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있는 명소-미국 ③] 샌프란시스코-세상에서 여름이 가장 추운 도시

입력 2013. 11. 18. 08:08 수정 2013. 11. 19.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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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순서: ①보스턴 ②뉴욕 ③샌프란시스코)

[헤럴드경제=샌프란시스코] 19일, 오늘은 새벽 5시에 체크아웃 해야 해서 일찍 일어났다. 새벽 4시. 내가 제일 자신 있는 게 일찍 일어나는 일인 것 같다. 이건 20년 이상 '생존'의 일환으로 훈련이 잘 돼 있다. 매일 회사 출근을 위해 새벽 4시반에 일어나고 회사에 6시 10분 경에 도착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강요된 아침형 인간'인가.

뉴욕, 정말 세상에서 없는 것이 없는 도시, 액티브한 도시, 최첨단 유행을 창조해가는 도시, 불친절의 대명사인 도시, 그래도 싫어하지 않는 이 도시는 역시 전세계인이 만들어가는 도시였다. 미국은 '멍석'만 깔아줬고 세계인이 유지, 발전시켜 가는 모양새다. 모두가 필요에 의해서 찾아오고, 와서 도시의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는 선순환 구조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도시였다.

우리도 가장 한국적인 도시를 잘 만들고 알려 외국인들이 제 발로 찾아와서 머무르게 하고 도시의 컨텐츠를 공유함으로써 그들이 그 도시의 에너지가 되도록 할 필요가 있겠다. 어느 한 도시가 동력을 얻는 지혜를 이 도시, 뉴욕에서 배워간다.

21세기의 경쟁력은 국가 단위 보다 도시 단위로 펼쳐질 것이라는 예측도 있었다. 앞으로 그 추세는 더욱 가속화될 수도 있겠다. 어느 나라 전체적인 개념 보다 어느 도시라는 다소 한정된 공간이 부각될 것이라는 것은 이미 저명한 석학이 예측한 일이기도 하다. 중앙정부와 달리 지자체장이 투자유치에 발벗고 나서는 것도 단적인 예일 것이다.

미래엔 기후 좋고, 삶의 질을 드높일 다양한 문화컨텐츠가 살아있는 도시로 사람들은 찾아 살 것이다. 재택근무가 일상화 되면 이러한 추세는 더욱 더 가속화 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직장은 뉴욕에 있지만 거처는 서울에 있을 수도 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도 잘만 대처하면 그런 자원 충분히 부각시킬 수 있다고 한다. 한반도는 굴뚝산업에 쓰일 부존자원은 없지만 미래의 삶의 질을 향상시킬 산업을 선도할 '무형의 자원'은 많다.

기후 좋고 환경까지 좋은 산뜻한 도시, 샌프란시스코 등이 위치한 캘리포니아의 풍경이다.

예일대학교 폴 케네디 교수는 20년 전 이미 저서 '21세기 준비(Preparing for the Twenty-first Century)'에서 "기술, 교육적 자원과 풍부한 자금, 그리고 문화적 일체감을 가진 나라가 21세기를 가장 잘 대비해 나갈 수 있다"고 단언했다. 그는 특히 그 대상국으로 한국을 지목하기까지 했다. 그러니 우리는 '21세기형 자원'의 상당 부분을 확보하고 있는 만큼 남은 일은 우리 하기 나름일 것이다. '화려한 뉴욕' 보다도 '살아있는 뉴욕'이 나에게 더 많은 생각을 안긴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뉴욕에 와서 월스트리트에 못 간 것이 못내 아쉽다. 이 부분이 가장 미련 남는다. 경제신문사 기자로서 세계금융의 심장부 월가를 꼭 보고 싶었다. 이번 여행 중 내가 일행과 잠시 이탈해서 갔으면 물론 가볼 수도 있었지만 그 대신 또 다른걸 놓치는 것이고 또 혼자 이탈한다는 것도 그렇고 그냥 주어진 여건을 감수해야 했다. 사실 뉴욕에 머문 이틀간 '유혹'과 '자제' 사이에서 내내 갈등을 겪었다.

