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가볍게 걷기..조선의 출세길 삼남로 모락산길

2013. 7. 31.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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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도로는 언제 만들어졌을까? 그건 아무도 모른다. 남아있는 기록만을 기준으로 본다면 삼국, 고려, 조선을 거치며 조성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특히 조선의 기록은 비교적 가깝고 상세하므로 체계화된 길은 조선 때 완성되었고, 그것을 기반으로 오늘날의 도로가 건설되었다고 볼 수 있다. 어떤 길은 큰 도로로, 또 어떤 길은 옛길 그대로 산과 강의 소로가 되어 지금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정다운 친구가 되었다. 삼남로도 그런 길 가운데 하나다.

조선 시대 호남의 대표적인 명문가 가운데 윤선도 집안이 있다. 그의 4대 조부인 윤효정이 해남에 자리잡은 뒤 그의 집안은 대대손손 과거에 합격하며 부와 명예를 획득, 지역 토호가 되기에 이르렀다. 중요한 것은 '대대손손 과거 급제'였다.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아버지 할아버지가 아무리 잘 나가는 인사였다 해도 별 볼 일 없는 신세가 되고 마는 게 계급 사회 조선의 상식이었다. 윤선도 후손들은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엄격하고도 체계적인 교육을 받으며 과거 시험을 준비했고 또한 누구 하나 예외없이 삼남길을 걸어야 했다. 명문가였으니 여정이 비교적 쉬었을지는 모르겠으나 아무리 우마를 대령했다 해도 결코 만만한 여정을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 해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삼남길'을 오늘의 지도를 기준으로 되짚어보면, 그 길이 얼나마 끔찍하게 멀고 험한 여로였는지 단박에 알 수 있다. 삼남길은 제주에서 시작되었고, 뱃길을 뺀 육지 구간은 완도가 바라보이는 해남군 이진리 포구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윤선도의 집이 있었던 오늘의 해남군청과 강진을 지나 월출산이 있는 영암, 그리고 나주-광주-장성-정읍-김제-익산-논산-공주-천안-안성-평택-오산-수원-의왕-평촌-과천-남태령-사당-이수-이촌-삼각지-청파-숭례문에 이르는 멀고 먼 길이었다. 이 중 전라남도를 지나는 길이 230km, 전라북도 89km, 충청남도 118km, 경기도 90km, 서울 12km 등 삼남길 전 구간의 거리는 총 540km 여에 이른다. 이 길을 사람이 걸으면 도대체 몇 시간이 소요될까? 한 시간 동안 사람이 걸을 수 있는 거리는 약 3km정도다. 300km를 걸으려면 100시간이 걸리고 240km를 또 걷기 위해서는 80시간이 소요된다. 합치면 180시간, 날 수로 단순 계산하면 7.5일 동안 쉬지도, 먹지도, 자지도 않고 걸어야 도착할 수 있는 거리다. 여기에 자고(8시간), 먹고(3시간), 쉬는(3시간)을 뺀 10시간을 대입하면 해남에서 한양까지 가려면 대략 18일이 걸린다는 계산이 나온다. 서둘러 걸어도 15일은 잡아야 하는 것이다. 그 일정이란 생각만 해도 종아리에 쥐가 날 일이지만 출세의 방법이 과거 급제 말고는 없는 세상에서 그들의 15일 도보는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삼남길은 유배길이기도 했다. 다산 정약용은 삼남길을 걸어 해남으로 유배당해 살며 수많은 저서를 남겼으며, 추사 김정희는 해남도 모자라 뱃길을 가로질러 제주 관덕정 앞을 지나 또 다시 제주 서쪽 마을 대정 깊은 골까지 들어가 세상과 유리되었었다. 추사 또한 정약용과 마찬가지로 유배 중에도 자신의 학문에 소홀하지 않았고 제주 현지 유생들을 가르치고 그림과 글씨 작업도 꾸준하게 하다 귀양이 풀려 과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정약용과 김정희가 해남과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한 것이 꼭 나쁜 일만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일이기도 하다. 그들은 유배지에서 만난 우리나라 차의 신성인 초의선사와 굳건한 문화 네트워크를 만들기도 했다. 이들에 비해 조선 유학의 좌장이었던 송시열은 제주에서 귀양을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전라북도 정읍을 지나다 임금이 내린 사약을 받아 먹고 죽는 처참한 일을 당하기도 했다. 글의 머리에 등장했던 윤선도 역시 고향인 해남 근처의 보길도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삼남로 거리상 그 전 코스를 걸어서 여행하겠다는 것은 생각할 엄두도 나지 않는 일이지만, 부분 구간 정도라면 한번쯤 걸어볼 만 하다. 최근에 개통된 삼남길 경기도 구간이 바로 그곳이다. 삼남길이 지나는 곳으로는 서울, 경기, 충남, 전북, 전남, 제주 등인데, 도별 전 구간이 개통된 곳은 것은 경기도와 전라남도 정도며 다른 지역은 순차적으로 개통할 예정이다. 특히 경기도 구간은 전 구간이 일단 개통되었으며 실제로 걸을 수 있는 상태라 수도권 도보여행자들이 집중적으로 몰리고 있는 코스이기도 하다.

