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할까 빵 할까" 낭만돋는 경양식

2013. 5. 15.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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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esc]커버스토리

80년대까지 번성하다쇠락한 인천 중구 일대그 시절 향수하는여행자들의 발길 늘어나1960~70년대 인천 동구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실존 인물들 통해정감있게 생활사 복원

<파이란> <고양이를 부탁해> <천하장사 마돈나>. 2000년대에 개봉한 이 영화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중구와 동구 등 인천광역시의 원도심이 주요 배경으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 작품들에서 인천은 세상의 중심에서 비켜서 있는 주인공들의 변두리 정서를 보여주는 중요한 장치다. 개항 이후 1980년대까지 번성하다 도심 개발이 연수구 송도 쪽으로 옮겨가면서 90년대 이후 급속히 쇠락한 도시의 풍경이 쓸쓸하면서도 깊은 여운을 자아낸다. 영화롭던 근대와 낙후된 현대가 공존하는 원도심은 80~90년대를 향수의 코드로 호출하게 된 지금에 이르러 흥미로운 도시 여행지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80년대 경양식과 70㎜ 영화의 추억을 찾아

인천역에서 차이나타운을 지나 10분 정도 걸으면 나타나는 중구청 주변은 인천의 근현대를 아우르는 생활사박물관과 같다. 최초의 근대식 공원인 자유공원, 최초의 감리교회인 내리교회 등 '최초'라는 타이틀을 단 역사적 건물과 공간들뿐 아니라 고스란히 남아 있는 오래된 주택가 골목에 삶의 흔적들이 알알이 박혀 있다. "중구청에서 신포시장에 이르는 주택가 골목은 80년대까지 가장 활력 넘치는 동네였지요. 휘황찬란한 신포동 번화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이에요." 인천문화관광해설사회 송덕순 회장의 설명이다. 타일로 벽을 두른 일본식 2층집들 사이로 지금은 문을 닫은 '인영볼링장'의 빛바랜 간판과 '제일탕 여관'의 붉은색 굴뚝이 남아 있다.

이 서민 주택가와 마주보고 있는 바로 윗골목에는 극과 극처럼 번듯한 저택들이 자리잡고 있다. "일제시대 무역상 등을 하던 일본인 거부들이 여기에 큰집을 지었죠. 보세요. 여기서도 탁 트인 항구가 보이죠? 바다를 조망할 수 있고 계단을 올라가면 (자유)공원이 있고 조금 내려가면 전국의 온갖 귀한 식재료를 다 구할 수 있다는 큰 시장도 있으니 부자들이 이곳에 자리를 잡게 된 거죠." 깔끔한 저택과 낡고 옹색한 집들, 또 덤불로 싸여 있는 버려진 집터들이 한 골목 안에 혼재돼 독특한 풍경을 자아낸다.

주택가를 내려와 오래된 벽돌창고를 개조해 만든 인천아트플랫폼을 지나 제물량로에 위치한 등대경양식을 찾았다. 인천의 원도심을 지칭하던 동인천 일대에는 "밥 드릴까요? 빵 드릴까요?"라고 종업원이 질문하는 경양식집 여러 군데가 지금도 성업중이다. 그중에서도 인기가 좋다는 등대경양식은 개업한 지 40년이 넘었다. 양철 굴뚝 옆의 고색창연한 간판 아래 문을 열고 들어가 1만원짜리 돈가스와 1만4000원짜리 비프가스를 시켰다. 빵과 함께 나오는 잼과 버터, 그리고 단무지 한사발까지 요즘 레스토랑과 비교할 수 없이 푸짐하다. 맛 역시 그 옛날 추억의 맛이다. 말랑말랑 독특한 버터 맛이 궁금해 물어보니 "피엑스 버터"라고 주인장의 딸이 대답한다. 항구에 접해 있던 이 동네는 미군부대 음식들이 흘러나오는 '도깨비시장'이 성업했던 곳이기도 하다.

후식으로 나오는 커피를 마시고 신포시장으로 향했다. '인천의 명동'에서 '신이 포기한 동네'로 별명이 바뀔 정도로 침체됐다고는 하나 주말의 신포동은 온통 주차된 차들로 빼곡했다. 70~80년대에 가게 앞에서 모락모락 김을 내며 쪄내는 만두와 쫄면으로 배고픈 10대들을 불러모으던 '신포만두'는 프랜차이즈 식당인 '신포우리만두' 본점으로 바뀌었다. 그 옆의 중국식 공갈빵 가게에는 여전히 줄을 서며, 시장 초입엔 그 시절 사라다빵과 찹쌀도넛 등을 튀겨 팔던 분식집이 전국 명물이 된 닭강정 가게로 바뀌었다.