아침 7시반 뉴욕의 JFK공항을 이륙한 비행기는 샌프란시스코로 비행했다. 미국 동부에서 서부로의 여행이다. 여기서 6시간 가까이 걸린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 3시간 정도로 막연히 생각했는데 미국의 동서 면적이 그렇게 넓었나 싶었다. 무릇, 인천에서 싱가포르 가는 거리다. 비행기는 아메리칸 에어라인. 미국 국내선 이코노미석이라지만 자리가 너무 비좁았다. 우리 보다 덩치가 큰 미국인들이 어떻게 이걸 타나 싶었다. 귀국길에 앉았던 대한항공의 이코노미석이 훨씬 더 넓었다.

통로 가운데 3명이 앉는 자리에 앉았는데 이미 미국 아가씨 한 명이 앉아 있었고 나와 우리 일행 중 한 명이 같이 나란히 앉게 됐다. 가운데 자리가 내 자리였다.

미국 아가씨가 미소로 인사하는 듯 하길래 나도 앉으며 "굿모닝" 하고 기내에서 뉴요커와의 첫 인사를 건넸다. 미모의 아가씨가 이내 다시 화사하게 웃으며 인사한다. 금발은 아니었지만 이어폰 낀 채 자켓 차림에 청바지, 그리고 롱부츠 신은 뉴요커 아가씨의 전형이었다. 집은 뉴욕이고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나의 짧은 영어실력, 그리고 전형적인 뉴요커와 어깨를 맞대고 앉은 잉글리시 컨버세이션이다. 말을 얼마나 더 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제부터 6시간은 이렇게 옆에 앉아 가야 한다.

잠시 후 내 옆의 여행 멤버인 타 언론사 후배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 후배는 카투사 출신에 뉴욕에서도 생활한 준(準) 뉴요커다. 유창한 영어로 이 아가씨와 대화를 나눈다. 사이에 낀 나는 양쪽 말 듣기에도 바쁘다. 그 마저 알아들을 수 없음은 물론이다. 가운데 앉아 마치 좌우 스테레오 사운드로 영어 청취수업을 듣는 학생이 돼 버린 느낌이다. 대충 몇 가지 파악만 할 뿐. 나중에 후배가 다시 설명해 준 바에 의하면 이름이 마리아라는 이 아가씨는 6개월간 샌프란시스코 친척집에 머물며 학교를 다녀야 한다는 것이다. 영어 잘 하는 후배가 자랑스러워 보였다.

기내에서 잠시 벗이 된 뉴욕 아가씨. '짝꿍'의 인연으로 내려서 사진도 찍을 수 있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젠 'The brave deserve the fair(용자만이 미인을 얻는다)'라는 말도 바뀌어야 할 것 같다고. 이젠 'Fluent English deserves the fair(유창한 영어가 미인을 얻는다)'다. 또 다시 자극받는 영어실력 배양.

샌프란시스코에는 서부 현지시각으로 오전 11시에 도착했다. 뉴욕보다 3시간 늦다. 그러니까 뉴욕시간으로는 오후 2시다. 누가 하루를 24시간이라고 했던가. 나는 오늘 분명 27시간 짜리 하루를 산다.

이 공항이 무서운 공항이다. 얼마 전 아시아나 여객기가 착륙하다 대참사를 낸 바로 그 곳에 내렸다. '도대체 어떻길래 그런 참사가 일어났을까' 하고 연신 창 밖 활주로를 보려고 애썼다. 사고는 바다에서 활주로가 시작되는 부분에 부딪히며 일어났는데 우리가 탄 비행기는 한참 진입한 후 타이어가 활주로에 닿았다. 그 사고를 의식하며 착륙했지만 겁은 나지 않았다. 여차하면 용감하게 뛰어내릴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으니까.

샌프란시스코는 어제부터 지하철(BALT)이 총파업했다고 한다. 내일은 여자 하프마라톤대회까지 있어서 시내가 무척 혼잡스러울 것이라고 한다.

샌프란시스코 82만여명, 위성도시 인구 모두 합치면 700만명이 산다고 한다. 일대 한인은 12만명이다. 샌호세(San Jose)에 4만 5천명으로 한인이 제일 많다.

샌프란시스코는 위도 37.5도, 최근엔 낮엔 20도 이상 올라가 더우며 밤에는 추울 정도로 기온이 떨어진 이상기온을 보이고 있다고 했다. 명맥 상으로는 사계절이 있지만 실제로는 건기, 우기로 나뉜다. 겨울철 석 달 정도 비가 내리고 여름은 추운 건기다. 그래서 지중해성 기후라고 부른다. 지중해의 기후특색을 보인다 해서 붙인 이름인데 이곳 미국 캘리포니아와 남부 아메리카인 칠레 중부연안 등이 지중해성 기후다. 하지만 지중해와는 여름철 기온이 좀 다른 특징도 갖고 있다.

