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가문이 탐낸 '수승대'.. 빨치산 목욕하던 '유안청폭포'

박경일기자 2013. 6. 12.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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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高水長의 땅' 경남 거창

# 퇴계도 못 본 경치, 거창의 수승대

거창에서 가장 첫손으로 꼽히는 명승은 예나 지금이나 단연 거북형상을 한 바위 수승대다. 수승대 일대의 아름다움은 유연한 자연스러움에 있다. 거창 땅을 가로지르는 위천의 물줄기가 수승대에 이르러 널찍한 화강암을 타고 넘으면서 넓은 반석을 펼쳐놓는다. 명승이라지만 수승대는 기기묘묘한 절경의 긴장감보다는 느슨하고 부드러운 쪽에 더 가깝다. 너럭바위를 타고 넘는 물소리마저 낮고 부드러운 곳. 그야말로 '모난 곳'이 하나 없는 풍경이다. 어지러운 세상사에서 한발 물러서 물 흐르듯 마음을 닦기에 여기만 한 곳이 또 있었을까.

수승대의 본래 이름은 수송대(愁送臺)였다. 여기는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의 접경지역이었다. 여기서 백제가 쇠락해가던 때 신라로 가는 사신을 근심으로 보냈다 해서 근심 수(愁)에 보낼 송(送)자를 썼다. 그러나 장인 회갑을 맞아 거창의 처가를 찾아온 퇴계 이황이 십리 밖에서 얘기만 듣고 '무슨 그런 우울한 이름을 쓰느냐'며 시를 지어 바꿔 부른 이름이 수승대(搜勝臺)였다. 퇴계는 수승대를 가보려 했으나 급작스러운 임금의 부름으로 기회를 놓쳤다고 전한다. 시 한 수로 이름은 바꿨으되, 퇴계는 아쉽게도 생전에 한 번도 이곳에 걸음하지 못한 셈이다. 거북바위의 수승대 풍경이 각별한 것은 거북과 빼닮아서가 아니라, 커다란 바위 사방에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새겨놓은 글귀 때문이다. 시구절도 있지만 바위에 새겨진 건 대개가 이름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거기 새겨진 이름의 태반이 임씨 아니면 신씨다.

이제 거창 땅의 두 선비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다. 요수(樂水) 신권과 갈천(葛川) 임훈. 인근마을의 처남매부지간이었던 두 선비는 자연 속에 은거하며 후학들을 키워냈다. 이 둘은 학문으로도 교분이 깊었던 모양인데, 정작 후손들은 수승대를 놓고는 서로 제 집안의 것이라며 양보하지 않았다. 수승대에는 퇴계의 시를 새겨두었는데 임씨 문중에서 그 옆에 갈천의 시를 새긴 것이 분란의 시작이었다. 이걸 보고 못마땅해한 신씨 집안에서는 바위에 '요수 선생이 수양한 곳'이란 글귀를 새겼고, 이에 질세라 임씨 집안에서는 '갈천 선생이 노닐던 장소'라는 글을 새겨넣었다.

그러자 신씨 집안은 아예 바위 아래에다 마치 묘갈비처럼 자손과 종족의 이름을 세세히 새겼고, 임씨 집안도 따라 새기게 됐다. 그러다 보니 바위는 온통 신씨와 임씨 후손의 이름으로 뒤덮이게 됐다. 급기야 두 집안에서는 거북바위를 놓고 수십 년에 걸친 소유권 소송을 벌였는데 양쪽 집안이 적잖은 재산을 탕진하게 됐다고 전한다. 소송의 판결은? 당연히 '누구의 소유도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 수승대는 요수의 것, 갈계숲은 갈천의 것

소송은 무승부로 끝났지만 지금 수승대의 주인은 단연 요수 신권이다. 수승대 앞에 새겨진 연반석(硯磐石)이란 글자는 그의 제자들이 먹을 갈던 바위란 뜻이고, 세필짐(洗筆)은 붓을 씻던 자리란 의미다. 물살이 깎아내 만든 동그란 바위 구멍은 막걸리 한 말을 넣어두고 스승에게서 합격판정을 받으면 한 사발씩 마셨다고 해서 장주갑(藏酒岬)이라 불린다.

