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에서의 하룻밤, 화들짝 불빛이 숨죽였다

2013. 5. 29.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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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궁궐숙박체험 온 아이들

청사초롱 들고 재잘재잘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힌

슬픈 이야기 들리는 듯…

25일 경북 울진의 온정초등학교 3~5학년 19명이 서울에 왔다. 아이들은 창경궁에서 궁중예절교육, 차문화 예절체험 및 다식 만들기, 전통 탈만들기를 한 다음 통명전에서 하룻밤을 자게 되어 있다. 문화재청과 사단법인 우리문화유산알림이에서 주관하고 한화가 지원해 마련한 궁궐 체험행사다. 내전으로 지어진 통명전이 "규모가 아담하고 전기시설이 돼 있어 체험행사장으로 제격"이라고 문화재청은 설명했다.

아침 6시 버스를 타고 올라온 어린이들은 오후 1시 반부터 창경궁을 구경하고, 다양한 전통 문화 교육을 받았다. "시골 어린이들이 서울여행을 하면 보통 경복궁, 청와대, 국회의사당을 구경합니다. 그런데 궁궐에서 하룻밤을 잔다니 아이들이 기대에 부풀어 있어요. 특별한 체험이죠." 저녁식사 자리에서 만난 인솔 교사들이 어린이들보다 더 들떠 보였다. 사실은 기자가 더 그랬다. 서울살이 수십 년에 창경궁은 처음, 그것도 숙박 체험 동행 취재이기에 기대감은 실로 컸다.

저녁 8시. 어린이들이 창경궁 홍화문 안쪽에 모였다. 재재거리던 아이들에게 청사초롱이 하나씩 주어졌고, 아이들은 비로소 궁궐에 밤이 왔음을 알았다.

창경궁은 성종이 세조비인 정희왕후, 덕종비 소혜왕후(인수대비, 성종의 친모), 예종비 안순왕후(인혜대비) 등 왕실 여성 어른들을 위해 1484년에 지은 궁이다. 서쪽으로 창덕궁에 닿아있고 남쪽으로 종묘와 이어진다. 남·서·북쪽 구릉을 등지고 동향으로 정전인 명정전과 편전인 문정전이 들어서고 춘궁, 서연청, 승정원, 빈청과 궁궐 경비담당 수문장청과 내금위 등이 함께 궁 안에 자리잡았다.

창경궁은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했다. 임진왜란, 인조반정, 순조 때 큰 화재를 겪었고, 순종 때인 1909년 동물원과 식물원이 들어서면서 대부분의 건물이 철거됐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 가운데 홍화문, 명정문, 명정전이 광해군 때 지은 것이고 나머지 숭문당, 함인정, 경춘전, 환경전, 통명전, 양화당, 집복헌과 영춘헌은 순조 때인 1830~34년에 지었다. 문정전과 빈양문은 1986년에 복원됐다.

옥천교를 건너자 명정문의 빛바랜 단청이 어둠에 묻혀 더욱 낡아보였다. 문턱을 넘어 왕의 길을 들면 명정전 뜰의 박석에 도시의 불빛이 산란한다. 창경궁로와 율곡로의 소음이 한꺼번에 쌓이고 불빛을 인 남산타워가 액자 속 그림처럼 보인다. 일본인들이 신하들의 조회를 받던 품계석과 박석을 걷어내고 뜰안 가득 모란을 심어 유흥공간으로 만들었던 것을 아이들은 알까. 아이들은 일제강점기에서 어둠을 밝혀 순조, 영정조를 거슬러 광해군까지 이르렀다. 명정전 추녀 밑을 돌아 문정전, 숭문당 옆을 스쳤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라는 영조의 고함이 문정전에서 들리는 듯하다.

함인정에 오르면 비로소 급히 수습한 정전만이 담을 두르고 있을 뿐 내전의 모든 건물이 알몸으로 서있음을 알게 된다. 성종의 생모 소혜왕후, 숙종비 인현왕후, 정조의 생모 혜경궁 홍씨 등이 머물고, 사도세자가 정조를 낳기 전날 밤 용이 들어오는 꿈을 꿨다는 경춘전, 왕후의 빈전이자 청에 인질로 잡혀갔던 소현세자가 숨을 거둔 환경전. 도시의 불빛이 비껴들면서 기단 화강암의 요철이 도드라지고, 낮에는 들리지 않던 비빈과 상궁과 내시들의 속삭임이 떠돈다.

사각거리는 마사토 길을 따라 오늘밤 머무를 통명전에 이르렀다. 대 위의 드므(방화수를 담는 넓은 독)가 긴 그림자를 거느리고 금칠한 통명전 편액에 밤하늘 빛이 서렸다. 궁내 서열에 따라 크기를 달리한 양화당과 집복헌 너머로 서울대병원 불빛이 보인다. 정조가 혜경궁 홍씨를 위해 지은 자경전 터에 이르자 붉은 달이 떴다.

밤 9시20분. 아이들은 줄줄이 100m 정도 떨어진 화장실을 다녀왔다. 아이들은 왕과 왕비의 침소와 공중화장실 사이의 거리 차이가 이해되지 않는 눈치다. 임금님은 화장실을 썼을까, 이는 어떻게 닦았을까. 하루종일 궁궐을 돌았지만 떠오르지 않았던 의문이 떠오른 것. 대청을 중심으로 동쪽에 남자 아이들이, 서쪽에 여자 아이들이 잠자리를 폈다.

10시경 소등. 자리에 눕자마자 머리맡에서 굴착기로 땅을 파는 듯한 소음이 들린다. "게 아무도 없느냐, 저 소리를 끄도록 하여라"고 왕처럼 고함을 지르고 싶은 심정이다. 소리는 새벽 5시에야 그쳤다. 궁 바로 옆 서울대병원에서 외부전기를 끊고 전기개폐기 교체 공사를 하면서 디젤 발전기를 돌리는 소리였다.

청명한 새소리와 방안 가득한 햇살에 눈을 뜨리라던 기대는 꿈이었다. '내 복에 무슨….' 다행히 다음날 아침 아이들은 잘 잤다고 했다. "궁궐에서 금이불을 덮고 자니 왕비가 된 것 같았어요."

궁궐숙박 체험은 다문화가정, 새터민, 도서산간지역 어린이 등 문화소외계층을 대상으로 봄가을 8~10차례 실시된다. 문의 문화재청 문화재활용과 042-481-4746.

글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사진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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