여름이 춥기로 유명한 샌프란시스코, 인디언 서머를 만나는 가을 한때는 무덥기까지 하다.

샌프란시스코의 여름은 평균 17~18도 정도에 비교적 찬바람이 불어 춥다고 한다. 북반구의 여름이 대부분 30도 이상 무려 40도로 올라가는 여타지역과 비교하면 이곳의 여름은 춥긴 춥겠다.

이 여름의 추위에 대해 '톰소여의 모험'으로 유명한 작가 마크 트웨인은 "내가 경험한 가장 추운 여름은 샌프란시스코였다"고 표현했다. 명언으로 남았는데 그는 한 때 샌프란시스코에서 신문기자 생활을 했다. 가장 더울 때가 10월에 열흘 정도 기습적으로 찾아오는 '인디언 서머(Indian summer)'다. 이 때는 높으면 30도까지 올라가기도 한다 하니 연중 가장 더운 날씨다. 우리가 갔을 때가 인디언 서머 기간으로 낮기온이 23도 정도였다. 낮엔 좀 덥고 밤엔 추웠다.

이 인디언 서머와 관련해 재밌는 표현으로 유럽에서는 '늙은 아낙네의 여름(old wives' summer)'이라고 하는데 반짝하다 말아서 그렇게 부르는 모양이다. 주식시장에서도 '인디언 랠리(Indian rally)'라는 말이 있는데 침체기를 앞둔 '반짝 강세장'을 뜻한다. '기술적 반등장'이다. 이와 달리 장기간 상승장을 '서머 랠리(summer rally)'라고 한다. 인디언들은 겨울철을 앞두고 가을 막바지 이 반짝 더운 날씨를 이용해 사냥, 수렵으로 식량을 확보했다는데서 유래한 말이다. 겨울이라 해도 영하로 내려가지는 않기 때문에 눈이 없다.

금광맥이 발견돼 일어선 도시 샌프란시스코, 원래 멕시코 땅을 1846년 미국 해군이 점령한 직후 골드러시가 이루어졌는데 당시 800명에 불과하던 서부 개척 이주민이 삽시간에 2만5000명 선으로 불어났다. 금맥은 금방 바닥이 났지만 이곳의 천혜 지리적 조건으로 도시는 크게 부흥했다. 지금은 IT•금융업이 주를 이루고 그 외 산업은 이웃 내륙지방 네바다 등지로 옮겨갔다.

공항에서 버스로 약 10여분 거리에 있는 데일리 시(Daly city)에서 점심을 했다. 그리고 주변의 대형마트 TARGET를 견학했다. 여기 매장에서 갤럭시S4는 13.9달러였다.

핼러윈시즌이 다가와 관련 용품이 많이 진열돼 있었다. 이곳의 매장들은 옆 건물 몰(Mall)과 연결돼 있어 밖으로 다시 나오지 않고도 오가며 쇼핑할 수 있게 돼 있다. TARGET는 원래 의류매장으로 출발해 지금은 모든 제품으로 확대됐다고 한다.

핼러윈 데이가 임박하자 대형매장에는 관련 용품을 사러 온 사람들이 많았다.

멀리 보이는 산들은 하나같이 민둥산이다. 나무가 없다. 마치 사막 산 같다. 여기서 다시 공항 쪽으로 되돌아 나가는 길에 멀리 민둥산에 'South San Francisco, The Industrial City'라는 큼직한 흰글씨가 눈에 들어와 그 아래쪽 시가지가 산업도시임을 알려줬다.

다시 공항을 지나 5분 거리에 우리가 묵을 하얏트 리젠시 호텔이 있다. 거기서 5분여 거리에 산 마테오시의 트레이더 조스(TRADER JOE'S)를 견학했다. 큰 슈퍼 같은 곳인데 이곳은 주로 은퇴한 시니어들이 많이 살고 그들이 많이 찾는 매장이다. 품질도 우수하다고 한다. 동행했던 홈플러스 임원은 우리나라 유통업체들이 꼭 견학하는 곳이라고 귀띔해줬다.

