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가지 키워드'로 걷는 역사도시 서울 동·서·남·북

2013. 6. 5. 07:03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서울의 재발견] 4場 4色의 서울 마을 여행

[CBS 이진성 프로듀서]

'천년 고도'라고 하면 어디가 떠오르는가? 보통은 경주를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서울(사대문안 도심, 서울한양도성)도 1000년간 수도의 역할을 감당해 온 '천년 고도'다.

고려 역사 약 500년(913~1392) 중 400년 동안 고려 제2의 수도가 서울, 지금의 경복궁 서편에서 창덕궁 부근까지의 도심 지역이었다. 고려는 이곳을 고려 수도 개경 남쪽의 남경이라고 해서 제2의 수도로 삼았다. 이후 남경 천도가 시도됐지만 정작 남경 천도에 성공한 것은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였다.

태조 이성계가 남경에 조선의 수도를 마련한 이후, 조선 500여년(1392년~1910년)의 수도가 서울 사대문안 도심(서울한양도성)이다. 그리고 그 후 일제강점기에는 경성이라는 이름으로, 해방 후에는 서울이라는 이름으로 이 나라의 수도로 이어져 온 것이 100년이다.

백제의 700년 역사 중 500년 동안(BC 18년 ~ AD 475년)의 수도가 지금 서울 송파구 한강변(몽촌토성, 풍납토성)이었으니, 백제의 수도로부터 거슬러 올라가면 2000년 고도, 그리고 서울 사대문 안 도성 지역으로만 보면 고려 제2의 수도 남경으로부터 조선의 수도 그리고 지금의 수도에 이르는 1000년 고도가 바로 서울이다. 전 세계 수도 중 서울만큼 오랜 기간 수도로서의 역사를 가진 도시를 찾기 어렵다.

천년 고도의 역사도시 서울 사대문안 도심이 '무자비한' 개발로 파헤쳐졌지만, 역사의 나이테를 부수는 것은 불가능한 일. 서울 사대문 안에는 역사의 숨결과 흔적이 길과 골목, 동네마다 녹아 있다. 하지만, 이 역사도시 서울을 도대체 어떻게 여행하면 좋단 말인가. 워낙 크고 막연한데다, 딱히 떠오르는 곳도 궁궐과 한옥마을 혹은 서울성곽뿐인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러나 동네와 장소마다 세월의 힘과 흔적을 지니고 있는 서울 여행을 그렇게 진부하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금부터 천년 고도 역사도시 서울을 더 폭넓고 색다르게 여행해보자. 여기서의 여행은, 몇몇 궁궐이나 유적지를 '점'으로 찾아가거나, 서울성곽을 '선'으로 걷는 여행이 아니라, 동네와 마을을 중심으로 한 '면'으로 만나는 입체 여행이다. 이 여행을 위해서 먼저 알아야 할 기초 지식을 여러분에게 소개한다. 역사도시 서울 사대문안 도심을 네 지역으로 나눠서 4가지 지역의 역사적 특징이 어떻게 지금까지 연결되는지 알아보고, 이 큰 그림을 바탕으로 세부적인 답사 계획을 세워가보는 것이다.

실제로 18세기 후반 이가환의 < 옥계청유첩서 > 를 보면, 한양도성을 도성의 북쪽 북악산 밑의 '북촌', 남쪽 남산 밑의 '남촌', 동쪽 '낙산' 밑의 동촌, 서쪽의 '서촌' 그리고 청계천 장교와 수표교 일대를 '중촌'으로 나눠서 분류했다. 우리도 이 분류를 따라, 북촌과 서촌, 남촌과 동촌, 이렇게 동·서·남·북 4개 지역의 특징을 각각 잡아서 '4가지 키워드'로 역사와 오늘을 연결시켜 만나보려고 한다.

자, 역사도시 서울 여행을 위한 4개의 지역 즉 4가지 키워드를 지금부터 살펴보자.

◈ 북촌 : 권력과 통치

먼저, 북악산 밑의 북촌.

