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숲길·낙조.. 고요 속에 충만한 晩秋

박경일기자 2013. 10. 30. 13:5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변산의 안쪽 풍경

# 산 아래쪽에서 먼저 불붙은 단풍

아무래도 정취가 영 예전만 못했다. 부안의 내변산 자락의 이름난 절집 내소사로 드는 길. 그 길의 주인은 누가 뭐래도 하늘로 치솟은 100살 넘은 굵은 둥치의 전나무들이다. 그런데 가지런히 대오를 이뤄 늘어서 있던 전나무의 대열이 살짝 흐트러지고 말았다. 지난해 여름 태풍 때문이었다. 아예 뿌리째 뽑혀 뒹구는 것도 있고, 밑동부터 가지가 부러진 채 죽은 것들도 있다. 길 중간쯤에는 전나무 군락의 둥치가 한꺼번에 뭉텅 부러져 나갔다. 수직이 아닌 수평으로 뿌리를 뻗는 전나무가 바람에 쉽게 넘어진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100년 넘게 제자리를 지켜온 것들이 이렇듯 허망하게 쓰러지다니. 아쉽고 또 아쉽다.

내소사 들머리에 전나무만 있는 건 아니다. 사철 푸르른 전나무 숲의 청량한 향기를 딛고 건너가자마자 붉고 노랗게 물드는 화려한 가을의 경관이 펼쳐진다. 절집의 누각 아래 어둠을 통과해 시야가 탁 트이는 순간에 펼쳐지는 법당 모습이 극적이듯, 초록의 어둑한 전나무 숲을 통과하자마자 시야 가득 펼쳐지는 화사한 가을 풍경이 감격적이다.

전나무 숲길을 지나면 벚나무 터널 차례다. 벚나무는 단풍이 일러서 벌써 가을볕에 잘 익은 잎을 떨구는 중이다. 벚나무 곁을 지키는 것은 선명한 노란빛의 잎을 매달고 있는 은행나무들이다.

천왕문을 지나 내소사로 들면 정면에 활개를 치듯 뻗은 가지마다 단풍으로 물든 잎을 달고 있는 거대한 느티나무가 시선을 잡아당긴다. 아름드리 보리수 나무도 일찌감치 단풍으로 물들었고, 절집 마당 한쪽의 단풍나무도 한 해 중 가장 붉은 절정의 순간으로 치닫고 있다. 말갛게 지워진 법당 처마 단청을 화려한 단풍이 대신하는 듯했다.

단풍은 산정에서 시작해 아래쪽으로 내려오는 게 보통. 하지만 신기하게도 내소사에서만큼은 산 아래부터 단풍의 불이 붙기 시작해 산을 타고 오르는 모양새다.

이즈음 내소사에 갔다면 찾아봐야 할 것 하나. 내소사 종무소 마당과 사찰 담장을 끼고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오솔길 옆의 두 그루 나무가 난데없이 순백의 꽃을 틔워냈다. 반들반들한 수피로 보나 가지에 잎 없이 꽃부터 틔우는 것으로 보나 영락없는 벚나무다. 하지만 가지가 낭창거리고 꽃잎의 모양이 치렁치렁한 게 벚꽃과 좀 다른 듯하다. 스님을 붙들고 물어도 어떤 이는 '철 모르는 벚꽃'이라고 하고, 다른 이는 '일찍 핀 매화'라며 말이 다르다. 나무도감을 펴낸 학자에게 수소문하고 자료를 뒤져 겨우 찾아낸 이름이 '가을벚나무'다.

