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 이길 수 있는 전쟁] (15) 62세 치매 아내 10년째 웃음으로 돌보는 박종팔씨

특별취재팀 2013. 6. 10. 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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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한다, 봄꽃처럼 예쁘다".. 칭찬은 치매 아내 病勢도 멈추게 했다

"이리 와봐. 여기 봄꽃이 자네 닮아서 참 예뻐…"

이른 아침부터 내리는 봄비가 반가워 집 앞 들판으로 나온 남편 박종팔(69)씨가 아내의 손을 잡아끌었다. 부끄러운 얼굴로 말 없이 남편을 따라나서는 아내 이봉순(62)씨 얼굴에도 웃음이 번졌다.

이들은 충남 홍성군 서부면에서 유명한 '원앙 부부'다. 밥을 먹을 때도, 산책할 때도, 경로당에 갈 때도 두 사람은 손을 꼭 잡고 떨어지지 않는다. 그렇게 지낸 지가 올해로 10년째다. 박씨는 "아내가 아프기 전까지 30년 넘게 나도 무심하고 무뚝뚝한 남편이었다"고 했다.

박씨 아내 이봉순씨는 알츠하이머 환자다. 2003년 초 남편, 자식들과 함께 찾은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치매 진단을 받았다. 이미 초기를 넘어 중기로 접어든 상태였다. 박씨는 "당시 바닷가에서 작은 횟집을 했는데, 언제부턴지 아내가 계산을 못 하고 손님들에게 돈을 주거나, 돈을 제대로 받았는데도 모자란다고 하는 경우가 늘었다"며 "심한 건망증인 줄로 알고 찾아간 병원에서 치매 진단을 받고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고 했다.

치매 진단을 받은 아내의 나이는 불과 52세였다. 1남 4녀를 모두 결혼시키고 "이제 돈 걱정, 자식 걱정 없이 둘이서 행복하게 살자"고 약속한 지 1년도 안 돼 찾아온 비극에 부부는 절망했다. 박씨는 횟집을 접고 매일 술에 빠져 살았다. 잔뜩 술에 취한 채 바닷가로 나가 허공을 향해 고함치는 날도 많아졌다. 그런 남편을 보며 아내 이씨도 더욱 힘들어했다.

그런 박씨가 마음을 고쳐먹은 것은 어느 날 방 한구석에서 소리 죽인 채 남편 몰래 눈물 흘리던 아내를 보고부터다. 박씨는 "말투는 어눌해지고 기억은 점점 잃어가는데 이 사람 마음이 얼마나 아플까 싶었다"며 "그때까지 나만 힘들고 불쌍하다 생각했던 내 이기심을 반성하고 아내에게 눈물로 사죄했다"고 했다.

남편 박씨는 이후 지극정성으로 아내 간병에 나섰다. 매달 한두 번씩 새벽 첫차를 타고 경기도 분당 서울대병원으로 데려가 검진을 받게 했고, 집에서는 아침에 눈뜨고부터 밤에 잠들 때까지 한시도 아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자식들이 다 나가고 시골집에 둘이 살다 보니 무엇보다 외롭지 않게 해주고 싶었다"고 했다. 집 근처 텃밭에서 일할 때도 항상 아내와 함께였다. 박씨가 "빨간 고추 따봐요", "녹색 고추 따봐요" 하면 아내 이씨가 그 말을 듣고 고추를 땄다. "콩 따봐요", "팥 따봐요" 하면 그 말에 따라 콩과 팥을 땄다. 치매 환자인 아내의 몸을 움직이게 하면서 인지 기능 훈련을 시키기에 제격이었다.

아내는 가끔 "빨간색?"이라고 되묻고서 녹색 고추를 따거나, 콩과 팥을 딴 후에 섞어버리기도 했다. 하지만 박씨는 화를 내지 않았다.

"처음엔 잘못한 학생 혼내듯 했는데, 하루는 아내가 '당신 말을 이해했으면 내가 왜 그렇게 했겠느냐. 모르니까 다른 걸 따지'라고 하면서 서럽게 울더라고… 마음이 철렁했지. 그다음부턴 칭찬만 했어."

박씨는 아내를 보살피면서 터득한 '치매 환자와 함께 잘 사는 법'의 핵심이 바로 '칭찬'이라고 했다. 박씨는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를수록 나는 지치고 아내는 위축됐다"며 "'잘한다', '예쁘다' 같은 칭찬을 많이 해주면서 서로 마음이 편안해지고 웃는 일도 많아졌다"고 했다. 남편이 잘한다고 칭찬해주면 아내 이씨는 활짝 웃으며 "재미있다. 또 밭에 나오자"고 말하기도 했다.

병원 치료를 게을리하지 않은 데다 남편이 정성을 다해 간호한 덕분에 아내 이씨의 증상은 처음 치매 진단을 받은 2003년과 비교해도 크게 나빠지지 않았다. 지금도 아주 기본적인 의사소통을 하거나 산책하는 데는 별 지장이 없다. 이씨의 치료를 맡은 분당 서울대병원 측도 "이씨가 치매 진단을 받은 지 10년이 지난 지금도 이 정도로 일상생활을 유지하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고 했다. 최근에는 시아버지 제사를 앞두고 이씨가 남편에게 "아버님 제사 때가 다 되지 않았나?" 묻기도 했다.

박씨는 "지난 10년을 잘 견뎌준 아내가 마냥 고맙고 이대로만 유지해주면 좋겠다"며 "못난 남편한테 시집와서 40년 넘게 고생한 아내를 위해 남은 생을 바치겠다"고 했다. 그리고 끝으로 치매 환자를 가족으로 둔 이들에 대한 조언도 잊지 않았다.

"최대한 오랜 시간 함께 있으면서 치매 환자를 웃는 얼굴로 대하세요. 절대 쉬운 일은 아니지만, 사랑이 있다면 치매도 안고 살 수 있습니다."

충남 홍성군 서부면 남당리 박종팔·이봉순씨 부부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씨는 10년 전 52세 나이에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았다. 부부는 절망했지만 이씨의 의지와 남편의 지극한 보살핌 덕에 치매를 극복해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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