북촌은, 북악산을 등지고 청계천을 바라보는 남향의 양지바른 배산임수 명당지로, 최고 기득권층인 고관대작들의 거주지였다. 그리고 고려시대의 행궁, 조선시대 경복궁,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그리고 지금의 청와대에 이르기까지 최고 권력 기관이 자리한 곳이다. 이 지역을 면면히 흘러오는 1000년 역사의 장소성이 면면히 흘러오고 있는 것이다.

이곳이 권력과 통치라는 성격을 지닌 만큼, 일단 북촌에서는 마을로 진입하기 전에, 북촌의 양쪽 경계를 이루는 핵심 정치 공간, 경복궁과 창덕궁을 함께 비교하면서 만나보길 추천한다. 조선의 법궁으로 조선 전기 200년의 무대였던 경복궁, 조선의 이궁으로 임진왜란 후 300년 동안 사실상 조선의 정궁으로 기능했던 창덕궁은 따로 방문할 곳이 아니라, 한번에 함께 만나봐야 할 궁궐이다.

경복궁과 육조대로에는 유교의 이념에 따라 한양 공간을 구성한 뒤 인위적으로 궁궐 터를 다듬어 전각을 배치한 정도전의 이상적인 디자인이 구현돼 있을 뿐 아니라, 왕권보다 신권을 강화하려는 그의 정치철학도 강하게 표현돼 있다. 반면 창덕궁은 경복궁과 같은 인위적이고 질서정연한 배치나 공간이 주는 정치적 메시지에서 비껴선 채, 산세와 지형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맞춘 조선의 전통적인 건축미를 잘 보여주고 있다. 창덕궁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돼 있는, 그리고 원래 창덕궁과 공간적으로도 연결돼 있던, 조선시대 핵심 종교시설 종묘도 지나칠 수 없는 곳이다.

이제 마을로 들어가보자. 경복궁과 육조대로 그리고 창덕궁이 조선 500년의 핵심 권력의 공적 공간이었다면, 경복궁과 창덕궁을 사이에 둔 북촌 마을은 권력을 작동시키는 고관대작들의 사적 거주지였다. 북촌 마을 산책 코스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이곳의 한옥과 골목은 조선시대부터 내려오는 그 모습이 아닌, 개량된 한옥과 쪼개진 필지, 변형된 골목으로 과거의 모습을 많이 잃었지만, 시간 여행의 느낌을 가져보기에는 좋은 곳이다. 정취를 느끼면서 걷되, 다른 한편 공간의 상업화가 빨라지면서 마을 고유의 특성과 운치, 마을의 다양한 사람살이를 만나기 어려워져가는 북촌의 고민을 함께 품어보기를 권한다.

북촌의 골목의 생태계가 그래도 잘 남아있는 곳을 추천한다면 '계동길'을 추천하고 싶다. 중앙고등학교 정문에서 현대 계동사옥 방향으로 걸어내려가는 작은 거리에는 공방과 사진관, 문방구와 목욕탕, 교회와 사찰, 분식집과 레스토랑, 쌀집과 피자집, 전통찻집과 카페가 사이좋게 자리잡고 있다. 12,000 원이면 소고기 스테이크를 맛나게 먹는 맛집도 골목 중간에 숨어있다. 이 작은 거리에서 양쪽 옆으로 한옥 골목들이 뻗어올라간다. 어느 곳을 걸어도 좋은 시간여행 산책로다.

◈ 서촌 : 예술과 문화 그리고 근대화

다음으로, 인왕산이 품고 있는 서촌.

이곳은 경복궁과 청계천의 서쪽 지역으로, 예술적 풍류를 즐기던 양반들과 역관, 의원, 서리 등 중인들의 거주지였다.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안견의 몽유도원도, 추사 김정희와 중인들의 위항문학의 배경이 된 곳이 바로 이 곳이다.

이러한 흐름은 계속 이어져, 근대 문학과 문화의 선구자와 같은 역할을 했던 인물들(윤동주, 노천명, 이상, 박노수, 이상범 화백, 우리나라 최초의 야외패션쇼를 열었던 이여성 등)도 바로 이곳 서촌에 머물며 예술 활동을 펼쳤다, 그리고 지금도 많은 예술인들이 자리 잡아서 예술 활동과 대안문화운동을 해나가는 곳이자 갤러리의 집결지가 지금의 서촌이다.