다시 280번 고속도로로 가던 중 샌호세(San Jose)와 샌프란시스코의 갈림길이 나오면서 버스는 샌프란시스코 시내 방향으로 빠져 나갔다. 이곳 고속도로는 요금 없이 수시로 드나들 수 있는데 그래서 '프리웨이(Free way)'라고 부른다. 샌호세 방향 남쪽으로 계속 내려가면 LA로 가게 되는데 무려 7시간 걸린다고 한다. 엄청난 거리다. 비행기로 1시간 15분 거리다.

여기에 웃지 못할 일들이 간혹 벌어진다고 한다. 관광 안내를 해주신 현지 교민 김용호 이사는 가끔 서울에서 지인이 LA에 볼 일 있어 간다며 가까운 샌프란시스코에 사니까 LA공항으로 마중 좀 나와 달라고 한다는 것. 이거 서울에서 후쿠오카 거리인데 마중이라니. 미국 지도로 보면 LA 바로 위에 샌프란시스코가 있으니 쉽게 부탁하는 모양이다. 김 이사님은 자칫 얼버무려 대답하면 오해를 사고 해서 아주 조심스럽고 난처한 상황이라고 말한다.

우리 차는 지금 샌프란시스코 시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으로 간다. 대로 양편에 예쁜 집들이 퍽 인상적이다. 어떤 집들은 앙증맞기도 하다. 큰 길을 빠져 나와 '트윈 픽스(Twin Peaks)라고 하는 두 봉우리의 산으로 차가 오른다. 산이라기 보다는 언덕 같다. 대형버스가 좁고 꼬불꼬불한 길을 기어올라가니 발 아래 샌프란시스코 시내 전경이 한 눈에 담긴다.

샌프란시스코 시내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트윈픽스.

한복판에 약간의 고층건물이 있고 나머지는 전부 낮은 건물들이다. 시가지 너머엔 만(湾)으로 된 바다가 있고 왼쪽 멀리엔 그 유명한 금문교의 붉은 주탑도 보인다. 우리 말고도 한국 단체여행객이 있었고 또 수많은 다국적 관광객이 여유있게 경치를 즐기고 있었다. 트윈 픽스에서 내려와 금문교로 갔다. 이곳은 '금문(金門. Golden Gate)'이란 명칭이 많다. 해협으로 된 이곳에 금을 찾아 들어와서 붙은 명칭인데 금문해협, 금문교, 금문공원 등이 있다.

금문교로 가는 길은 왕복 좁은 6차선 도로다. 대형 버스가 다니기엔 차선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땅이 넓은 나라에서 차선 인심은 야박한 느낌이다.

'토목공학의 바이블'로 꼽히는 금문교는 1930년대 건설할 당시 인부들이 아슬아슬한 난간 위를 조심스레 걸으며 일했는데 '고양이가 걷는 모습'이라 해서 '캣 워크(cat walk)'라고 불렀다. 지금도 '좁은 통로 길'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모델이 패션쇼 무대에서 걷는 것도 캣 워크라고 한다.

'토목공학의 바이블'이라 불리는 금문교의 위용.

금문교 아래에는 수많은 요트가 한가로이 떠 있고 그 사이를 초대형 컨테이너 선박이 헤치며 지나갔다. 금문교를 건너지 않고 되돌아 나왔는데 그 오는 길에 나지막한 돔형 옛 건물인 '예술의 궁전'을 지났다. 영화 'The Rock'에서 숀 코네리(Sean Connery)가 딸을 접선하는 장면을 찍은 곳이다.

버스는 샌프란시스코 시내로 들어왔다. 만을 끼고 도시가 형성돼 'City by the Bay' 라고도 부르는 도시다. 전망대에서 보기와 달리 시내는 가파른 언덕길이 유난히 많았다. 도로는 전반적으로 좁았다. 도로 위 공중에는 복잡하게 얽힌 전선이 있는데 이는 전기버스를 위한 전선이다. 유니온 광장을 지나 호텔로 갔다. 2시간 가량 휴식 후 서울 보다 더 맛있는 한식집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간판이 '한일관'이었다. 외곽의 주택가에 자리잡은 이 식당, 저녁 9시 전후 손님들로 북적거렸는데 주변 집들은 마치 유령의 도시 처럼 고요했다.

