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족을 무참히 파괴한 공안정국

2013. 8. 28.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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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7인의 변호사들] 긴장감이 고조되던 1987년 살인사건을 간첩사건으로 둔갑시킨 안기부

'간첩' 지목 수지킴의 5자매 모두 이혼당하고, 고문·해직·정신이상 겪어

변호사 일을 하다보면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사건을 만나는 경우가 있다. 나는 지금까지 그런 사건을 두 번 만났는데, 그중 하나가 오늘 이야기하려는 사건이다. 미리 두 가지를 밝혀두면, 첫째 이 사건은 인터넷 검색만 해도 내용을 알 수 있는 '수지킴 사건'이라는 것이고, 둘째 이 사건은 내가 진행한 사건이라기보다는 선배 변호사들이 진행한 사건에 후배로서 조금 관여한, 시쳇말로 숟가락만 올린 사건이라는 것이다.

북한대사관 망명 신청 안 받아들여지자

수지킴 사건이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사건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다. 첫째, 주인공 수지킴(김옥분)과 윤태식의 만남과 파국, 김옥분의 기구한 인생과 윤태식의 변화무쌍한 변신이 그렇다. 둘째, 단순한 부부간 살인사건이 윤태식의 거짓말과 국가안전기획부(현재의 국가정보원)의 개입이 만나 여간첩의 남편 납북 기도 사건으로 조작된 뒤, 안기부 내부적으로는 살인사건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음에도 오랫동안 은폐됐고, 그 과정에서 김옥분 유가족은 간첩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국가와 사회로부터 엄청난 고통을 겪으며 무너져간 경위가 그렇다.

주인공들에 대해서는 여러분께서 직접 찾아보시라. 1남6녀의 둘째딸로 태어나 교육받지 못하고 살기 위해 버스 안내양 등을 전전할 수밖에 없던 1970~80년대 누이와, 화려한 언변과 빠른 판단력, 사교성으로 현란하게 변신하며 성공 직전까지 갔던 남자를 만나게 될 것이다. 여기서는 경위만 살펴보자. 윤태식은 결혼한 지 채 3개월도 되지 않은 1987년 1월3일, 거주지인 홍콩 소재 아파트에서 부부 싸움 중 김옥분을 목 졸라 살해한다. 윤태식은 책임을 면하기 위해 1월5일 싱가포르 주재 북한대사관에 찾아가 망명 신청을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다시 싱가포르 주재 미국대사관을 찾아갔고, 미국대사관 쪽은 그의 신병을 싱가포르 주재 한국대사관에 인계했다.

그런데 윤태식은 한국대사관에서 "북한 공작원에게 납치됐다 탈출했으며, 아내는 북한 간첩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를 면담한 안기부 현지 주재관들은 윤태식의 진술에 일관성이 없고 그가 북한대사관에 망명 신청을 했었다는 첩보가 입수된 점을 감안해 본국에 윤태식과 관련한 기자회견을 여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건의를 했다. 이장춘 싱가포르 대사는 기자회견을 강력히 반대했다. 하지만 안기부는 장세동 부장의 지시로 기자회견을 강행한다. 싱가포르와의 외교 마찰을 우려해 1987년 1월8일 윤태식을 타이 방콕으로 데려가 언론과 인터뷰하게 한 뒤 다음날 그를 국내로 데려와 김포공항에서 '동거하던 북한 공작원 김옥분과 조총련계 공작원에 의해 납치될 뻔하다가 탈출했다'는 내용으로 기자회견을 했다.

그 직후 안기부는 윤태식을 심문해 '김옥분을 살해하고 이를 모면하기 위해 북한대사관에 망명을 신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미국대사관을 거쳐 한국대사관으로 와서 허위 진술을 했다'는 진술을 받았지만, 윤태식이 이미 기자회견을 해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장세동 등의 지시로 수사를 종결했다. 그 뒤 안기부는 언론에는 윤태식이 여전히 반공투사고 북한 공작원 김옥분에 의해 북한으로 납치될 뻔한 것으로 설명했다. 1987년 1월26일 김옥분의 주검이 발견돼 홍콩 경찰이 윤태식을 용의자로 지목하고 수사 협조를 요청하자 이를 거절한 채 윤태식에게 세뇌교육·보안교육을 한 뒤 1987년 4월 석방했다.

