 기억하는가? 지존파 사건이란 1993년 7월부터 1994년 9월 사이에 납치, 강도강간, 살인 등 4건의 범죄를 저지르며 5명의 시민을 살해한 사건이다. 이들은 1993년 7월 초 대전에서 홍콩 영화 <지존무상>을 모방, 김기환(당시 26세, 강간치상 1범)을 두목으로 강동은(21세, 특수절도 등 2범), 김현양(22세, 상해 1범), 강문섭(20세), 문상록(23세, 특수절도 등 3범), 백병옥(20세, 특수강도 등 2범), 이경숙(23세, 여, 절도 1범) 등 6명이 '지존파'를 결성했고 얼마 후 한 명을 더 영입, 7명이 활동했다. 이들은 "돈 많은 자를 저주한다", "돈 많은 자들로부터 10억원을 강취한다", "조직을 배신한 자는 죽인다" 등의 행동 강령을 마련했고 가스총, 공기총, 전자충격기, 다이너마이트 등의 범행도구를 갖추는가 하면 아지트의 지하실에 감금용 철창과 사체소각용 화덕까지 만들었다. 이들은 김기환이 미성년자 성폭행 혐의로 체포되자 경찰서를 폭발시키겠다며 폭약을 준비한다. 그러다 김현양이 부상을 입자 병원으로 치료하러 갔고, 그 틈을 타 인질로 잡혀있던 여성이 탈출, 경찰에 신고함으로써 모두 체포되었다. 이경숙을 제외한 초기 조직원 6명은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1995년 11월2일 서울구치소에서 형을 집행, 세상을 떴다. 그들에게 희생된 사람들은 지존파가 저주했던 부자들이 아니었다.

성수대교 붕괴 사고도 끔찍한 사건으로 기억된다. 1994년 10월 21일 오전 7시38분, 출근과 등교로 한창 바쁜 아침 시간에 성수대교가 무너졌다. 5번과 6번 교각 사이의 상부 트러스 50여 미터가 붕괴된 것이다. 사고 지점을 달리던 승합차 한 대와 승용차 두 대는 즉시 트러스와 함께 추락했고 바퀴만 걸치고 있던 시내버스와 승용차 두 대도 결국 추락하고 말았다. 이 사고로 등교하던 학생 등 32명이 숨지고 17명이 부상 당했다. 성수대교 붕괴사고는 그 다음 해에 발생한 삼풍백화점붕괴사고(사망 502명, 부상 937명, 실종 6명), 1992년의 '신행주대교붕괴사고'와 함께 90년대 최악의 사고로 기억되고 있다.

굿바이 오렌지족

1994년은 오렌지족 시대가 저무는 해였다. 80년대 후반 압구정동 카페에서 시작된 오렌지족 현상은 한동안 우리 사회의 주목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해외로 유학을 떠난 부잣집 자녀들이 방학을 이용해 귀국, 압구정동 일대의 카페를 돌아다니며 '여자에게 작업을 걸 때 오렌지를 이용'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오렌지족이다. 워낙 주목을 받다 보니 아류가 생겨나기도 했다. 오렌지족을 어설프게 흉내내는 사람들에게는 '낑깡족', 30대 중반 이상이 오렌지족 흉내를 내면 '노(老)렌지족'이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그들은 선망과 비난의 대상이기도 했다. '당시로서는 이름도 몰랐던 명품 브랜드 옷을 입고 고급 승용차를 몰고 다니며 강남의 나이트클럽을 휩쓸 때는 누군가의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간간히 들려오는 안하무인격 행동 때문에 시민들의 공분을 사기도 했다. 한번은 오렌지족의 행패가 신문에 보도되었는데, 재벌 그룹 부회장의 아들, 의류회사 사장 아들 등 네 명이 그랜저를 몰고 가다 프라이드 승용차가 끼어들자 건방지다며 벽돌, 깨진 화분 등으로 폭행을 휘둘러 프라이드에 타고 있던 두 사람에게 전치 8주와 4주 중상을 입혔다. '프라이드 주제에 그랜저에 끼어들며 눈을 흘겼다'는 게 그들의 폭행 이유였다. 세 명은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한 명은 달아났다 다음 날 유학 중인 영국으로 돌아가려다 공항에서 붙잡혔다. 당시 그는 출국 금지 조치된 상태였다. '오렌지족'이라는 말은 이 사건을 시점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오렌지족으로 '활동'(?)하던 그들은 이제 쉰 줄에 접어들었거나 40대 중반을 사는 중년이 되어 있다.

휘발유값이 600원대

1994년 1월 7일 주가가 한때 900선을 넘었다는 소식이 신문에 등장했다. 1월 6일 현재 삼성전자 주가는 전일에 비해 600원 오른 5만8100원을 기록했다. 2013년 11월12일 현재 삼성전자 주가는 전일 대비 2만8000원 오른 145만6000원으로 장을 마감으며 코스피 지수는 1995.48, 코스닥은 510.73이다. 만약 그때 600만원을 들여 삼성전자 주식 100주를 샀다면, 오늘 그 600만원이 1억5000만원이 되어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런 주식이 어디 삼성전자 뿐일까만. 한편 당시 휘발유 값은 600원대였다. 1994년 1월 현재 휘발유값은 리터 당 620원, 경유는 218원이었다. 2013년 11월 현재 고급 휘발유값은 2100원대, 일반 휘발유는 1800원대, 경유는 1600원대다.

김일성 사망

7월 8일에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다. 이 소식은 한국 등 아시아 국가는 물론 전세계 언론의 톱뉴스로 보도되었다. 그는 해방 후 귀국, 1948년 9월 실질적 북한 최고 권력인 내각 수상을 시작으로 눈을 감은 1994년 7월 8일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독재자로 군림했다. 그는 죽었지만 그의 아들 김정일이 권력을 승계해 17년 동안 북한을 지배했고, 2011년 12월 17일 김정일이 그가 죽자 1983년생인 그의 아들 김정은이 또 다시 권력을 이어받는 등 3대에 걸친 세습 통치를 이어가고 있다.

[글 이누리(프리랜서) 사진 매경DB, 네이버 영화, 교보문고, 구글 스크린샷]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406호(13.12.10일자)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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