수승대가 내려다보이는 물가에 바위를 초석삼아 올린 정자 요수정도 요수가 풍류를 즐기던 곳이었고, 물 건너 수승대 뒤쪽 구연서원도 제자를 가르쳤던 서당 자리에 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요수정에 올라 소나무 숲 사이로 수승대를 굽어보노라면 번잡스러운 세상에서 발을 빼고 흐르는 물처럼 덕과 학문으로 자신을 채우기에 힘썼던 옛 선비의 맑은 마음이 느껴진다.

구연서원에서는 정문 격인 관수루를 유심히 살펴보자. 관수(觀水). 즉 '물을 본다'는 뜻의 현판 이름은 중국 고전 '맹자'에서 따온 것. 웅덩이를 다 채운 뒤에야 흐르는 물처럼 학문을 닦는다는 뜻이겠다. 문루 앞쪽은 곧은 나무를 주춧기둥으로 썼지만, 뒤편은 휘어진 나무를 베어 그대로를 기둥으로 삼았다. 휜 나무를 곧게 다듬지 않고 자연스레 기둥으로 삼은 지은이의 내공이 거기서 학문을 닦던 유생들의 학식보다 못할 게 없다.

수승대가 요수의 것이라면, 인근의 갈계숲은 갈천의 것이다. 숲은 수령 200∼300년의 느릅나무와 소나무, 물오리나무, 느티나무로 이뤄져 있다. 갈계숲과 숲이 있는 마을, 갈계리라는 이름 모두 임훈의 호 '갈천'에서 비롯된 것이다. 갈계숲에는 갈천의 후손들이 비교적 근래에 세운 3개의 정자가 나란히 있다. 그다지 크지 않은 하나의 숲에 정자 셋을 두고 있는 곳은 여기 말고 본 기억이 없다. 신선이 놀고 싶을 만큼 아름답다는 가선정은 갈천의 덕을 추모하기 위해 지난 1934년 지은 정자다. 선비의 기상이 물씬 풍기는 도계정은 갈천의 아우인 도계 임영을 기리기 위해 지은 것. 여기서 눈 여겨볼 것이 가장 자그마한 정자인 병암정이다. 규모는 자그마하지만 단정한 자태에 금세 마음이 끌린다. 이 정자에서 꼭 보아야 할 것은 천장이다. 소박한 겉모습에 끌려 정자 안으로 들었다가 천장을 올려다보곤 깜짝 놀랐다. 나무를 길게 쪼개서 촘촘하게 방사형으로 천장을 덧댄 위에다 다양한 색감의 문양과 그림을 그려넣었는데 그 화려함에 절로 탄성이 터졌다.

갈계숲을 끼고 있는 갈계마을에는 또 갈천이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둘째 아우와 함께 건립한 갈천서당과 임훈이 살던 집인 거창 갈계리 임씨고가를 비롯해 갈천이 생전에 받은 효자정려와 사당 등의 유적이 즐비하다.

# 볕과 어둠을 가르며 쏟아지는 폭포

거창의 차고 맑은 물은 금원산의 깊은 산중에도 차고 넘친다. 금원산 휴양림에서 포장도로를 따라 오르다 보면 길은 유안청계곡과 지재미골로 갈린다. 두 계곡은 어디가 더 낫다 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 수려하다. 먼저 유안청계곡. 짙고 깊은 골짜기를 10분쯤 걸어오르면 유안청폭포를 만난다. 시경(詩經)에 등장하는 '유안(儒案)'은 유생을 달리 이르는 말. 유생들이 과거급제를 목표로 공부했던 공부방을 '유안청'이라 했다. 폭포 부근에 가섭사란 옛 절집이 있어 '가섭연폭'이라 했던 폭포이름은 절터에 유생들의 공부방이 들어서면서 유안청폭포로 바꿔 붙여졌다.

유안청폭포는 두 개다. 휴양림의 들머리에서 산길로 350m쯤 걸어들어가면 먼저 만나는 게 비스듬히 누운 와폭이다. 우람한 직폭은 그 너머의 숲 뒤로 저만치 물러서 있다. 대개 하류 쪽 와폭이 아닌 뒤쪽의 직폭을 유안청폭포라 부른다.