20일, 이날은 샌프란시스코 시내에서 여자 하프마라톤 대회가 있는 날이다. 도심은 무척 붐비는데 우리는 다행히 시내로 들어갈 일이 없었다. 게다가 요즘 호박축제까지 겹쳐 매우 어수선하고 교통사정도 안 좋다. 지하철 파업까지 했으니.

나는 여느 때와 같이 이른 아침 호텔 식사 후 카메라를 메고 혼자 산책길에 나섰다. 들어올 때 눈여겨 봐 둔 곳을 향해 걸어갔다. 멋진 야자수와 그 옆의 가로등에 앉은 새를 찍고 있는데 지나가던 중년의 서양여성이 뭐라고 말을 건다.

잘 못 알아들어 가까이 다가가 "Excuse me?" 했더니 자신이 걸어온 쪽을 가리키며 큰 새가 있다고 알려준다. 가로등 위의 새를 찍는 모습을 보고 '멋진 제보'를 해 준 것이다. '여기서 얼마쯤 거리냐'고 물으니 '1분 거리'라고 한다. 교수풍의 이 여성은 작은 여행가방을 끌며 무뚝뚝하고 아주 느린 영어를 썼는데 짐작에 독일여성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물어보진 않았다. 인사를 건네고 얼른 가보니 습지 처럼 생긴 작은 도랑을 얘기한 모양인데 새는 그 사이 바쁜 일이 생긴 모양이었다.

나는 다시 도로를 건너 바닷가 쪽으로 다가갔다. 약 1km 저쪽 바다 중간에 활주로가 있다. 바로 그 아시아나 여객기가 사고 난 바다의 활주로다. 부딪힌 그 끄트머리 부분도 눈에 확 들어왔다. TV에서 본 영상을 찍은 사람이 이곳에서 촬영했음이 분명했다. 2분 마다 비행기가 착륙했다. 내가 서 있는 산책길은 바다 쪽으로 1m 높이의 콘크리트 담장이 쳐져 있으며 그 너머 축대엔 약간의 뻘과 바닷물이 이어져 있었다. 간혹 조깅하는 사람도 있었다.

해안가 산책로. 오른쪽 낮은 담장 아래쪽은 바다이고 저 멀리 긴 선 처럼 보이는 것이 샌프란시스코공항 활주로다.

착륙하는 비행기를 300mm 렌즈로 최대한 줌인해 찍고 있을 즈음 옆에 다가온 은발의 중국인 할머니가 뭐라고 마구 말을 건넨다. 총알 같은 말투, 알아듣지는 못했는데 보아하니 축대에 작은 게들이 엄청 많다는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나는 묵묵히 그의 시선을 따라 아래를 훑어보고 있는데 그래도 신이 나서 계속 뭐라고 설명한다. 원래 말이 많은 민족이다. 더 안되겠다 싶어 "워 부스 쭝궈런(我不是中国人ㆍ전 중국인이 아닙니다)"이라고 했더니 당황해 하며 "나, 닌스나궈런?(那,您是哪国人?ㆍ그럼 어느나라 사람입니까?)"이라고 되묻는다. "스한궈런(是韩国人ㆍ한국사람입니다)" 이라고 했더니 몹시 미안해 하며 이번엔 영어로 "I'm sorry, I'm sorry"를 연발한다.

"메이관시(没关系ㆍ괜찮습니다)" 하고는 또 착륙하는 비행기를 몇 컷 찍고 돌아보니 할머니는 간데 없이 사라졌다. 중국인이 많은 동네다 보니 별 생각없이 자국민으로 여긴 모양이다. 그렇다고 그게 뭐 그렇게 미안한 일인가. 어쨌든 여행에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가 이야기 상대가 된다는 것은 나에게 아주 흥미있는 일이다. 내가 호텔방에서만 머물렀으면 이런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이것도 내 여행의 한 부분이다.

아시아나기가 정말 고도를 많이 낮춘 것 같다. 유심히 지켜보니 모든 비행기가 활주로 시작점에서 3분의 1정도 진입한 지점의 구조물 표시에서 착륙을 했다. 안타까운 사고였다. 그 현장에 내가 이렇게 서서 관찰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는데, 세상에 이런 일도 있다.

