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년 전, 서태지가 철원 노동당사에서 꾸었던 '꿈'

2013. 4. 28.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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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성낙선 기자]

맑은 물소리를 내며 유유히 흘러내려가는 한탄강.

ⓒ 성낙선

군탄공원에서 도피안사로 가는 길은 미련하다 싶을 정도로 멀리 돌아가야 한다. 자동차도 아니고, 자전거를 타고 가는 길로는 상당히 먼 거리다. 길을 가던 도중에, 애초 왜 이 길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는지 후회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자동차가 잘 다니지 않는 길을 택한 탓에 길을 찾는 일도 쉽지 않다. 그래도 소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길에서 철원이 아니고서는 절대 볼 수 없는 뜻밖의 풍경과 마주친다. 요즘은 철원도 관광이라는 이름의 개발이 잦은 까닭에 원시 상태의 한탄강을 보는 일이 쉽지 않다. 그런데 이 길은 거의 날것 그대로의 한탄강을 보여준다. 평야 한가운데로 깊은 협곡이 지나가고 그 협곡 위로는 논과 밭이 드넓게 펼쳐져 있다. 그 논과 밭이 끝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이것도 순전히 자전거여행을 하는 덕에 맛볼 수 있는 묘미다. 우연히 발길을 들여놓은 곳에서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풍경과 마주치는 순간, 가슴이 짜릿해진다. 이런 감동은 자동차를 타고 다닐 때는 좀처럼 맛보기 힘든 것이다. 자전거는 이렇게 협곡 아래를 유유히 흐르는 한탄강을 가로지른 뒤, 철원평야 위로 농로나 다름이 없는 한적한 도로를 끝없이 달려간다.

도피안사. 해탈문 뒤로 600년 묵은 느티나무가 보인다.

ⓒ 성낙선

'피안'을 잃은 도피안사, '평화'를 꿈꾸는 노동당사

도피안사는 겉보기와는 달리 역사가 꽤 깊은 절이다. 885년에 도선국사가 창건해 오늘까지 그 이름을 이어오고 있다. 오랜 세월을 지나온 만큼 우여곡절도 많이 겪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절은 1100여 년 전의 그 절이 아니다. 기록에 의하면 1898년에 화재로 소실된 절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다시 한국전쟁 중에 완전히 불타 없어진 절을 1959년에 재건한 것으로 되어 있다.

절을 재건할 당시, 절터 땅 속에 파묻혀 있던 철불이 발견됐다. 이 철불이 천년이 넘은 '철조비로사나불좌상'이다. 그렇게 해서 겨우 전쟁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철불과 절 마당 한가운데에 서 있는 삼층석탑이 거의 전부다. 도피안사는 이 철불과 삼층석탑을 중심으로 재건됐다. 그 후로도 도피안사에서는 절을 '재건'하는 일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도피안사, 1천년 전에 만들어진 철조비로사나불좌상.

ⓒ 성낙선

전쟁으로 인한 후유증이 그렇게 쉽게 사라질 리가 없다. 절 한쪽 마당에 공사 자재가 어지럽게 널려 있다. 1988년에 대적광전과 삼성각 등을 개축하거나 증축했다. 하지만 절을 고쳐 짓는 공사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도피안사'는 '도선국사가 산수 좋은 곳을 찾던 중 영원한 안식처인 피안과 같은 곳에 이르렀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 지금의 도피안사에서는 피안을 떠올리는 일이 쉽지 않다.

전쟁 중에 불타 없어진 것은 도피안사뿐만이 아니다. 도피안사를 떠나 노동당사를 향해 가는 길에, 다 부서지고 벽체 일부만 남아 있는 교회 건물 한 채가 나타난다. '철원 감리교회'다. 이 교회 역시 전쟁의 참화를 겪어 완전히 파괴된 상태로 남아 있다. 그 풍경이 상당히 끔찍하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남긴 참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파괴된 철원 감리교회.

ⓒ 성낙선

철원에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극한의 참화는 아무래도 '철원 노동당사'까지 가야 볼 수 있다. 건물 자체만 놓고 봤을 때, 노동당사는 이 모든 참상의 결정체다. 노동당사는 멀리서 봐서는 외관에 거의 아무런 이상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벽체 말고 사실상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벽체만 남아 있는 게 더 기괴하게 보인다. 벽이란 벽에 모든 총탄과 포탄 자국이 남아 있다. 건물이 앞뒤 좌우를 불문하고, 어디 한 군데 성한 구석이 남아 있는 걸 찾아보기 어렵다. 불에 탄 흔적도 그대로다. 노동당사 위로 총탄과 포탄이 비 오듯 쏟아졌던 게 분명하다. 그런 상태로 벽체를 유지한 채 서 있는 건물이 참으로 기이하다.

철원 노동당사.

ⓒ 성낙선

노동당사는 마치 죽음의 상징과도 같은 건물이다. 한국전쟁 당시 노동당사 일대는 옛 철원읍의 시가지에 속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 일대에서 이 건물 외 다른 건물은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다. 전쟁통에 모두 다 사라졌다. 앞서 지나쳐온 감리교회도 그 중 하나다. 이 일대에서 얼마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지 알 수 있다. 노동당사는 철원이 북한에 속해 있을 때, 조선노동당 철원군 당사 건물로 쓰였다.