그리고 원래 도성 내부를 동서남북으로 나누는 기준은 청계천이었던 점을 감안할 때, 조선시대의 서촌이라 함은 정동까지도 포괄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서촌은 19세기 후반 정동을 중심으로 서양세력의 거점이 됐고, 그 서양세력을 외교적 권력 기반으로 삼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자주적 근대화를 추구했던 경운궁(덕수궁)이 자리한 곳이기도 하다,

서촌에는 조선시대부터 이어져온 500년된 길과 골목들이 지금도 곳곳에 남아있다. 이 서촌 마을 골목 곳곳을 거닐면서 우리나라를 대표해온 예술인들이 살고 활동했던 역사의 현장들을 만나보시길 권한다. 그리고 서촌에 포진한 수많은 무료 입장 갤러리들도 꼭 즐겨보시길. 마을의 골목뿐 아니라, 조선시대 한양도성 내 명승지였던 인왕산의 청풍계와 수성동계곡을 잇는 나무데크 산책길도 서촌의 자연풍광을 즐길 수 있는 필수 코스다. 아울러 서양 세력의 거점이자 근대화의 산실이었던 정동 산책도 빼놓을 수 없다.

산책 중 허기가 진다면 통인시장의 도시락 카페를 찾으면 재밌고 맛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종로 피맛길과 같은 모습을 간직한 경복궁역 뒤편 금천교시장도 지난 시절의 추억을 느끼며 헐한 가격에 배불릴 수 있는 곳이다.

서촌은 북촌에 비해 좀 더 호젓하고 여유 있는 마을 분위기가 매력이라 북촌 산책을 이곳에서 대신하려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 발맞춰서 지금 서촌에도 북촌의 카페 물결이 넘어오고 있는지라 서촌에 둥지를 튼 많은 이들은 서촌의 마을과 골목 생태계를 지키려는 시도에 나서는 중이다.

◈ 동촌 : 서민과 민중 그리고 저항

다음은, 낙산 밑 동촌.

이곳은 기본적으로 서울에서 지대가 낮은 곳으로서, 청계천 범람 습지였다. 주거 여건으로 좋지가 않았기 때문에 양반 중에서도 조선시대 문인이 아닌 무인, 그것도 하급 무관들과 병사들의 거주지였다.

지대가 낮아 낙산의 높이도 낮았기에 산 주변으로 서민 주거지도 쉽게 형성됐고, 청계천 준설로 나온 흙이 만든 가산에는 가난한 백성들이 자리했다. 동대문 주변의 사상난전 그리고 그 후 동대문시장으로 이어지는 이곳에 서민들이 터를 잡았다. 서울 사대문안에서 유일하게 산동네의 모습이 남아있는 곳도 바로 이곳 낙산 자락으로, 밀어내기식 아파트 재개발이 아닌 동네의 특성을 살리는 도성 마을 재생, 골목 곳곳의 공공 미술 프로젝트 등으로 이 지역이 지금 관심을 모으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동대문 하면 떠오르는 시장들은 역사의 흐름을 간직하고 있다. 군인 및 하급병사들에게 군포와 가산을 파는 상업 활동이 허용되면서 만들어진 것이 동촌 배오개 일대(예지동, 인의동, 종로 5,6가)에 배오개시장이라는 사상난전이었다. 군포 등 포목 옷감 등을 중심으로 생겨났던 당시 이 일대의 시장이 바로 지금, 아시아 최대 의류시장인 동대문시장의 시초가 됐다.

포목, 직물, 의류 원단은 지금도 동대문시장의 시초인 광장시장의 핵심 품목이자 동대문시장 전체를 지배하는 품목이다. 그리고 이곳에 있던 사상난전의 흐름은 이 지역의 서민 민중적인 성격과 맞물리면서 다양한 길거리 시장들을 낳았는데, 이것이 해방 후 동대문 주변의 다양한 재래시장과 청계천변 서민들의 벼룩시장으로 이어진 것이다.

동촌의 이러한 서민적인 성격은 이 지역을 좀 더 민중적이고 저항적인 특색을 만들었다. 근대 이후에 차별받던 구식군대와 강제 해산된 대한제국 군인들을 중심으로 일제에 대한 저항이 거셌던 곳, 해방 이후 전태일 열사로 상징되는 노동운동의 성지가 바로 이곳이다.

