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낡은 골목에 농담을 걸다

2013. 9. 26.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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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esc] 라이프

북촌, 용산, 시민공원 등 서울 곳곳에 기습적으로 예술작품 설치하는 도시게릴라 프로젝트

도시가스 계량기함을로봇 얼굴로 바꾸고갈라진 벽에 꽃을 꽂았다밤중에 몰래 온 산타클로스처럼

▷ 밤을 틈탄 도시게릴라 프로젝트 화보 보기

9월6일부터 북촌 거리에는 밤만 되면 어슬렁거리는 수상한 그림자들이 있었다. 저녁 7시면 서울 종로구 계동 옻칠연구소 칠원에서 출발해 골목길 옹벽, 맨홀 뚜껑, 벽의 틈새, 도시가스 계량기에 무언가를 붙이고 새벽 3시에나 돌아오는 이들은 도시게릴라 프로젝트를 수행중인 4명의 예술가다. 그들이 지나가면 거리가 조금씩 달라졌다. 그러나 눈을 크게 떠야 보이는 소소한 변화다. 도시가스 계량기함은 눈·코·입을 갖춘 로봇 얼굴로 바뀌고, 배수관은 얌전한 속눈썹을 달았다. 집과 집 사이 좁은 벽에는 암벽등반 하듯 벽을 오르는 작은 사람 인형이 붙었다. 아스팔트길 바닥에 쓰여 있는 '일방통행'의 'o' 자는 꽃 그림으로 바뀌어 있었다.

도시게릴라 프로젝트에서 북촌을 맡은 'M조형'팀은 연질 아크릴인 포맥스로 만든 3~20㎝ 정도 크기의 작은 조형물 66개를 붙였다. 작품의 배경을 이루는 것은 동네의 오래된 사물들이다. 도시게릴라 팀은 낮이면 동네를 돌며 방치된 전깃줄, 갈라진 담벼락, 돌멩이들을 살피며 아이디어를 스케치했다. 전깃줄은 밧줄로, 담벼락 돌멩이는 사람 얼굴로, 옹벽을 괴고 있는 큰 돌은 고래로 보이게 할 트릭을 구상했다가 밤에 몰래 설치하는 식이다. 주로 상가와 주택가 사이 중립적인 한뼘지대를 공략하지만 가끔은 엄숙한 표지판에도 흔적을 남긴다. 북촌길이 갈라지는 이정표 위에는 20㎝ 정도 길이의 생각하는 사람 인형이 올라앉았다.

9월16일 밤 10시, 서울 용산구 보광동에서도 3명의 예술가가 밤일을 나섰다. 창작그룹 길종상가 소속 작가 3명은 동네를 한바퀴 돌며 역시 이상한 일로 분주했다. 김윤하 작가는 갈라진 벽이나 하수관에 야자 잎과 꽃을 풍성하게 꽂았다. 류혜욱 작가는 세탁소 간판을 떠받친 돌이나 버려진 벽돌, 타이어를 하얀 레이스로 조심스레 감쌌다. 박길종 작가는 도시가스관이나 창살을 노란 테이프로 장식했다. 누군가 "밤중에 몰래 와서 크리스마스 선물을 두고 가는 산타클로스 같다"며 킥킥거렸다. 게릴라 예술가들은 과연 산타클로스처럼 낮이면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앉아 무료함을 달래던 찢어진 의자와 오래된 경로당 나무 현판들을 색색깔의 꽃으로 장식했다. 남의 집 대문에 수국을 꽂아두기도, 천막을 걸어둔 물통을 리본으로 장식하기도 했다. 이날 마을버스 한 대가 간신히 지나갈 정도로 좁은 길종상가 앞 우사단길 200m는 선물처럼 곱게 포장됐다. 박길종 작가는 "가볍고 귀한 레이스와 무겁고 하찮은 돌멩이가 빚어내는 대조적인 이미지가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아무도 신경 안 쓰고 골목에 굴러다니던 사물들을 사람들이 새삼 주목하게 되기를 바랐다"고 설명했다.

