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아래 도시를 걷는 밤의 산책자들

2013. 5. 8.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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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esc]라이프

번잡한 낮 피해고요한 심야 즐기는사람들 늘어나며밤 프로그램도 생겨나계동 카페 '더 하베스트'밤 10시에 시작하는 동네 달리기부암동 심야오뎅에선한밤의 작은 공연도

오늘 밤 약속은 없지만 갈 곳이 있다. 낮엔 꽃은 피어도 봄은 아니라고 한탄하며 보냈다면 밤엔 봄을 누릴 권리가 있다. 이슥한 밤, 심야도시 서울은 사라지는 봄을 붙잡으려는 산책자들로 붐빈다.

궁궐의 밤

5월1일 저녁 6시, 창경궁 앞에는 긴 줄이 섰다. 평소라면 궁궐 문이 닫힐 시간, 청사초롱 200개, 바닥등 375개가 한꺼번에 불을 밝혔다. 5월1일부터 5일까지 봄맞이 야간 개방을 맞아 궁은 밤이면 등불 대궐로 변했다. 도시의 밤공기에서 꽃향기를 맡기는 쉽지 않지만, 오래된 나무와 떨어지는 꽃잎들을 무수히 거느린 궁궐에서라면 다르다.

야간 개방 첫날 산책은 박상진 경북대 명예교수와 동행했다. 이날 박 교수는 창경궁 통명전 앞에 모인 70명 시민들과 함께 '창경궁의 우리 나무 이야기'를 나누며 2시간 동안 창경궁을 한바퀴 돌았다. 창경궁 쪽에서 준비한 야간 개방 프로그램이다. 임금의 땅, 명정전으로 건너가는 다리 금천교 주변에 살구, 매화, 자두, 앵두나무가 흐드러졌다. 밤의 궁궐에서는 자칫 길을 잃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금천교에서 왼편으로 넘어가면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서 숨졌던 선인문 앞으로 빠진다. 그곳에는 세자의 죽음을 지켜보았던 회화나무가 뒤틀린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오른편으로 깊이 들어가노라면 권력에서 밀려난 대궐 여자들의 공간, 춘당지가 나온다. 저녁 7시는 춘당지에 드리워진 능수버들 그림자와 청사초롱 불빛이 또렷하게 마주치는 시간이다. 춘당지 앞 백송은 하얗게 빛난다.

1984년 일제가 심어둔 놀이시설을 철거하는 복원공사에서 창경궁으로 많은 나무가 옮겨왔다. 박상진 교수 말에 따르면 그중 가장 많은 나무가 단풍나무와 소나무란다. 박 교수는 단풍이 절정인 11월20일 즈음을 창경궁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로 추천한다. 봄이라면 산철쭉, 찔레철쭉, 하얀 꽃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귀룽나무들이 향기를 피워올리는 밤이 제격이다.

이날 저녁 6시부터 밤 10시까지 창경궁을 찾은 사람은 7785명. 보통 낮에 5000명 정도의 방문객을 맞는 것에 비하면 크게 붐볐지만 창경궁의 역사에 비해선 그렇지도 않다. 1923년 한 신문은 창경원 벚꽃 놀이 열풍을 소개하며 이렇게 보도했다. "놀라지 말라. 작일 아침부터 정오까지 들어간 (구경꾼의) 수효가 1만2000명이나 된다 한다."

한밤중 솔로들의 마라톤

밤 10시, 붐비는 궁궐을 빠져나와 한 레스토랑 앞에 섰다. 매주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서울 종로구 계동의 '더 하베스트'는 밤 10시면 식당문을 닫고 '미드나잇 짐'이라는 운동 프로그램을 연다. 식당불이 꺼지면, '더 하베스트'를 운영하는 배영민(34)씨와 손님들은 삼청동 공원 쪽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많을 땐 10명, 적을 땐 2~3명이 달리는 한밤중의 떼거리 달리기다.

"솔로는 회사 끝나고 나면 공허하다. 낮에 시달린 만큼 잠이 더 안 온다. 밤 12시까지 혼자 멍하니 있느니 나와서 운동하고 친해지자는 기획이다. 대학생, 고시생, 회사원 등 이 프로그램에 참가하는 사람들 나이나 직업은 다양하지만 목적은 같고 연대의식도 같다." 역시 솔로면서 "더 잘 놀기 위해서 달리기 시작했다"는 배씨의 말이다. 심야 달리기는 영화판에서 만난 형들과 식당을 차리고, 영화미술, 광고디자인을 하는 배영민씨에게 아이디어를 만드는 시간이다.