철원 노동당사, 총탄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는 벽.

ⓒ 성낙선

서태지와 아이들이 전성기 때 이 건물에서 '발해를 꿈꾸며'를 뮤직비디오로 찍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이 뮤직비디오는 서태지가 노동당사 안에서 흰 비둘기를 날리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노래 가사는 그보다 더 인상적이다. 상당히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노래 가사 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 한민족인 형제인 우리가 서로를 겨누고 있고 우리가 만든 큰 욕심에 내가 먼저 죽는 걸 진정 너는 알고는 있나 전 인류가 살고 죽고 처절한 그날을 잊었던 건 아니었겠지... (중략)... 언젠가 작은 나의 땅에 경계선이 사라지는 날 많은 사람의 마음 속엔 희망들을 가득 담겠지 난 지금 평화와 사랑을 바래요…"

서태지와 아이들이 그 노래를 발표한 지 어느새 2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다. 그 사이 서태지와 아이들이 '발해를 꿈꾸며'를 통해 말하려고 했던 것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알 수 없다. 그들이 노래하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달라진 것 또한 아무것도 없다. 노래는 여전히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노동당사가 평화의 상징이 될 날은 언제가 될까?

한 집 건너 한 집 지뢰 폭발, 희망을 잃지 않은 대마리

도로 주변, 지뢰 표지판.

ⓒ 성낙선

노동당사에서 백마고지 전적지가 있는 곳까지는 약 2km다. 이제 이 여행도 거의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다. 그런데 백마고지 전적지까지 가는 길이 예사롭지 않다. 도로 양편으로 철조망이 쳐 있고, 그 철조망 위에 역삼각형 모양의 작은 지뢰 표지판이 매달려 있다. 지뢰 매설지역이다. 그 지뢰 표지판을 보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진다.

이 지역은 아직도 상당 부분이 지뢰 지대로 남아 있다. 휴전선 일대는 지구상에 지뢰가 가장 조밀하게 매설된 지역 중에 하나다. 문제는 그 지뢰들이 구체적으로 어디에 얼마나 매설됐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지뢰 폭발 사고는 결코 남의 얘기가 아니다. 민통선 안에서는 지금도 간혹 지뢰 폭발 사고로 목숨을 잃거나 다치는 일이 계속되고 있다.

백마고지가 있는 대마리는 특히 지뢰 폭발로 목숨을 잃거나 장애를 입은 주민들이 많은 곳으로 유명하다. 대마리는 정부가 1960년대에 민통선 안으로 농민들을 집단 이주시켜 농토로 개간한 지역이다. 당시 정부는 이곳에 이주하는 농민들에게 땅과 주택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이 지역에서 지뢰 사고가 발생하더라도 어떠한 보상도 요구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쓰게 했다.

그 대가는 혹독했다. 그 후로 농민들은 땅을 개간해 살면서, 한 집 건너 한 집마다 지뢰 폭발 사고를 겪어야 했다. 하지만 어디에도 하소연할 곳이 없었다. 그 고통은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렵다. 죽은 자는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한 채 땅에 묻히고, 살아남은 자는 평생을 사고로 인한 후유증을 앓으며 살고 있다.

도피안사에서 내려다 보이는 들판과 학저수지.

ⓒ 성낙선

그렇다고 대마리 주민들이 희망을 버리고 좌절 속에 살아온 것은 아니다. 주민들은 외지인들은 상상하기 힘든 고난을 겪으면서도 결코 그들의 땅을 포기하지 않았다. 백마고지 전적지를 향해 가는 길목에 이곳이 '대마리 백마고지'가 있는 곳임을 알려주는 거대한 표지석이 서 있다. 그 표지석에 목숨을 걸고 대마리를 일군 마을 주민들의 강한 의지가 서려 있는 걸 볼 수 있다.

이 대마리가 최근에는 'DMZ와 평화가 공존하는 체험형 관광마을'로 거듭나고 있다는 소식이다. 철원군은 국비와 지방비 25억 원을 들여 '철새도래지 등 생태관광자원'을 개발하고 '2km 철책탐방 코스'를 조성하는 등 이 마을을 평화생태마을로 발전시킨다는 계획이다. 물론 그 계획에는 한반도에 평화가 계속될 거라는 기대가 담겨 있다.

한국전쟁 최대 격전지 '백마고지'에서 다시 되새기는 평화

백마고지 전적지, 위령비와 위령탑.

ⓒ 성낙선

백마고지 전적지에는 백마고지 전승 기념비와 위령탑이 세워져 있다. 한국전쟁 당시 철원은 서울로 이어지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백마고지는 곧 철원과 서울을 지키는 최전선이었다. 그로 인해 한국군을 비롯한 유엔군은 백마고지를 놓고 북한국과 중공군을 맞아 치열한 전투를 벌여야 했다.