샌프란시스코공항 활주로에 착륙하는 각국 비행기들. 내가 여기서 사진 찍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가만히 지켜보니 모든 비행기들은 왼쪽의 빨간 구조물 위치에 와서 착륙을 했다.

야자수 나무의 이국풍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이 한적한 마을을 한 바퀴 돌고 돌아오니 오늘 일정이 시작되는 오전 9시다. 오늘 오전 스케줄은 내가 특별히 요청해 서부의 명문 스탠퍼드대학을 견학하기로 했다. 서부에 있어 서부의 명문이지 실은 하버드와 마찬가지로 미국, 아니 세계 최고의 대학이다. 대학투어, 이거 은근히 재밌다.

스탠퍼드대학이 있는 스탠퍼드(Stanford) 시와 팔로 앨토(Palo Alto) 시로 가는 길은 낮게 깔린 안개가 자욱했다. 아침엔 늘 이렇다고 한다. 낮엔 다시 걷히며 맑아진다. HP임원이 많이 산다는 팔로 앨토 시로 들어왔다. 이 대학은 두 도시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광활한 부지에 자리잡고 있다.

광활한 캠퍼스, 무려 160만평에 이른다고 하니 혀를 내두를 만 하다. 대학캠퍼스가 아니라 거대한 공원이다. 설립 당시 조경에 매우 신경을 썼다고 한다. 정문이 따로 없는 미국의 대학, 우리는 굳이 주진입로라고 한다면 할 수 있는 팸 드라이브(Palm Drive)로 들어갔다.

캘리포니아 주지사와 상원의원을 지낸 릴랜드 스탠퍼드가 15살의 외아들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1891년 대학을 설립하고 스탠퍼드라 이름 지었다. 이 대학이 결국 실리콘 밸리의 산실이 되었는데 오늘날 유명한 구글, 야후, 휴렛팩커드, 선마이크로시스템스 등 세계 최고의 IT기업들을 이 대학 출신자들이 설립했다.

학교 건물들은 어디서 이 많은 돌을 갖고 와 지었는지 '지상 최대의 광활한 궁전' 같다. 빌 게이츠가 기증한 노란색 건물도 있다. 중앙에 노란 십자가 탑이 있는 건물은 교회라고 했다. 웬 학교 안에 교회냐 싶었는데 실제로는 어느 종파에도 편견을 두지 않는다고 한다. 거대한 아랍풍의 스페인 궁전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건물 하나하나가 모두 웅장한 예술품 같았다. 이 건물들이야 말로 장인의 혼을 불어넣은 건축물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가수 인순이씨의 딸이 재학 중이라고 한다. 넓게 펼쳐진 잔디밭은 시민들의 휴식처이기도 했다.

세계적 명문 스탠퍼드대학교. 하나의 궁전 같았다.

스탠퍼드를 나와 팔로 앨토와 마운틴뷰 경계지점에 있는 IN-N-OUT에서 햄버거 점심을 했다. 우리나라에는 강남에 잠깐 생겼다 사라진 햄버거 집이다. 좋아하진 않지만 이것도 미국식 식사니 기꺼이 먹어야 했다. 한 끼 굶은 적은 있어도 햄버거 하나로 나의 한 끼 식사를 한 것은 태어나 처음이다. 나에게 햄버거는 어쩌다 먹는 간식이었는데 이날은 주식이 됐다. 현지에서 '생존'하려면 따라야 했다.

식사 후 마운틴뷰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일하고 싶은 직장' 구글 본사로 들어갔다. 일명 '구글 캠퍼스'로 불리는 이곳에서는 예쁜 색깔의 자전거를 타고 넓은 캠퍼스를 돌아다닐 수 있다. 나지막한 잔디밭 언덕들, 그 사이사이 분산돼 있는 건물들, 넓은 공원이 이렇게 품고 있었다. 근무여건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건물 안에는 들어갈 수 없다. 멋진 대학, 멋진 IT기업의 잇따른 방문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구글 본사 방문이다. 이곳에서는 자전거를 타고 넓은 구글 캠퍼스를 둘러 볼 수 있다.