청량한 모락산길, 착잡한 문화유적의 실종

삼남길 경기 구간 가운데 '모락산길'이 특히 마음을 당기는 이유는 아마도 그 길이 조선 정조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원명 장헌세자, 추존왕명 장조)의 묘소를 화성 '융릉'으로 옮긴 후 가끔씩 참배를 위해 떠난 '능행'의 길을 품고 있는 까닭이리라. 모락산길의 시작은 바로 정조대왕이 융릉을 오가며 길을 재촉했거나 창덕궁으로 환궁하는 길에 서서 또 다시 불쌍한 아버지에 대한 회환으로 눈물짓곤 했다는 지지대고개에서 출발한다. 정조대왕의 행차는 창덕궁을 떠나 종루(보신각) - 숭례문 - 노량진 배다리 - 금불고개(숭실대 부근) - 사당사거리 - 남태령 - 과천행궁(온온사) - 찬우물고개 - 인덕원 사거리 - 군포 - 사근참행궁, 그리고 지지대 고개를 지나 화성행궁에 머문 뒤 융릉으로 향했다. 삼남길 경기도 구간 가운데 수원, 의왕, 과천시 구간과 일치하는 코스다.

오늘의 지지대고개에는 소박한 규모의 휴게소와 정조대왕의 능행을 기념하는 지지재비가 서 있고, 모락산 길은 정조대왕이 화성을 향해 떠난 방향과 정반대인 의왕시 일대를 향한다. 처음 만나는 곳은 '골사그네'. 조선 때 이 마을에는 전주 이씨, 마씨, 경주 배씨 등이 부분적 집성촌을 이뤄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골이 너무 깊고 험하며 맹수들도 많아 사람들이 살기를 꺼려해 매년 10월이면 평화로운 삶을 기원하는 당제를 지냈다고 전해진다. 당제는 21세기 오늘에도 시골에 가면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장면인데, 골사그네의 당제는 이 일대에 경수산업도로가 건설되는 과정에서 '서낭당'이 철거되면서 중단되었다. 골사그내에서 도심으로 발길을 돌려 고천동 주민센터로 향한다. 이곳은 사근행궁이 있던 곳이다.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사근행궁은 정조대왕이 화성 원행을 시작하며 그 루트 가운데 주요 경유지를 선정, 행궁을 세운 여섯 곳 가운데 한 곳이다. 행궁이란 임금의 능행 때 종사를 보고 숙소로 사용하던 별궁이었다. 도성을 벗어나 과천 남태령 고개를 넘은 대왕의 일행은 지지대고개를 넘기 전 이곳 사근행궁에 묵으며 숨을 골랐고, 휴식을 끝낸 뒤 능행의 마지막 관문인 지지대 고개를 향해 다시 행열을 시작했을 것이다. 사근행궁은 정조대왕의 행궁 기능 뿐 아니라 당시 지역 경제 발전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고 전해진다. 사근 행궁은 원래 정당과 두 동의 창고로 이뤄진 아담한 곳이었으나 1795년 장조(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마련한 대규모 원행을 계기로 규모가 확장되었다. 정조의 행차가 잦아지면서 사근행궁 일대는 도로 등 마을 기반 시설이 수시로 정비되어 행궁 마을 사람들의 삶의 질이 높아졌으며 임금의 행차를 보려는 관광객들이 근처 마을에서 대거 몰려오기도 했다. 