뿐만 아니라 이 지역이 지식인들의 거점이었던 점도 이 지역의 저항적 성격에 큰 영향을 끼쳤다. 조선시대 성균관 유생들이 왕의 정책을 두고 권당(단식투쟁)과 동맹휴학을 벌이던 곳도, 서울대학교 문리대가 자리해서 70년대초까지 학생운동의 근거지가 됐던 곳도 낙산 밑 동촌이다. 가난한 연극인들이 열정 하나로 비주류 문화 운동을 펼치면서 사회를 풍자하던 곳도 낙산 밑 대학로다.

이렇듯 서울의 어느 곳보다 인간적이고 서민적인 사람살이의 채취를 강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 동촌이고, 그런 성격을 대표하는 곳이 동대문시장 그리고 동대문 주변 전통시장들과 벼룩 풍물시장들이다.

지금 아시아 최대 의류시장으로 발전한 동대문시장은 규모가 방대하다. 그 시초로서의 광장시장과 평화, 청평화, 동평화시장 등의 전통도매상권, 그리고 Apm과 디오트 같은 신흥도매상권, 두타와 밀리오레 등의 신흥소매상권 전체를 아우르고 낙산의 창신동을 배후기지로 삼는 아시아최대 의류산업단지를 일컫는 말이 바로 동대문시장이다. 3만여 점포가 밀집해 하루 20~30만명의 손님을 맞는다.

동대문시장을 제대로 체험하기 위해서는 도매시장이 문을 여는 밤 시간에 신흥 도매시장들을 둘러보는 것이 좋다. 일반 소매시장과 달리 낱장 판매, 카드 결제, 옷 미리 입어보기 등이 안 된다는 것에 주의해서 친구나 가족이 함께 쇼핑을 하면 동대문 알뜰 쇼핑의 진면목을 맛볼 수 있다.

동대문 주변의 전통시장들도 함께 걸어보자. 우리나라 최초의 상설시장이자 지금 동대문시장의 공식 출발점인 '광장시장', 예쁜 용기와 소품, 초콜릿과 홈베이커리의 천국, '방산시장', 전국 최대의 전통 건어물 전문시장, '중부시장'이 종로 5가에서 을지로 5가까지 연결돼 있다. 추억의 도깨비 만물시장 '동묘 벼룩시장과 서울 풍물시장'도 동대문 뒤편으로 이어져 있다.

◈ 남촌 : 식민과 민족 그리고 독재와 인권

마지막으로 남산 아래의 남촌.

남촌은 남산을 끼고 있어 좋은 자연환경을 지닌 거주지이긴 했으나, 남산 진고개라는 말이 보여주듯 북향으로서 음지이고 땅도 질어, 양반 중에서도 가난한 선비와 몰락한 양반들의 거주지였다.

과거 시험에서 지금의 고시 1차에 해당하던 것이 과거 초시라 일컬어지던 진사시와 생원시. 1차 시험인 생원시와 진사시에만 붙고 최종 합격이 안 돼서 양반은 양반인데 관직을 못 얻어 책만 붙잡고 사는 가난한 양반 선비들의 거주지. 생원시까지만 합격한 양반을 생원님이라 불렀는데, 이 말이 줄어서 샌님이 됐고 짚신을 살 돈이 없어서 음지의 질퍽한 땅을 걷기 위한 나막신을 맑은 날에도 신고 다녀 딸각딸각 신발소리를 내고 다닌다 해서 남산골 딸각발이 샌님이라는 말이 나왔다.

꼬장꼬장하긴 하지만 지조를 중시하면서 북촌의 기득권층을 원칙을 내세워 견제하던 이들, 그들이 바로 남산 기슭 남촌의 딸각발이 샌님들이었다.