가을에서 겨울까지 꽃을 피우는 가을벚나무는 모든 것이 다 저무는 가을에 나무의 빈 가지에 꽃을 틔워내며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고 있다. 절집에서 그 나무를 거기 심은 데는 혹시 '끝'과 '시작'을 잇는 숨은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 관음전, 그리고 청련암의 고즈넉한 아름다움

내소사 등 뒤쪽 내변산 관음봉 아래에는 관음전이 있다. 암자가 아닌 전각이 이처럼 사찰에서 뚝 떨어져 홀로 서있는 건 이례적이다. 내소사는 익히 알려진 절집이지만 관음전은 아는 이들이 거의 없다. 내소사를 찾는 이들이 절집의 그윽한 정취며 단정한 꽃문살에 정신이 팔려 절집 뒤쪽까지는 좀처럼 시선을 돌리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풍이 밀려 내려오는 이즈음에는 관음전이 대번에 눈에 띈다. 아직 초록의 기운이 가시지 않은 산자락에 관음전 주변에만 단풍이 붉고 노랗게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관음전 주위를 일부러 화사한 단풍으로 치장해 장엄한 듯하다.

내소사 경내에서 관음전까지는 가느다란 물길을 끼고 이어지는 인적 없는 산길로 접어들어야 한다. 본래 이 길은 내변산의 새봉까지 이어지는데 등산객들은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는 곳이다. 길은 늘 비워져 있고, 간혹 기도를 하려는 신도들만 조용하게 오갈 뿐이다.

관음전으로 향하는 길.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길 아래 계곡에 아름드리 전나무들이 쓰러져 이끼에 뒤덮여 있다. 이쪽 길에서는 유독 선명한 단풍이 눈길을 붙잡는다. 관음전까지의 거리는 그닥 멀지 않지만 제법 경사도가 있어 오름길에서는 숨이 가쁘다.

관음전이 앉은 자리는 탄성이 터질 정도로 빼어나다. 붓을 입에 문 채 대웅전을 단청하던 한 마리 새가 스님이 몰래 엿보자 날아가서 앉은 자리라는 전설이 전해지는데, 과연 그럴 법하다. 전설처럼 관음전 마당에 서면 새의 시선으로 내소사의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다.

산자락에 올라 뒤쪽에서 보는 내소사의 모습은 앞에서 볼 때와는 사뭇 다르다. 내소사 앞에서는 우뚝 선 관음봉의 위세 탓에 절집이 평면적으로 보이지만, 관음전에 올라 절집 뒤편에서 내려다보니 양옆 산자락의 긴 능선이 만나는 자리에 터를 잡은 내소사가 자못 입체적인 느낌이다. 절집의 자리가 명당이기도 하거니와 그 자리를 바라보는 관음전의 자리도 가히 명당 중의 명당이라 할 만하다.

관음전에서 다시 산길을 더 짚어 올라가면 거기 내변산의 암봉과 하늘을 지붕 삼은 암자 청련암이 있다. 청련암은 내소사 창건에 앞서 먼저 문을 열었던 곳. 본디 청련암에서 불법을 설파하다 신도들이 모여들자 산 아래에 내소사를 지었다고 전한다.

청련암까지 이어지는 길은 시멘트로 거칠게 포장돼 있지만 어찌나 가파른지 일어선 길에 코가 닿을 지경이다. 하늘이 안 보이는 숲에서 굽이굽이 휘어지는 길을 숨을 헐떡이며 오른다.

가파른 길의 끝에서 바람소리 서걱이는 대숲이 나타났고, 그 숲을 지나자 곧 청련암이었다. 암자의 스님이 나뭇가지 몇 개로 문을 삼았는데, 가로 걸친 나무를 치우고 들어서자 축대 위에 올라 살짝 비껴 앉은 청련암과 그 옆으로 이어지는 암봉의 모습이 나타났다. 암자 앞마당에는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한창 노란 잎을 떨구고 있었고, 그 뒤쪽으로는 감나무에 봉시감이 붉게 익어가는 중이었다.

적막한 암자를 바람이 지나가면서 뎅그렁 뎅그렁 풍경소리를 울렸다. 풍경이 매달린 처마에는 시가 적힌 편액이 걸려 있다. 그중 한 구절. '客來莫道世間事(이곳에 오는 객은 세상일을 이르지 말라) 時聞鐘聲滌世音(때때로 들리는 종소리가 세상의 소리를 씻어내리니).' 편액 아래 툇마루에 앉으니 멀리 줄포만의 바다와 그 너머에 고창 땅의 선운산이 정면으로 바라다보였다. 역광의 바다는 온통 은박지처럼 반짝거렸다.

