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의 재발견① 서울의 궤적을 간직한 유산

2013. 5. 8.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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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 복구로 조명받는 대표 문화재

숭례문 복구로 조명받는 대표 문화재

(서울=연합뉴스) 새로운 왕조인 조선은 도읍을 한양으로 옮겼다. 새로운 수도에는 경계가 필요했다. 도시를 둘러싼 높은 성곽으로 인해 한양은 도성(都城)이 됐다.

순성(巡城), 즉 성을 걸어서 돌아보는 일은 조선시대 최고의 유희였다. 봄이 되면 사람들은 짝을 지어 성곽을 한 바퀴 순례하며 한양의 경치를 감상했다.

60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순성이 다시 유행이다. 그동안 도시는 팽창했고 성벽은 상당 부분 허물어졌지만, 풍경이 수려하고 문화가 숨 쉬고 있어 찾는 이가 많다.

한양도성을 거닐다 보면 잊고 있던 역사를 배우고, 구중궁궐과 고층빌딩이 공존하는 아름다운 서울의 진면목과 마주하게 된다.

길이가 18㎞에 이르는 도성의 과거를 돌아보면, 시작은 조선의 천도였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한양의 인구보다 많은 10만 명의 지방 주민을 불러 축성을 명했다.

그는 도성을 97개 구역으로 나눈 뒤 천자문 순서에 따라 하늘 천(天)부터 조상할 조(弔)까지 글자를 부여했다. 하지만 흙과 돌로 만든 성은 성겼다.

태조의 손자인 세종은 연인원 30만 명을 동원해 대대적으로 재정비했다. 이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뒤 도성은 숙종 때에 이르러 보수됐다.

인조가 청군에 맞서 항전했던 남한산성과 달리 한양도성은 한 차례도 군사용으로 쓰이지 않았다. 나라에 변란이 닥치면 도성을 방어책으로 삼고 싸우기보다는 피난을 떠났다.

오히려 성은 임금의 권위와 수도의 위상을 높여주는 상징물이었다. 내부는 신성한 공간이었고, 도성의 출입은 엄격히 제한됐다.

국권을 침탈한 일제는 조선의 흔적을 지우고자 했다. 현대화와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성곽은 시나브로 붕괴됐다. 특히 시내에 전차 선로를 닦는다는 이유로 많은 구간이 해체됐다.

숭례문(崇禮門)과 흥인지문(興仁之門) 주변의 성이 무너졌고, 서대문에 해당되는 돈의문(敦義門)과 서소문인 소의문(昭義門)은 도시계획 과정에서 철거됐다. 이때 평탄한 땅에 있던 한양도성은 대부분 자취를 감췄다.

한양도성 복원은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초기에는 군사적 목적으로 청와대의 뒷산인 북악산부터 공사가 시작돼 1980년까지 낙산과 장충체육관 인근의 성벽이 말끔하게 수리됐다.

1990년대부터는 도시의 역사성을 회복하는 차원에서 복원이 진행되고 있으며, 지난해에는 백범광장에 새로운 성벽이 들어섰다.

서울시는 이러한 작업을 토대로 한양도성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이미 잠정목록에 오른 한양도성은 조선의 정체성과 건국이념이 담긴 독창적인 문화재여서 유산으로서의 가치가 충분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사진/이진욱 기자(cityboy@yna.co.kr), 연합뉴스 DBㆍ글/박상현 기자(psh5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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