꽃이 피지 못하는 곳에서 꽃이 피는 모양을 만들어내는 것을 미술이라 부른다. 밤을 틈타 은밀히 서울의 표정을 바꾸는 이 거리미술은 서울문화재단이 도심 곳곳에 예술작품을 그려넣자는 뜻으로 마련한 도시게릴라 프로젝트다. 60여명의 작가가 다섯 그룹으로 나누어 서울 다섯 곳에서 150여점의 작품을 설치했다.

청소나 환경미화도 아니고, 그렇다고 공공미술이라고 부르기에도 소소한 이들의 작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M조형'팀을 맡은 이구영 작가는 "골목을 다층적인 무대로 생각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엔 골목 바깥에 화려하게 장식한 가게만 주로 눈에 들어오지만 골목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세월과 삶의 층위를 느낄 수 있는 재료들이 있다. 제대로 게릴라 짓을 해보려고 담벼락 소유자들 허락은 받지 않았다. 상상력을 제약받지 않고 작가 마음대로 치고 들어갈 수 있는 이런 작업을 몹시 소원했다"고 했다. 도시게릴라 프로젝트를 총괄하는 박찬국 감독은 "서울은 진짜 다양한 풍경이 합쳐진 도시인데 다들 하나의 방식으로만 이야기하려고 한다. 사회 전체가 지배적인 담론으로 가득 차서 농담이 허용 안 되는 도시다. 도시게릴라 프로젝트는 작가들이 골목에서 작은 농담거리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보광동과 북촌에 게릴라 예술가들이 출동한 것과 비슷한 시기에 한강시민공원 반포지구에선 '소심한 상상'팀이 테이프를 들고 나섰다. 이들은 연두색 테이프를 붙여가며 아스팔트 바닥이나 벽, 기둥에 낙서 같기도 하고 디자인 같기도 한 그림을 그려냈다. 벤치가 있으면 좋을 듯한 버스정류장 앞 바닥엔 벤치 모양으로 테이프를 붙이고, 너무 단단해 정감 가지 않던 콘크리트벽엔 쥐구멍과 쥐구멍을 지키는 고양이를 그렸다. 한강공원을 달리던 사람들이 문득 놀라 돌아보게 되는 그림자를 닮은 그림도 있다. 서울 시청역 4번 출구에는 '이동식 서울전망대'라는 콘셉트의 잠망경을 단 자전거가 설치됐다. '대뱃살'팀 작가들이 '시청8경'이라고 이름 붙인 시청 주변의 소소한 풍경들을 감상할 수 있는 자리다. '무늬만 커뮤니티'팀은 강변북로 원효대교부터 한강대교 사이와 용산역 일대를 맡았다. 먼지 덮인 길거리를 화폭 삼아 이들은 글자나 문양 모양으로 먼지를 지우는 '때를 벗기는 드로잉'을 해왔다. 이번에도 강변북로의 방음판을 닦아 '보이지 않는 공공'이라는 글자를 만들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공공' 글자에 곧 먼지가 쌓일 것처럼 다른 게릴라의 작품도 빠르게 훼손되거나 없어질 운명이다. '길종상가'가 보광동에서 설치한 꽃과 레이스는 다음날 빠르게 '털렸다'. 꽃이며 리본을 어여삐 본 동네 노인들이 앞다퉈 집으로 거둬들였기 때문이다. 북촌에 설치한 작은 조형물들도 여럿 없어졌다. 작가들은 "도시에 누를 끼치지 않는 방식으로 즐기며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내려는 의도였기 때문에 쉽게 없어질 수 있는 재료를 택했다"고 말했다. 박찬국 감독은 한술 더 떠 "작가 시점과 의도를 주장할 마음도 권위도 전혀 없다. 이건 농담이니까 보는 사람들도 농담으로 받으라"고 한다. 어떤 농담이 통할까? 박 감독의 말을 들어보면 "예를 들면 우리가 빚은 얼굴 그림에 누군가 수염을 그려내는 것, 우리가 하는 작업을 보고 다른 작가들도 자기 동네에서 다른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내는 것"이란다.

10월 첫주 서울문화재단에선 시민들이 도시게릴라 프로젝트로 만들어진 작품들을 사진으로 찍어 에스엔에스에 올리는 '우리 동네 숨은그림찾기'라는 행사를 벌일 예정이다.

글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사진 서울문화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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