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일의 들숨날숨] 신영록, 당신이 몰리나를 구했습니다

조회수 2013. 11. 26. 09:5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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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딩 경합을 위해 힘차게 솟구쳤던 몰리나가 맥없이 땅으로 떨어졌을 때, 직감적으로 심각함을 인지한 데얀은 벤치로 몸을 돌려 위급한 상황임을 알렸다. 의무진을 부르는 데얀의 팔이 허공을 가르고 있을 때 전광판의 시계는 전반 2분을 알리고 있었다. 이후의 모든 시간은 의료계에서 '생과 사를 오가는 환자의 목숨이 달린 시간'으로 불리는 골든타임이었다.

선수든 일반인이든 의식불명에 빠지면 최초 5분 이내 응급처치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멀리 기자석에서 바라보는 눈은 몰리나가 쓰러진 필드와 전광판을 빠르게 오갔다. 시간의 속도는 상대적으로 흘렀다. 전광판의 숫자는 쏜살처럼 빨랐고 필드 위의 상황전개는 슬로우비디오처럼 더뎠다. 아마 몰리나의 몸속 시간도 쌍곡선을 그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 격차를 현실의 시간으로 합치지 못한다면, 끔찍한 일이 발생할 수도 있었던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

그런 화를 막기 위해 24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 모인 모든 사람들은 5분을 간절한 마음으로 함께 사용했다. 우리와 상대의 구분은 없었다. 몰리나가 쓰러졌을 때 가장 먼저 도착한 관계자는 부산아이파크 의무팀이었다. 상대팀 선수의 부상이었으나 자신들의 위치가 더 가까웠다. 반대편 벤치에 있던 FC서울 의무팀이 도착하기 전에 먼저 응급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의무팀이 필드에 들어오는 것은 사건 발생 후 불과 1분이 흐르지 않았을 때다. 하지만 그 1분 안에서도 응급조치는 이뤄지고 있었다. 최용수 감독은 경기 후 "몰리나 혀가 말려 들어가는 상황에서 김진규가 손으로 혀를 잡고 있었다더라"는 말을 전했다. 기도가 막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가 선수들 사이에서 진행되고 있었다는 뜻이다. 부산 선수들 역시 한 마음으로 몰리나의 회복을 도왔다. 선수들만 합심한 것이 아니다.

다행히 사용할 일은 없었으나 이날 운동장에는 응급차까지 들어왔다. 응급차를 부른 이들은 부산의 원정 서포터들이었다. 서포터들은 응원도구인 확성기를 이용해 다급하게 응급차를 불렀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몰리나의 상황을 지켜보던 팬들이 사건의 현장에서 정신이 없을 사람들을 대신했던 것이다. 만에 하나 응급조치 후 병원으로 후송되어야할 상황이었다면, 이 역시 1분1초가 지체되어선 안 될 일이었으니 큰 도움이 아닐 수 없다.

도움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부산 서포터들은 몰리나의 이름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기절한 사람을 큰 소리로 불러 정신을 차릴 수 있도록 돕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행동이었고, 보이지 않는 기운을 담은 간절한 응원이기도 했다. 부산 서포터로부터 시작된 몰리나의 이름은 관중석 전체로 퍼져나갔다. 팬들도 우리 팀과 상대 팀이 없었다.

이런 모두의 노력 속에서 몰리나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필드에 앉았을 때 전광판 시계는 6분을 알리고 있었다. 부축을 받고 필드 밖으로 나간 시간은 7분이다. 결국 정신을 회복하기까지 채 5분이 걸리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 빠른 조치 덕분에 몰리나는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전반전이 끝난 뒤 종합병원으로 이동한 몰리나는 CT 촬영결과 큰 문제가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천만다행이었다. 현장에 있던 모두의 노력이 몰리나를 살렸다. 그리고, 현장에 없던 한 사람의 공도 빼놓을 수 없다.

아마 그 자리에 있었던 많은 사람들의 머리 속에 공통적으로 떠올려진 누군가가 있었을 것이다. 바로 신영록이다. 지난 2011년 5월 대구FC와의 경기 도중 신영록은 부정맥에 의한 심장마비로 필드 위에 쓰러졌다. 슈팅 후 걸어가다 쓰러진 신영록을 대구의 수비수가 먼저 응급조치를 실시했고 신속히 들어온 제주의 의무트레이너가 심폐소생술을 시도해 귀중한 생명을 구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힘겨운 재활 중이다.

"조금만 더 빨랐다면, 조금만 더 철저했다면"이라는 당시의 아쉬움은 이후 경각심으로 바뀌었고 프로축구연맹과 각 구단들은 응급상황 대처 매뉴얼과 의료 필수장비 보급 등 안전대책을 강화했다. 모든 경기장에 자동 제세동기 비치도 의무화했다. 실제 훈련도 병행하고 있다.

이를테면, FC서울은 지난해 5월23일 목포시청과의 2012 하나은행 FA컵 32강 홈경기에서 응급상황 대비 모의훈련을 실시하기도 했다. FC서울의 구단 전담 의사인 조윤상 박사, 이대 목동병원, 서울 응급환자 이송단과 함께 진행된 훈련은 급성 심정지 상황을 가정해 경기장에서부터 병원 이송까지의 응급조치 과정을 실제 상황처럼 진행했다. '영록바'라 불리며 호쾌하게 필드를 내달리던 소중한 선수 한명이 병상에 있어야하는 안타까움은 많은 교훈을 주었다. 무엇보다 달라진 것은 '인식'이다.

지난 9월에도 K리그 필드에서는 이번 몰리나 사건과 유사한 일이 있었다. 인천과 전북의 경기에서 전북의 미드필더 박희도가 인천의 김남일과 경합하는 과정에서 뒷머리를 필드에 부딪히면서 정신을 잃었다. 이때도 첫 조치는 선수에게서 비롯됐다. 상대팀 선수인 베테랑 김남일은 벤치를 향해 빠르게 도움을 요청했고 가까운 곳에 위치해있던 인천의 의무팀이 먼저 응급조치를 실시했다. 덕분에 박희도는 2분 만에 의식을 되찾을 수 있었다. 신영록으로 인한 아픔이 전한 학습효과다.

축구는 가장 원초적인 스포츠다. 22명이 공 하나를 두고 몸으로 겨루는 방식이다. 크고 작은 부상은 피할 수 없다. 때문에 중요한 것이 그렇게 강조하는 동업자 정신이다. 그것이 기본이다. 그 다음은 철저한 대비다. 세상에는 막을 수 없는 참사도 많다. 막을 수 있었던 사고 때문에 후회하는 일은 없어야한다.

준비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또 누군가를 잃었을지도 모른다. 신영록이 박희도와 몰리나를 구한 것과 다름없다. 하염없이 울던 몰리나의 아들은 다시 웃음을 되찾았다. 하지만 아직 신영록의 가족들은 눈물 짓고 있다. 신영록을 위해서라도 절대로 이런 일이 다시 벌어져서는 안 된다.

글=임성일[MK스포츠축구팀장/lastuncle@daum.net]사진=스포츠공감/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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