신포시장에서 동인천역으로 이어지는 대로를 건너면 1915년 문을 연 극장인 '애관극장'이 남아 있다. 지금은 70㎜ 대형 스크린을 펼치던 위용은 사라진 5개관 멀티플렉스로 변모했지만 기말고사가 끝나는 날이면 인천의 중고생들이 집결해 단체관람을 하던 추억이 서려 있는 곳이다.

달동네의 풍경이 옹기종기

동인천역 오른편의 '굴다리'를 건너면 배다리 헌책방 동네가 나온다. 한때 쇠락을 거듭하며 일부 남은 헌책방들도 속속 문을 닫았지만 2000년대 들어 지역 문화인들의 노력으로 이제는 책방들과 갤러리 등이 어우러진 인천 원도심의 문화적 명소로 자리잡았다. 인천 동구 골목 답사는 보통 배다리 헌책방 골목을 출발해 여선교사 기숙사와 창영초등학교 등 인근 근대건축물을 탐방하고 오래된 재래시장인 중앙·송현시장을 거쳐 송림동의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으로 이어진다.

60년대 이후 인천의 대표적 달동네로 알려진 송림동 수도국산(송림산) 일대는 반은 예전 그대로 모습이고 반은 재개발해 고층 아파트가 올라가 있다. 개항 이후 일본인들이 전동에 자리를 잡으며 그곳에 살던 조선인들이 이쪽으로 옮겨오고 한국전쟁 때 고향 잃은 피난민들이 모이면서 거적때기 하나만 있으면 지붕을 세우는 가난한 동네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고층 아파트 단지 옆에 2005년 세워진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은 이제 동네 주민들의 휴식처이자, 방문자들이 60~70년대의 고단한 기억을 웃음으로 반추하게 만드는 곳이다. 솜틀집, 이발소, 만화방 등 옛날 골목과 주거 형태를 고스란히 재현해놓았는데 어떤 마네킹은 회색이고 어떤 것들은 흰색이다. 흰색은 실존 인물이다. 폐지를 줍는 흰색 마네킹 앞에 이런 설명이 붙어 있다. '폐지수집가: 맹태성(1917~2000). 송림동에 살면서 1960년대 인천기계제작소에서 일했다. 퇴직 이후 돌아가시기 전까지, 수문통 일대를 청소하고 송현동 주변 폐지를 주워 어려운 이웃을 돕는 선행을 베푸는 등 많은 사람의 귀감이 되었다.'

달동네의 부잣집이었던 마루 있는 집 안방의 흑백 티브이에서는 김일의 레슬링 경기 영상이 돌아가고 있다. 아이를 업은 소녀가 광주리를 머리에 인 엄마와 인사하는 닥종이 작품 앞에서 소안나 박물관 해설사가 설명했다. "이 작품을 보면서 저게 바로 나야라고 말하며 눈물짓는 50대 방문객들이 꽤 많아요. 일 나간 엄마를 대신해 어린 동생을 업고 아궁이 불을 때며 힘들게 살던 옛 시절을 떠올리시는 거지요." 박물관을 나오니 산동네로 날아온 바람이 얼굴을 두드린다. 먹고살기 힘든 시절 일하느라 굳은 허리를 펴면 불어오는 이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달동네 사람들도 긴 하루를 마감했을 터이다.

인천=글 김은형 기자·사진 박미향 기자

travel tip경양식집 4대천왕

인천 중구 지역 탐방은 인천역에서, 동구 지역 탐방은 동인천역이나 도원역에서 시작하면 좋다. 서울 용산역에서 동인천역까지 경인선 급행전철이 운영되니 시간표를 알아보고 이용하면 좋다.

인천문화관광해설사회

는 원도심을 포함해 인천의 주요 근현대사적 공간 투어의 해설 지원을 한다. 온라인 카페(cafe.daum.net/inmunkwan)에 해설을 신청하면 원하는 지역이나 시간을 조정해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답사할 수 있다.

동인천 일대에는 인천 4대 경양식집이라고 일컬어지는 70~80년대 스타일의 레스토랑이 남아 있다. 등대경양식 외에 국제경양식, 씨싸이드 경양식, 잉글랜드 왕돈가스 등으로 빵과 밥, 야채수프와 크림수프를 골라 먹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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