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인다"는 남편과 '협의'하라니..아내는 이혼소송중 살해됐다

2013. 5. 22.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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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고양 사건으로 본 이혼소송 허점

"10여년간 맞고 목졸리고 살아"법원에 진술서·진단서 냈지만"부부상담" 날벼락 처분서둘러 협의 끝내고 싶었던 아내사건 당일 남편 만나러갔다 숨져

어린이날을 앞둔 4일 새벽, 경기도 고양시의 한 아파트에서 30대 여성이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은 이혼 소송 중이던 아내 윤정임(가명·36)씨에게 수면제를 먹여 잠들게 한 뒤 목을 졸라 숨지게 한 혐의(살인)로 남편 ㅅ씨(61)를 구속했다. ㅅ씨도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기도했지만 살아났다.

사건은 '잦은 부부싸움이 부른 우발적 살인' 정도로 가볍게 여겨졌지만 <한겨레> 취재 결과는 달랐다. 숨진 윤씨는 남편으로부터 지속적인 폭력에 시달려온 것으로 드러났다.

"나 같으면 열번도 더 죽었을 것 같아요." 윤씨의 언니(40)는 22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동생이 그렇게 고문에 가까운 폭력을 당하고도 한번도 티를 내지 않았다"며 울었다. 윤씨가 이혼소송을 위해 남긴 일기 형태의 진술서에는 그간의 고통이 낱낱이 기록돼 있었다.

남편은 "죽여버린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교회에서 만난 목사인 남편과 24살에 결혼한 윤씨는 10여년 동안 "줄곧 폭력에 시달렸다"고 진술서에 썼다. 셀 수 없이 목이 졸렸고 밧줄에 묶여 몸에 검붉은 피멍이 들었다. "남편이 그 일을 지인들이 있는 자리에서 자랑스럽게 털어놓기도 했다"고 윤씨는 적었다.

임신 때도 폭행은 이어졌다. "어렵게 첫아이를 가졌을 때 대로변에서 맞았다. 임신부를 때리는 것을 보고 대학생들이 달려와 남편을 막아세웠다." 경제적 학대도 동반됐다. 남편은 결혼 뒤 돈벌이를 그만뒀고, 생계는 윤씨의 몫이었다. 휴대전화 판매부터 옷 재단까지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일을 마치고 귀가가 늦으면 남편은 "바람이 났다"며 가위로 윤씨의 옷가지를 찢어발겼다.

10년 넘게 견딘 윤씨는 지난해 이혼을 결심했다. 남편의 매질로부터 세번째 달아난 참이었다. 윤씨와 가정폭력 피해자 쉼터에서 함께 지냈던 남아무개(42)씨는 지난해 7월 윤씨가 처음 쉼터에 들어서던 날을 똑똑히 기억했다. 아이 둘의 손을 단단히 붙든 젊은 여성이 짐 하나 없이 문을 두드렸다. "아침에 남편이 흉기를 들고 죽이겠다고 해서 싹싹 빌고 출근했다가 도망쳐 나왔다고 했다"고 남씨는 기억했다.

윤씨는 멍투성이 몸을 찍은 사진과 병원 진단서, 일기처럼 적어온 진술서 등을 몽땅 정리해 법원에 냈다. 상습적인 폭력을 증명할 자료였다. 쉼터에서도 성실히 자립을 준비했다. 9개월여 사회복지를 공부하고 취업을 준비하며 법원의 결정만 기다렸다.

의정부지법 고양지원은 윤씨와 남편에게 부부상담 명령을 내렸다. 윤씨의 지인들은 "워낙 폭력이 심했기에 법원에서 부부상담 명령을 내렸다고 했을 때 놀랐다. 정임이가 '부부상담 받는 것이 너무 괴롭다'고 여러 차례 말했다"고 입을 모았다.

고양지원에 따르면 두 사람은 각각 2차례씩 따로 상담을 받았다. 상담을 언제 끝낼지는 상담위원의 판단에 달려 있어 끝을 기약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달 윤씨는 스스로 아이들을 데리고 남편을 다시 만났다. 윤씨의 지인은 "의미없는 부부상담을 이어가는 대신 서둘러 이혼 합의를 끌어내고 싶어 했다. 합의를 위해 마음이 약해졌던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 4일 윤씨는 아이들과 집에 들렀다. 어린이날을 앞두고 "하루만 아이들과 지내자"던 남편의 말을 뿌리치지 못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남편이 '너는 나하고 죽어야 헤어진다'고 말한 적이 있다"고 윤씨는 진술서에 적었다. "결국 그 말대로 됐어요…." 언니 윤씨는 말을 더 잇지 못했다.

고양지원 관계자는 "아내가 상습폭력을 이유로 이혼을 청구했고 남편은 우발적인 폭행이 한번 있었을 뿐이라며 다투는 사안이었다. 상담 회부 때 아내가 거부의 뜻을 나타내지 않았고 남편이 목사·상담사로도 활동한다고 해 이런 사태는 예상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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