계동교회 맞은편에 있는 식당에서 출발해서 감사원 옆길을 지나, 남북회담본부를 지나는 동안 길은 점점 어두워졌다. 식당에서 와룡공원까지 왕복 3.5㎞ 거리의 길은 경사가 심해 허덕거리기 쉽다. 와룡공원까지 달릴 때는 보통 서로의 생각에 잠겨 말을 섞지 않던 일행들이 공원에서 숨을 돌리며 고요하게 빛나는 서울의 불빛을 바라보며 함께 운동을 한다. 여자들은 스트레칭, 남자들은 근력운동을 주로 한다.

배영민씨는 요즘 온라인으로도 뛴다. 나이키 앱과 페이스북을 연동하면 페이스북 친구들이 달린 거리, 시간, 속도가 페이스북에 집계된다. 스마트폰에 위치추적기를 달아 멀리 떨어져 있는 친구들이 그날의 달리기 기록으로 순위를 매기는 것이다. 한편으론 온라인 친구들과 달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식당 손님들과 달리는 셈인데, 함께 달린 식당 손님들은 더 하베스트로 돌아가 문 닫힌 가게 안에서 맥주 파티를 연다. 어쨌거나 같이 달리는 것이 좋다.

오뎅집에서 심야 연주

밤 11시, 텅 빈 광화문길을 지나 혼자 집에 돌아가기 아쉬운 사람들이 숨어드는 가게가 있다. 서울 종로구 부암동 산길에 밤 11시만 되면 불이 켜지는 가게가 있다. 낮에는 꽃집, 밤에는 어묵을 파는 가게 '심야오뎅'이다. 플로리스트인 주인 김슬옹(30)씨는 불면증으로 밤에 잠이 오질 않아 자취방을 헐고 그 자리에 가게를 시작했단다. 안주는 5가지쯤 되고 큰 맥주병만큼이나 술인심이 좋다. 어두운 산길에 차린 이 가게가 소문이 나면서 자리가 없어 사람이 앉질 못하게 되면 잠시 문을 닫는다. 김씨의 본업인 꽃일이 붐벼도 못한다. 지금은 주말 밤 11시에서 새벽 4시까지만 가게를 연다.

5월4일, 심야오뎅집에서 기타소리가 울렸다. 음악감독 권성모씨와 배우 김재록씨가 하는 밴드 금주악단이 이곳에서 새 앨범을 선보였다. 관객은 10명 남짓. 옆사람에게 속삭이듯 다정한 노랫소리가 어묵 냄새를 타고 퍼졌다. 금주악단의 두번째 음반 <2호> 타이틀곡도 '심야오뎅'이다. 이 가게에서 뮤직비디오도 찍었단다. 한밤중 가게를 열고, 밤에 만난 사람들이 만드는 공연. 그렇게 역사는 밤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글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life tip밤은 길고 놀 곳은 많다▣ 경복궁 야간 개장

봄밤은 끝나지 않았다. 5월22일부터 26일까지 경복궁도 야간 개장을 한다. 저녁 6시 주간 관람을 끝낸 뒤, 6시30분 근정전에 불을 밝히고 다시 궁궐 문을 열 예정이다. 밤 10시까지 경복궁을 찾는 사람은 보통 5만명 정도라고 한다.

▣ 인디포럼 심야식당

비경쟁 독립영화축제인 '인디포럼 2013 영화제'를 앞두고 5월10일 저녁 7시 '인디포럼 심야식당-맛없으면 뛰어내리는 옥상파티'가 열린다. 서울 광화문 인디스페이스 극장 옥상에서 열리는 심야식당에는 이송희일 감독, 김일권 프로듀서, 임철민 감독 등이 '천하제일 요리대회'에 참여하고 밴드 '당근과 채찍'이 식당 음악을 맡았다.

▣ 남산 심야 트레킹

6월5일 서울 남산에서는 한밤중 트레킹 대회가 열린다. 참가자들은 밤 9시 남산국립극장을 출발점으로 삼아 4㎞와 7㎞, 2가지 코스를 달리게 된다. 한밤중 남산길을 500명이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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