그러나 남산은 소설사 서해성이 표현한 것처럼 "한반도의 운명을 예지적으로 앓았던 곳, 세상보다 먼저 운 곳"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들의 주둔지인 왜성대가 남산에 있었고, 100여년전 일제 식민 통치 기관의 거점이자 일본인들의 핵심 거주지였다. 조선이 병탄되기 전에 먼저 빼앗긴 곳이 남산이었다. 그리고 군사정권 시절에는 인권 탄압이 자행되던 중앙정보부와 안기부의 터로 이어진 지역이 또한 남산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이 서울의 공간 개조를 시도하면서 자신들의 거점인 남촌을 중심으로 개발을 시작하는데, 본정으로 불리던 충무로, 명치정으로 불리던 명동이 모두 그때 만들어진 번화가. 자본주의의 상징인 백화점과 은행도 지금 남대문로에 일본이 만들었으니 당시 미츠코시 백화점과 조선은행 건물이 지금의 신세계백화점과 구 한국은행 건물이다. 남산을 산책하면서 남산 밑의 번화가들을 함께 걸으면서 이런 맥락들을 느껴보자.

식민 통치 권력의 거점으로 민족의 아픔을 몸소 겪었던 남산은 해방 후에 그 터를 다시 고스란히 군사독재정권의 정권 안보를 위한 인권 탄압의 기관인 중앙정보부와 안기부에 넘겨줬다. 당시 조작간첩 사건을 수사하던 안기부 제5별관은 서울시청 별관으로 바뀌었고, 지금의 서울유스호스텔은 중정과 안기부 본관으로 지하에서 혹독한 고문이 이뤄졌던 곳이다. 지금 교통방송, 서울종합방재센터 등도 모두 당시 안기부 건물이다. 일제 강점기 식민 통치 기관들의 거점이었던 이곳에 이런 기관들이 자리 잡은 것은, 일제 기관들의 부지로서 국유지로 개발됐던 터라 그 자리에 손쉽게 독재 권력이 음지의 권력 기관들을 배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서 식민통치와 독재탄압의 터가 됐던 남산의 아픈 기억의 흔적을 지우지 말고 복구하고 복원하고 남겨서 '인권과 평화의 숲'으로 조성하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고, '아시아인권평화센터' 또는 '평화공원'으로 만들자는 움직임도 계속되고 있다. 고난과 오욕을 품어 이겨내고 인권과 평화를 싹틔운 곳으로 기념하자는 것이다.

남산이 품은 현대사의 질곡은 남산의 훨씬 깊은 곳에까지 가닿아 있으니, 그것이 바로 남산 2호 터널이다. 남산 2호 터널은 1968년 1.21 사태 이후 남산 요새화 정책이 시행되면서 유사시 서울 시민들이 대피할 수 있는 방공호로 설치된 것이다. 지금은 서울의 교통망이 됐지만, 그 시초는 안보 문제였다.

화려한 남산의 야경과 아름다운 산책로를 즐기는 것과 동시에, 우리 역사의 질곡과 교훈을 품고 있는 남산의 북측 순환로와 소파길 주변도 사색하며 산책해보길 추천한다.

지금까지 역사도시 서울 사대문안 도심 여행을 4개 지역, 4가지 키워드로 먼저 개괄해서 소개했다. 역사도시 서울을 "점"이나 "선"이 아닌 동네와 마을, 지역이라는 "면"으로 만나는 여행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제 좀 더 구체적인 이야기들이 소개될 것이다. 천년 고도 역사도시 서울 여행, 오늘을 시작으로 함께 각자 코스를 짜고 이야기를 준비해 어디든 먼저 한번 떠나보길 추천한다.

서울에 대한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픈 분들은 twitter.com/js8530 으로^^

前인권위원장, 왜 쿠데타 주역에게 연민 느꼈나?

타이완 배우의 아내, 남편 외도에 투신 자살…

후덕해진 고현정, "살 빼겠다" 공개 다이어트 선언

안철수 "대중정치 하라는 말 뇌리에 남아"

원장 친딸은 유학…6살 보호 아동은 방치死

(대한민국 중심언론 CBS 뉴스FM98.1 / 음악FM93.9 / TV CH 412)< 저작권자 ⓒ CBS 노컷뉴스( www.nocutnews.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노컷뉴스 모바일웹]

[스마트한 영상뉴스 '노컷V']

[뉴스 속 속사정, 'Why뉴스']

Copyright © 노컷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