구글에서 나와 스티브 잡스의 생가를 방문했다. 인근 로스 앨터스(Los Altos) 시에 있다. 이곳은 샌프란시스코의 위성도시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버스는 나무들이 울창한 도로를 진입, 조용한 2066번지 스티브 잡스가 소년시절 살았던 생가 앞에 섰다. 잡스는 이 집 창고에서 애플의 공동창업자 스티브 워즈니악, 동생 패트리샤와 함께 '애플 컴퓨터Ⅰ'을 조립해 판매했다. 알고 보면 엄청난 역사적인 현장이다. 캘리포니아 주정부에서 유적지로 만들려고 한다고 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위대한 미래의 유적지를 미리 가 본 셈이다. (귀국 후, 로스 앨터스 시 역사위원회가 현지시각 10월 28일 만장일치로 사적지로 지정했다는 외신을 접했다. 감회가 깊었다)

포장된 도로 양 옆으로 마을 집들이 나란히 있는데 히스패닉계 한 아주머니가 짜증스런 투로 통제했다. 집엔 몸이 불편한 의붓어머니가 살고 있다고 했다. 주차도 오래 못하게 해 5분 만에 떠나야 했다. 스티브 잡스의 연구가 시작된 이 집의 창고 문이 그 순간 너무나도 위대해 보였다. 이해는 했지만 예민한 아주머니 반응만 빼면 고즈넉하고 좋은 동네였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그레이트몰(The Great Mall)'에서 관람을 겸해 쇼핑을 했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아울렛이다. 그냥 한 바퀴 도는 데만도 조금 과장하면 1시간 걸린다. 여기서 3시간을 보냈다. 이날 저녁도 한식이었다. 삼겹살집 '구이구이'였다. 주인 아주머니 모습이 우리 보다 더 한국인다워 여기 오신지 얼마 됐냐고 물으니, 2년 됐다고 한다. 웬지 얼굴에 '서울의 향기'가 남아있었다.

1주일간의 미국 일정을 모두 마쳤다.

샌프란시스코에서 21일 오후 1시 45분 귀국 비행기, 대한항공 KE 024편, 모두가 잠든 시간 나는 이 글을 써야 했다. 돌아가면 달리 해야 할 일이 산더미로 쌓여 있기 때문이다. 약 12시간의 비행,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이번 미국 여행에서 보고 느끼며 적은 메모와 기억을 더듬으며 천천히 정리해 나갔다. 이 기억 저 기억 더듬자니 일본 상공에 이르러서야 이 3편의 원고 정리를 마칠 수 있었다.

귀국길 비행기, 대한항공 기내식 비빔밥이다.

그런데 날짜 변경선을 지나며 모두가 잠든 기내에서 나홀로 불을 켜고 원고정리를 하고 있으니 여승무원들이 계속 다녀간다. 물과 음료, 케이크를 갖다 주며 불편하지 않은지를 꼼꼼히 묻는다. '지극한 보살핌'에 너무 황망해 이제 좀 쉬시라며 오지 말 것을 권했다. 그래도 매 시간 다녀간다. 내가 이거 승무원들을 너무 피곤하게 한 게 아닌가 싶어 원고를 접고 잘까 생각도 몇 번이나 했지만 나에게 그럴 만큼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돌아가면 다른 일 정리가 쌓여 있기 때문이다. 이 일 저 일 펼쳐놓은 게 많고 언제 다 수습할지 나 자신도 난감하다. 그래서 이 시간을 최대한 활용해야 했다.

강승옥 승무원, 아마 사무장인가 그렇다. 그리고 나를 집중 '감시'한 백나윤 승무원, 무어라 감사함을 전해야 할 지 모르겠다. 나는 12시간 동안 이 승무원의 '포로'가 되었다. 그런데 미안하게도 다른 승무원들에게도 감사함을 전해야 하는데 더 이상 이름을 알지 못한다. 그 날 그 팀원들 모두에게 감사함을 전하고 싶다.

장거리 비행을 하는 여행은 신체적으로 힘들기 마련인데, 대한항공 승무원들이 태평양을 횡단하는 12시간 동안 피로를 잊게 해줬다. 나는 이런 환대를 받아본 적이 없다. 그들의 깊은 마음 속에서 우러러 나오는 이 친절한 서비스는 대한민국 국적기 대한항공의 경쟁력임에 틀림없다. 이 분들의 친절이 나의 여행 마지막 부분, 대미를 장식해 줬다. 여행은 그래서 아름답다. 입국심사장을 빠져 나와 1주일 만에 마신 한국의 공기가 더욱 신선하게 느껴졌다.

글ㆍ사진=남민 기자/suntopia@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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