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엔, 우리를 구해줄 '영웅'은 없다

입력 2013. 6. 23. 11:50 수정 2013. 7. 15.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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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김세윤의 재미핥기

세상에는 아주 드물게 '단발머리를 하고도 빛이 나는 50대 남자'가 있다는 걸 입증한 영화 <월드워Z>에서 주인공 제리(브래드 핏)가 좀비를 처음 만난 곳은 꽉 막힌 도로 위다. 앞쪽에 정차해 있던 차들의 문이 차례로 열리며 황급히 도망치는 사람들. 어찌된 영문인지 알고 싶어 전방을 살피는 찰나, 마침내 '그들'이 보인다. 차 지붕을 타고 넘으며 맹렬하게 돌진해오는 좀비와 맞닥뜨리는 것이다.

이제 카메라는 고층 건물 어디쯤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바뀐다. 빌딩숲 사이 길게 뻗은 도로마다 좀비 떼가 인간을 덮치는 아비규환의 도심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장면이다. 좀비 말고 괴수를 넣어보자. <고질라>(1998)다. 좀비 대신 해일이 덮쳐볼까? <딥 임팩트>(1998). 좀비 빼고 용암을 흘려보내면 <볼케이노>(1997), 얼음이 얼어붙으면 <투모로우>(2004), 땅이 갈라지면 <2012>(2011). <월드워Z>에서 '좀비 영화'의 겉옷을 벗기면 바로 '재난 영화'의 속살이 드러난다는 얘기다.

그동안 좀비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 자주 비유되었다. "점점 더 난폭해지는 '자본주의 세계화'"가 최근 창궐하는 좀비 영화의 자양분이고, "자기와 가까운 사람을 잡아먹는 살아있는 시체"는 곧 "신자유주의적 개인주의의 궁극적 단계"를 보여준다는 식의 해석.(<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2호, '좀비 영화의 정치학, 텅 빈 눈으로 응시한 팍스아메리카나')

하지만 창작자의 의도는 비평가의 해석보다 훨씬 심플했으니.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1968)을 시작으로 45년 좀비 영화 외길인생을 걸어오신 조지 로메로 감독께서 일찍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좀비는 현존하는 재난을 말하는 것으로, 좀비 스토리는 사람들이 (재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이송희일, <씨네21> 874호 '좀비 시대') 그러니까 '좀비가 어떻게 행동하느냐'보다 '인간이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더 중요한 이야기라는 말씀.

영화 <월드워Z>의 원작 소설 <세계 대전Z>를 읽고 조지 로메로와 같은 이야기를 하는 독자가 적지 않았다. "좀비 앞에서 허둥대는 미국 정부나 허리케인 카트리나 앞에서 쩔쩔매는 미국 정부나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식의 서평을 인터넷에 올렸다. 실제로 이 책에는 기자들 앞에서 "그럴싸해 보이는" 재난 대비 장면을 연출하지만 정작 시급한 구호대책을 세우는 데 실패하는 정부가 등장한다. "비를 멈추게 할 순 없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지붕을 만들어 놓고 비가 새지 말라고 빌거나, 아니면 최소한 우리에게 표를 던질 사람들은 비를 맞지 않게 해 주는 거지"라고 고백하는 백악관 참모도 나온다. 세상이 망해가는 와중에도 가짜 백신 팔아 한몫 챙긴 제약 회사 간부는, 단지 상품만 파는 게 아니라 "자신들의 상품이 없으면 살 수 없다는 두려움, 그 자체를 팔아먹고 있는" 거대 기업의 속성을 폭로한다.

원작에서 제법 비중있게 다룬 이런 '현실의 이야기'들은 아쉽게도 영화의 방주로 다 옮겨타지 못했다. 좀비가 은유하는 어떤 대재앙이 실제로 닥쳤을 때 '우리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지' 걱정하며 읽던 방대한 원작 <세계 대전Z>는 브래드 핏 오빠가 '우리를 어떻게 구해줄 수 있을지' 기대하며 보는 영화 <월드워Z>로 소박하게 각색되었다.

<세계 대전Z>의 저자 맥스 브룩스는 또다른 책 <좀비 서바이벌 가이드>에서 재난에 대비하는 15가지 행동지침을 제안한다. 그중 맨 위에 오른 4항목. 1. 집단을 조직하라. 2. 공부하라, 공부하라, 또 공부하라. 3. 사치품과 작별하라. 4.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온갖 위험과 재난의 징후를 미리 파악하는 데 힘쓰는 영화 속 각국 정보 요원과 달리 최고 정보 요원들이 각자의 원룸에 틀어박혀 '댓글 좀비'로 변해버린 이 나라에서, 우리가 온전히 '인간'으로 살아남을 방법일랑 '늘 깨어 있는 시민으로 검소하게 살면서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으며 집단을 조직하는 것'뿐이라니. 역시 이번에도 '그들이 어떻게 행동하느냐'보다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더 중요한 이야기라는 말씀.

김세윤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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