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부독재 부수고 민주주의 꽃 피운 '6·10 민주항쟁'

박성환 입력 2013. 6. 10. 05:01 수정 2013. 6. 10.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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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박성환 기자 = 6·10 민주항쟁은 한국 현대사의 큰 분수령이다. 민중의 힘으로 군부독재 정권을 무너뜨리고 직선제 개헌을 쟁취한 역사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1987년 6·10 민주항쟁은 낡고 부패한 독재정권과 민중들이 싸워 이겼다는 점에서 정치적 관점에서 볼 때 혁명적인 거사에 비견될만하다. 특히 우리 현대사에서 4·19혁명과 5·18광주민주항쟁에 이은 민중 봉기의 완성으로 기록될 만큼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역사적 평가가 이미 이뤄졌다.

민주화를 요구하던 광주시민을 총과 칼로 무참히 짓밟고, 철권통치를 휘두르던 전두환 군부독재 정권으로부터 '6·29 항복 선언'을 받아냈던 6·10 민주항쟁이 올해로 26년이 됐다.

민중궐기로 군부독재를 무너뜨리고 민주화의 과정을 주도한 6·10 민주항쟁은 국민이 대통령을 직접 뽑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이뤄냈다는 점에서 '반독재 민주화 투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1979년 12·12사태(전두환·노태우 등이 이끌던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세력이 일으킨 군사반란사건)로 정권을 잡은 제5공화국 전두환 대통령은 1985년 간선제로 선출됐다. 직선제 이전에는 선거를 체육관에서 했기 때문에 당시 대통령을 '체육관 대통령'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전 대통령의 군부 정권은 정당성이 없는 비민주성이라는 약점을 갖고 있었다. 이는 야권과 재야세력의 직선제 개헌 공세 대상이 됐다.

1986년 개헌 서명운동에 1000만 명이 동참했다. 여야가 헌법 개정을 위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 대통령은 1987년 4월13일 개헌 논의를 중단시킨 이른바 '4·13 호헌(護憲) 조치'를 통해 군부독재정권 유지 뜻을 천명한다.

이는 곧 전국 단위의 대규모 군중집회의 불씨가 됐다. 정국은 요동치기 시작했고, 민주화에 대한 국민들의 욕구는 점점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 와중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했다. 서울대 학생 박종철씨는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현 경찰청) 대공분실에 끌려가 물고문을 당하던 중 1987년 1월14일 숨졌다.

당시 경찰은 "조사관이 주먹으로 책상을 '탁'치며 혐의사실을 추궁하자 '억'하며 쓰러졌다"고 발표하며 사건을 조직적으로 은폐·축소 발표했다.

하지만 이같은 사실이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에 의해 만천하에 드러났고, 이 소식을 접한 국민들의 시위가 전국 곳곳에서 일어났다.

5월27일 꾸려진 '민주헌법 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는 6월10일 전국 곳곳에서 대규모 시위를 개최했다. 박씨의 고문치사 사건 조작·은폐를 규탄하고 호헌 철폐를 요구하는 국민대회였다. 주요 도시 곳곳에서는 학생들과 시민들로 거리가 메워졌다.

주요 도로 곳곳의 교통이 마비됐지만 시민들은 시위대를 지지하며 손수건과 자동차 경적으로 호응했다.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주의를 외치며 투쟁의 상징인 '임을 위한 행진곡'이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이날만 22개 지역에서 24만여 명이 참가한 것으로 주최 측은 추산했다. 경찰에 연행된 시위대도 수천 명에 달했다. 구속된 이들은 국본 간부를 포함한 220여명이다. 하지만 대항쟁은 멈추지 않았다. 5일여 동안 명동성당에서 집회가 이어졌다.

6월15일 다시 전국적으로 되살아난 불씨는 26일 전국 30여개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된 민주헌법쟁취 국민평화대행진까지 계속됐다. 이때까지 시위에 참여한 인원은 500여만 명으로 추산된다.

특히 6월 항쟁의 꽃으로 불리는 젊은 직장인들로 구성된 '넥타이 부대'의 활약상은 지금껏 회자되고 있다. 이들은 독재정권의 최루탄에 숨 막히고 몽둥이찜질을 당할지언정 너나 할 것 없이 '호헌철폐'와 '독재타도'를 외치면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시위에 큰 물줄기를 만들었다.

결국 전 대통령은 이에 굴복해 민주정의당(민정당) 노태우 당시 대표가 대통령 직선제 개헌 등을 골자로 한 6·29민주화선언을 발표하게 한다. 독재시대를 청산하고, 민주주의 시대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하지만 그해 12월, 16년 만에 직선제로 치러진 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시 민정당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면서 미완의 역사로 마무리됐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관계자는 10일 "6·10 민주항쟁은 4·19 혁명과 5·18 광주항쟁과 더불어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의 상징이며 정당하지 못한 독재군부세력을 종식시키고 방점을 찍은 국민들의 승리"라며 "6·10 민주항쟁은 전국 단위의 민중궐기로 시민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 지를 분명하게 보여준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라고 평가했다.

이어 "이 땅에 다시는 후안무치하고 정당하지 못한 권력이 발붙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며 "6·10 민주항쟁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계승해 더욱 성숙한 민주주의로 한 단계 도약할 때"라고 부연했다.

sky0322@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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