전매청 해직되고 이발소 문을 닫고

언론인·변호사 등의 노력을 바탕으로 김옥분의 오빠 김만식은 2000년 3월 윤태식을 고소했고, 검찰은 살인죄의 공소시효 15년이 만료되기 51일 전인 2001년 11월13일 극적으로 윤태식을 살인죄 등으로 기소해 결국 2003년 5월 대법원에서 유죄판결이 확정됐다. 다만 조작·은폐를 주도한 장세동 등 안기부 관계자들에게는 직권남용죄와 직무유기죄의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공소권 없음' 처분이 내려졌다.

1987년 당시 김옥분에게는 어머니가 생존해 있었고 오빠·언니 1명씩과 여동생 4명이 있었다. 앞서와 같이 조작·은폐가 진행되는 동안 유가족은 간첩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안기부에서 폭력적·반인권적 조사를 받고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았으며 생계는 무너져갔다. 어머니는 안기부에서 온갖 모욕을 당하며 조사를 받았다. 오빠도 안기부에서 비인간적 조사를 받았으며 윤태식을 고소한 뒤 쌓였던 한이 터져 폭음을 하다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언니는 당시 실질적 가장으로서 전매청에 다니고 있었다. 동생이 간첩으로 보도된 뒤 해직됐고, 해직과 동생이 간첩이라는 충격 등으로 정신이상자로 지내다 1987년 11월 사망했다. 첫째 여동생은 혼인해 이발소를 하고 있었는데 보도 뒤 이발소 문을 닫게 됐다. 언니 일로 시댁 식구들의 핍박을 견디다 못해 이혼을 하게 됐다. 그 뒤 간첩 가족이라는 이유로 정규직 노동을 할 수 없어 어려운 생활을 했다.

둘째 여동생은 김옥분과 홍콩에서 함께 생활했기 때문에 특히 안기부에서 심하게 조사를 받았다. 언니의 사생활과 그녀의 사생활을 연결시키는 폭력적인 이야기를 듣고 이후에도 전화를 도청당하는 등 계속 감시를 받았다. 또한 언니의 사생활에 대한 선정적인 보도가 있자 시댁 식구들로부터 이혼을 강요당했고, 신경쇠약·대인기피 증세를 보이게 됐다. 셋째 여동생의 경우 언니가 간첩이라는 보도가 나온 건 결혼한 직후였다. 시댁 식구들은 혼인신고를 못하게 했고 그녀는 집에서 쫓겨나 절에서 생활하다가 결국 이혼했다. 막내 여동생은 언론 보도 뒤 결혼했지만 언니와 관련된 가족사가 알려진 뒤 이혼을 당했다.

독재정권과 민주화 세력의 긴장감이 고조되던 1987년이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국가가 단순한 살인사건을 정치적으로 사건을 활용하고 간첩 사건으로 조작·은폐하는 과정에서 김옥분의 인격과 명예가 처참하게 짓밟혔을 뿐 아니라 그 유가족의 삶이 되돌릴 수 없게 파괴된 것이다. 그리고 그 가해 주체는 국민에 대한 보호 의무가 있는 국가, 요즘 자주 언론에 오르내리는 현재의 국가정보원이었다.

유가족은 국가와 윤태식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고, 법원은 2003년 8월14일 상당한 액수의 배상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그 배상금으로도 파괴된 가족과 삶은 회복될 수 없었다.

사명감을 갖고 헌신한 사람들

한편 조작·은폐돼 오랫동안 망각의 바다에 가라앉았던 수지킴 사건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라 세간의 관심을 받고, 결국 살인자와 조작·은폐 행위의 관여자들이 형사처벌되고, 국가가 수지킴의 유가족에게 손해배상을 하게 되는 과정에는 사명감을 갖고 각자의 위치에서 주어진 일을 헌신적으로 한 사람들이 있었다. 언론매체에서 다루기를 거부하던 이 사건을 집요하게 취재해 보도한 당시 < 주간동아 > 이정훈 기자, 처음으로 이 사건을 방송한 SBS < 그것이 알고 싶다 > 의 남상문 PD,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위원으로 이 사건의 형사 고소를 대리해 공소시효 완성 직전 윤태식에 대한 검찰 구속 기소를 이끌어낸 전해철 변호사, 지인에게 돈을 빌려와 소송이 가능하도록 했던 이덕우 변호사, 손해배상 청구 액수에서 기존 관성을 깨도록 한 장완익 변호사, 당시 서울지검 외사부 소속으로 자비를 들여 수사하고 윤태식을 구속 기소한 고석홍 검사 등이 있었기에 진실은 밝혀졌고 부분적으로나마 정의가 실현됐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 사람들 일부를 만났고, 이 사건을 해결하는 데 옆에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 것을 나는 아직도 큰 영광으로 생각한다.

박갑주 변호사·법무법인 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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