발빠른 장사꾼들은 그런 관광객을 상대로 먹거리와 토산품을 팔았고 관광객들이 들락거리는 주막의 매장도 자연히 올라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동네방네 시끌벅적하게 만들어주었던 사근행궁이 사라진 이야기를 들으면 안타까움과 함께 화가 날 지경에 이른다. 사근행궁이 철거된 것은 일제 때였다. 당시 총독부는 광주군 의왕면과 일형면을 통합하면서 새로운 면사무소 건축 비용을 마련한다는 명목으로 그때까지 의왕면 사무소로 사용되던 행궁의 매각을 결정했다. 물론 주민 자치라는 요식행위는 밟았지만 결국 총독부가 계획하고 한때 정조대왕 행렬에 고개를 조아렸던 지역 일부 토호들이 추임새를 놓은 결과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면사무소 건축을 위해 매각할 정부 땅이 행궁밖에 없었을까? 모락산길의 백미는 역시 모락산에 접어들어야 확인할 수 있다. 산길로 접어들자 조금 전 비석 하나로만 남겨진 사근행궁을 보며 착잡해 했던 마음에 청량한 바람이 들어오며 기분도 전환모드로 흘러간다. 야트막한 산길을 걸으면 나도 모르게 초록이 주는 계절의 향기에 취한다. 산길 중간 쯤에는 청풍 김씨 '김징묘역'이 있다. 남의 묘역에 들어간다는 게 결례인 건 알지만 이곳을 들어가게 되는 이유는 그 땅의 영험함 때문이다. 100년 동안 정승 6명을 배출했다는 청풍 김씨에 대한 호기심과, 풍수가 대부분이 '최고의 명당'으로 손꼽은 이 묘역에서 잠시나마 좋은 기운을 받아보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 아닐까? 이어지는 산길에서 만날 수 있는 곳은 오매기마을. 이 마을은 전형적인 농촌 마을로 자연과 부락이 하나의 풍경으로 합쳐진 그림 같은 동네다. 풍경이 너무 예뻐 화가들의 사생 현장으로 애용되기도 하는데, 자칫 사유지로 들어설 수도 있으니 절제와 예의가 필요한 곳으로 기억해야 한다. 그 다음에 만나는 유적지는 임영대군 묘역. 임영대군은 세종의 넷째 아들이다. 안평대군과 함께 성균관에서 공부한 그는 우의정 최승령의 딸 최씨 제안부 부인과 혼인했고 총통과 화차 제작 등 과학적 총명함으로 세종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사건 당시 저항하던 안평대군과 달리 경기도 광주 의곡으로 은신, 9남2녀의 자손을 본 후 1469년에 죽었다.

임영대군 묘역에서 큰 길로 내려와 걸으면 삼남로 모락산길의 또 하나의 꼭지점인 백운호수에 도착한다. 모락산을 넘어와 백운호수에 다다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더 이상 걷기를 포기하거나 거부한다. 이렇게 평화로운 마을을 그냥 지나칠 수 없고 이제 허벅지가 뻐근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글과 사진 이영근(여행작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389호(13.08.06일자)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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