기록에 의하면, 1952년 10월 6일에서 15일 사이 10일간 백마고지에서만 고지를 뺏고 빼앗기는 전투가 무려 24차례나 벌어졌다. 붉은 피가 산을 덮고, 시체가 시체를 덮는 전투가 계속됐다. 그 사이 아군은 이곳에 22만여 발의 포탄을, 중공군은 5만5000여 발을 쏟아 부었다. 이 전투에서 아군과 적군 모두 2만여 명이 사망했다. "역사상 유례가 없는" 격전이었다.

전투가 끝났을 땐 산등성이가 마치 백마가 쓰러져 누워 있는 것처럼 하얗게 벗겨졌다고 한다. '백마고지'라는 이름은 그 모양에서 연유했다. 당시 어떤 전투가 벌어졌는지는 영화 < 고지전 > 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실제 전투가 벌어졌던 백마고지는 위령탑이 서 있는 곳에서 비무장지대 안쪽으로 약 2km 떨어진 곳에 있다.

위령탑 뒤로 자유의 종이 걸려 있는 상승각이 있다. 종각에서 백마고지가 빤히 바라다 보인다. 산은 여전히 헐벗은 모습을 하고 있다. 백마고지 전적지 주변으로는 철원평야와 마을이 넓게 자리를 잡고 있다. 지극히 평화로운 풍경이다. 그 풍경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고 있으려니, 세상에 평야처럼 평화로운 곳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백마고지 전적지, 위령비 너머로 내려다 보이는 마을이 무척 평화로워 보인다.

ⓒ 성낙선

백마고지 전적지에서 내려와 백마고지역을 향해 가는 길 건너로 '두루미평화관'이 보인다. 그 이름에 평화를 소망하는 주민들의 뜻이 담겨 있다. 건물 외관이 앞서 지나쳐 온 노동당사를 닮은 것도 의미심장하다. 대마리 주민들은 노동당사에서 동족이 서로 총부리를 겨눠야 했던 암울했던 과거를 보고 있는 게 아니라, 다 같이 잘 사는 평화로운 미래를 보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 건물 왼쪽 측면에는 '상허이태준문학비'와 이태준 동상이 서 있다. 작가 이태준은 철원 태생이다. 월북 작가라는 낙인이 찍혀 아직까지 홀대를 받고 있는 문인들 중에 한 사람이다. 철원에서 그의 동상을 보는 것도 의외다. 우리는 두루미평화관에서 이 마을 주민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느낄 수 있다.

백마고지, 백마고지 전적지 안 상승각에서 바라다본 광경이다. 백마고지는 395미터의 낮은 산이다.

ⓒ 성낙선

백마고지 전적지에서 백마고지역까지는 1km 조금 넘는 거리에 떨어져 있다. 백마고지역은 최근에 만들어진 역답게 제법 세련된 모습을 하고 있다. 허허벌판에 현대식 역 하나가 서 있는 게 조금 생뚱맞아 보인다. 시골역이 전혀 시골역이 아니다. 하지만 역사 안은 여느 시골역 못지않은 소박한 풍경을 보여준다. 이 역에는 역 직원이 상주하지 않는다.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대부분 마을 주민들과 군인들이다. 주민들과 군인들이 뒤섞여 서로 잡담을 나누고 있다. 관광객은 찾아보기 힘들다. 최근의 남북 관계가 이곳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백마고지역은 2012년 11월에 개통됐다. 경원선이 끊어진 지 60년만이다. 이 작은 역이 경기도 연천에서 이곳까지 오는 데 무려 60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린 것이다.

백마고지역, 경원선 남쪽 중단점.

ⓒ 성낙선

백마고지역은 개통과 동시에 경원선의 남한 쪽 최북단 종착역이 됐다. 이 역이 다시 원산까지 가는 데는 또 얼마나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할까? 지금으로서는 이 철도를 다시 이을 날이 언제가 될지 알 수 없다. 좀처럼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지금처럼 대립과 갈등이 계속되는 상태에서는 아무도 평화를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철원은 매우 아름다운 풍경을 간직한 고장이다. 철원평야를 관통해 지나가는 한탄강은 하늘이 내린 보물이나 마찬가지다. 이 아름다운 고장에서 전쟁의 참상을 기억해내야 하는 일이 가슴 아프다. 철원이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가르쳐주는 상징적인 장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날이 가문 탓인지 도로 위로 먼지가 몹시 심하게 날린다. 마른 땅을 촉촉이 적셔주는 봄비가 그립다. 평화가 그립다.

[주요 경유지

]

승일공원 ? 순담계곡 ? 군탄공원(군탄사거리 좌회전) -철원읍 ? 철원초등학교·철원중학교 ? 동온교(문혜천) - 철원군노인전문요양원 ? 한탄강 ? 냉정저수지 ? 봉우교 ? 장흥초등학교 - 철원농업기술원 ? 오덕사거리(직진) - 학보교(대교천, 건너기 전 우회전) - 도피안사 ? 도피안사교(건너자마자 우회전) - 한다리교(다리 건너 계속 직진) - 철원 감리교회 ? 노동당사 ? 백마고지 전적지 ? 백마고지역

도피안사 가는 길에 마주친 전차장애물.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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