하늘을 가릴 듯한 숲 사이에서 폭포수가 부챗살처럼 물살을 퍼뜨리며 쏟아지는데 폭포 위쪽은 짙은 숲으로 가려져 턱밑까지 다가가야 겨우 폭포의 높이가 가늠이 된다. 어두운 숲 사이로 폭포는 떨어지고 그 폭포의 포말 위로 햇볕이 다시 떨어져서 물줄기가 마치 형광등을 켠 듯 순백으로 환하다. 폭포 앞에 서면 숲의 어둠과 물의 환함이 극적으로 대비된다. 이태가 쓴 '남부군'에는 기백산 북쪽 이름없는 골짜기에서 500여 명의 빨치산이 알몸으로 목욕을 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유안청폭포가 바로 거기다.

지재미골 쪽도 슬쩍 들어갔다 와보자. 등산로 입구에 차를 세우면 가섭사지 마애삼존불까지는 10분 남짓이면 가닿는다. 골짜기 입구에는 집채, 아니 건물만 한 바위가 놓여있다. 나라 안에서 단일바위로는 가장 크다는 문바위다. 문바위 뒤쪽 암벽 사이로 난 108개의 좁은 계단을 오르면 그 끝에 천연 바위굴이 있다. 그곳에 가섭사지 마애삼존불상이 또렷하게 양각돼 있다. 가운데 선 불상은 수더분한 인상인 반면 양쪽의 협시보살은 옷자락이 금시라도 펄럭일 것처럼 화려하다. 지재미골에도 옛 사람의 자취가 남아있다. 고려가 망한 뒤 달암 이원달이 사위와 함께 이 골짜기로 들어와 순절했다는데 자취도 남은 게 없고 누군가 문바위에 새긴 명문으로만 전해올 뿐이다.

# 도처에 계곡, 그리고 도처에 정자

거창에는 도처에 계곡이고, 또 도처에 정자다. 거창의 계곡 중에서 가장 빼어난 곳을 꼽으라면 단연 남덕유산에서 발원한 맑은 물이 흘러내리는 월성계곡이다. 월성계곡은 수승대 상류의 물길을 이룬다. 수승대에서 물길을 거슬러 월성계곡 쪽으로 방향을 잡고 37번 지방도로를 따라가면 곳곳에서 빼어난 정취의 정자를 만나게 된다.

수승대의 바로 위쪽에는 요수정에 버금가는 운치있는 정자 용암정이 있다. 일찌감치 관광지로 개발된 수승대 일대는 한여름이면 피서객들로 붐벼 번잡스러운 야외 수영장을 방불케 하는데, 이쪽 용암정 일대는 아직 고즈넉한 옛 풍광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용암정을 지나자마자 만나는 북상면사무소에서 굵은 물줄기를 길잡이삼아 좌회전하면 월성계곡의 초입인 강선대와 모암정을 만나게 된다. 병자호란 때 칼로 배를 찔러 자결하려 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동계(桐溪) 정온이 고향 땅으로 돌아와 은거해 고사리를 캐먹으며 여생을 보냈다는 모리재 초입이다. 여기서부터 계곡은 길을 따라 굽이친다.

그 길가에 흰 반석이 마치 눈이 내린 것 같다는 '분설담'이 있고, 거기서 황점 쪽으로 더 올라가면 월성계곡에서 가장 빼어난 풍경이 펼쳐지는 사선대가 있다. 집채만 한 바위 네 개가 시루떡처럼 쌓아올려진 형상의 사선대는 구한 말 의친왕이 머물며 의병의 근거지로 삼으려던 곳이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다.

월성계곡과는 좀 떨어져 있긴 하지만, 마리면 고학리의 용원정도 따로 시간을 내서 찾아가볼 만 하다. 자그마한 고학천 계곡을 끼고 있는 정자의 천장에는 들보에 얹어놓은 두 마리 용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 용원정에서는 눈여겨봐야 할 것이 정자로 건너가는 돌다리다. 지금은 몇뼘의 소로에 불과하지만 한때 이 다리는 서울로 통하는 큰 길로 길손들로 붐비던 곳이었다. 돌다리는 넓적한 판석 두 개를 중심다리 양쪽에 걸쳐 놓았는데, 250여 년 전 오씨 성을 가진 형제가 쌀 1000석을 들여 놓은 다리라 해서 '쌀다리'로 불린다. 이런 돌다리를 놓는 데 쌀 1000석이라니 필시 바가지를 쓴 게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비용은 고사하고 대체 이리 큰 판석을 어찌 옮겨 다리로 놓았을까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거창=글·사진 박경일 기자 parking@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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