# 내변산의 아름다움을 보는 법

가을 내변산의 아름다움을 본격적으로 만나고 싶다면 남여치 고개에서 출발해 월명암 낙조대에 올랐다가 직소폭포를 지나 관음봉을 거쳐 내소사 쪽으로 내려오는 코스를 택하는 것을 추천한다. 체력에 자신이 있다면 내친김에 관음봉에서 새봉을 지나 가마소를 거쳐서 내변산탐방지원센터로 내려오는 긴 등반 코스를 택해도 나무랄 데 없다. 하지만 본격 등산보다는 가볍게 단풍산행을 즐기겠다면 내소사에서 관음봉을 올랐다가 직소폭포 쪽으로 내려서는 왕복 3시간 남짓의 코스가 맞춤하다. 경사가 그리 심하지 않은 데다 길도 뚜렷해 편안하게 다녀올 수 있다. 관음봉에서는 내소사 일대는 물론이고 반대편 직소보 쪽의 풍경까지 내려다보인다.

그저 내변산을 산책 삼아 가볍게 둘러보겠다면 직소폭포를 다녀오는 길을 택하는 편이 낫겠다. 직소폭포 쪽 단풍은 내변산에서 가장 빼어나기도 하거니와 폭포 아래 물을 가둬 만든 직소보가 단풍에 물든 모습도 예사 풍경이 아니다.

직소폭포를 찾아가는 들머리는 국립공원 내변산탐방지원센터. 여기서 실상사지를 지나 봉래구곡의 물길을 따라 들어간다. 이 길에는 지난 2011년에 조성해 놓은 1.2㎞에 이르는 단풍 터널이 있다. 지난주만 해도 단풍잎이 아직 다 물들지 않았지만, 지금쯤이라면 붉은색이 더 짙어졌으리라.

탐방지원센터에서 직소폭포까지는 거의 경사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평탄하다. 이 길에서는 직소폭포와 폭포 아래 분옥담과 선녀탕, 그리고 직소보 일대가 가장 아름답다. 그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곳이 직소보다. 본래 부안군민들의 비상식수원을 확보하기 위해 산중의 물길을 작은 보로 막아 물을 가뒀는데 이제 쓸모가 없어져 내버려둔 곳이다. 협곡의 산중에 작은 호수가 주변의 단풍과 어우러져 빚어내는 정취가 인상적이다. 직소보 위쪽에 석벽으로 이뤄진 분옥담과 선녀탕도 빼어나다. 하지만 직소폭포는 물이 말라 물줄기의 흔적도 보이지 않을 정도니 기대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

변산에서는 바다를 끼고 달리는 드라이브를 빼놓을 수 없다. 해안을 따라 이어지는 30번 국도는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로 꼽힌다. 변산면사무소에서 고사포 송림해수욕장 쪽으로 이어지는 해안도로는 하섬 앞바다와 적벽강과 채석강을 지나고 격포항과 모항해수욕장을 지난다. 근래에 이쪽 해안에 콘도며 대형 펜션이 속속 들어서 예전의 소박한 갯벌의 어촌 풍경이 사라져 가고 있지만 해질 무렵 은박지처럼 반짝이는 바다와 갯벌을 굽어보고 달리는 맛은 여전하다. 마침 이 길을 달리면서 낙조의 시간을 만나게 된다면 갯벌 너머로 바다와 하늘을 온통 붉게 물들이며 지는 해를 만날 수 있다.

부안 = 글·사진 박경일 기자 parking@munhwa.com

[Copyrightⓒmunhwa.com '대한민국 오후를 여는 유일석간 문화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구독신청:02)3701-5555/ 모바일 웹:m.munhwa.com)]

Copyright © 문화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